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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뉴튼 존 공식 웹사이트 초기화면.
 올리비아 뉴튼 존 공식 웹사이트 초기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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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에 청소년과 청년시절을 보낸 한국의 남성들에게는 '올리비아'라는 이름의 두 연인이 있었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여주인공 올리비아 핫세와 가수 올리비아 뉴튼 존이 그들이다.

두 사람 모두 갓 피어난 배꽃 같은 청순미로 전 세계의 수많은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고백하자면, 기자의 청년시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책꽂이에 올리비아 뉴튼 존의 사진이 놓였던 것.

그게 어디 한국 남성들뿐이었으랴? 전 세계의 수많은 남자들은 너나없이 두 명의 올리비아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한 번쯤 빠져본 아릿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현실세계엔 존재하지도 않는 여신에게 기꺼이 굴복하듯이.

그런데 청순한 외모와 달콤한 목소리로 그 시절 남성들의 판타지를 독차지했던 올리비아 뉴튼-존을 천사들이 시기했던 것일까? 사랑에 관한한 그녀는 그닥 행복하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한국계 파트너 패트릭 김 맥더모트(이하 패트릭 김)와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났다. 참고로 서양에서의 '파트너'는 결혼식만 올리지 않은 사실혼 관계를 의미한다.

인터넷에 접속한 흔적 드러나

최근 호주 신문과 TV는 "올리비아 뉴튼 존과 9년 동안 사실혼 관계로 지내다가 4년 전에 낚시사고로 실종된 패트릭 김이 생존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미국 NBC-TV '데이트라인' 프로그램 특종을 크게 보도했다.

1월 27일자 호주 <데일리텔레그래프>는 "최근 NBC방송국이 고용한 사설탐정이 패트릭 김이 살아있다는 정황을 포착했다"고 전하면서 "웹사이트에 하이테크 함정을 만들어놓았는데 거기에 패트릭 김이 접속한 흔적이 보인다"고 보도했다.

한편 텍사스 소재 사설탐정소의 선임 조사관 필립 클레인은 NBC-TV에 출연해서 "패트릭 김은 의심의 여지없이 살아있다. 그는 멕시코 해안을 따라서 남아메리카 쪽으로 움직이면서, 우리가 설치해놓은 거미사이트(spider site)에 정기적으로 접속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서 "도망자는 항상 어깨너머로 추적자를 힐끔거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선만 쫓아가면 된다"면서 "최근 그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멕시코 '카보 산 루카스' 해변에서 아주 흥미로운 접속이 있었다"고 밝혔다.

올리비아 뉴튼 존의 전 파트너 패트릭 맥더모트가 살아 있다고 보도한 1월 27일자 호주 신문.
 올리비아 뉴튼 존의 전 파트너 패트릭 맥더모트가 살아 있다고 보도한 1월 27일자 호주 신문.
ⓒ 데일리텔레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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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김 맥더모트는 누구인가?

필립 클레인은 올리비아 뉴튼 존에 관해서도 "우리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고 있는 올리비아도 정기적으로 그 사이트를 접속해서 패트릭 김의 최신 정보를 알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그녀가 아시아 투어를 하면서 묵었던 모든 호텔에서 접속한 흔적을 그 증거로 들었다.

아직 살아있다면 올해 53세가 된 패트릭 김 맥더모트는 두 살에 '홀트아동복지재단'을 통해 미국 맥더모트 집안에 입양된 입양아 출신이다. 입양서류에 기록된 그의 이름은 김정남이었다. 그의 미들네임이 'Kim'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패트릭 맥더모트 찾기' 웹사이트
 '패트릭 맥더모트 찾기'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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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로 광고사진과 CF를 찍는 카메라맨으로 활동하면서 할리우드와 인연을 맺었다. 그의 첫 번째 부인 이벳 니파도 영화배우였다. 그녀는 한국에서도 상영된 영화 <워킹 톨(Walking tall)>과 TV시리즈 <CSI 마이애미>에 출연했다.

패트릭 김은 올리비아 뉴튼 존을 만나기 전에 이벳 니파와 이혼했는데 둘 사이에는 '챈스'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다. 미국 NBC <데이트라인>의 보도에 의하면 바로 그 아들이 그의 실종사건의 원인이었다.

1996년 올리비아 뉴튼 존의 CF를 찍으면서 그녀의 연인이 된 패트릭 김은 그후 카메라맨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 여파로 아들의 양육비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했던 것. 오랫동안 혼자 고민하던 패트릭 김은 21세기 판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을 선택했다.

21세기 판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

아서 밀러의 희곡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은 거대한 산업사회의 소모품으로 살다가 냉정하게 버려진 어느 은퇴 세일즈맨이 자식들에게 생명보험금을 물려주기 위해서 자동차 과속으로 자살하는 스토리다.

패트릭 김도 아들 챈스에게 자신의 생명보험금 10만 달러를 받게 만들기 위해서 낚시사고를 위장하여 스스로 종적을 감춘 것으로 사설탐정은 추정하고 있다. 2005년 6월 30일 로스앤젤레스 남쪽 샌 페드로 해변에서 낚시 도중에 실종된 것.

2007년 호주 '채널9'에 출연한 올리비아 뉴튼 존은 "패트릭이 실종되기 하루 전날, 그는 근사한 꽃다발과 장난기 가득한 카드를 나에게 주면서 "할리우드의 번거로운 삶이 힘들고, 조용하게 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의 경제적 어려움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고 그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보험회사가 어떤 곳인가. 보험회사는 패트릭 김 실종사고 재판과정을 NBC-TV <데이트라인> 프로그램에 제보했고, NBC-TV는 텍사스 소재 사설탐정회사에 지속적인 추적조사를 의뢰했다. 그 결과를 시리즈물처럼 방영하고 있는 방송사는 최근에도 그 속보를 내보냈다.

한편 사설탐정회사 선임 조사관 필립 클레인은 호주 '채널7'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패트릭 김의 아주 가까운 곳까지 접근했다"면서 "스스로 종적을 감춘 사람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우리는 그의 꼬리를 붙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패트릭이 사라진 후 우울증 걸린 올리비아 뉴튼 존

2005년에 실종된 한국계 남편 패트릭 김과 함께 한 올리비아 뉴튼 존.
 2005년에 실종된 한국계 남편 패트릭 김과 함께 한 올리비아 뉴튼 존.
ⓒ 채널9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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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뉴튼 존은 2007년 12월, '채널9'에 출연하여 "시드니올림픽 당시 패트릭과 함께 호주에 머물렀다. 그에게 내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곳을 안내하고, 호주 동부해안을 함께 여행하면서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감을 느꼈다"고 털어놓으면서 울먹였다.

패트릭 김의 실종으로 지독한 우울증을 앓던 중이었다. 올리비아 뉴튼 존은 2008년 1월에 발간된 '호주 우먼스 위클리(Australian Woman’s Weekly)'에도 자신의 우울증을 고백했다. 특히 패트릭 김과의 사랑 이야기를 자세하게 밝혔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녀는 같은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유방암에 걸렸을 때도, 외동딸 크로에가 거식증에 걸렸을 때도 이렇게 절망하진 않았어요. 패트릭이 사라진 후에 하염없이 슬프고 암울해서 며칠 동안 울었다"고 털어놓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돈과 명예가 행복의 절대조건은 아닙니다. 나를 보세요.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밤마다 울면서 지내잖아요. 사랑을 잃으면 천국은 사라지고 맙니다. 사랑을 잃은 새는 노래를 부를 수가 없어요. 나이가 들면서 더 확실해지는 게 있습니다. 성공이 나의 밤을 포근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거지요(Success doesn't keep me warm at night)."

나중에 어렵사리 우울증을 극복한 올리비아 뉴튼 존은 '우울증 극복하기(Beyond blue)'라는 호주 우울증 퇴치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가 유방암을 이겨낸 후에 호주 멜버른에 '올리비아 뉴튼 존 암 센터'를 개설한 것과 비슷한 맥락의 사회봉사활동의 일환이었다.

청순미와 섹시함을 동시에 지닌 야누스

1980년대의 올리비아 뉴튼 존
 1980년대의 올리비아 뉴튼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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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뉴튼 존의 청순함은 단지 외모에서 비롯된 아우라(aura)가 아니다. 마약과 무분별한 섹스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던 70-80년대의 팝 뮤직 세계에서 그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순결을 지켰다. 동료가수들이 '수녀'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다.

반면에 올리비아 뉴튼 존이 1981년에 발표해서 공전의 히트곡이 된 '피지컬(Physical)'은 섹시미가 물씬 풍기는 노래였다. 그 당시엔 흔하지 않았던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어 80년대 내내 섹시스타의 상징처럼 보냈다. 그녀가 '그리스'에서 입은 검은색 바지는 바람에 날리는 마리닐 먼로의 치마와 더불어 가장 섹시한 옷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올리비아 뉴튼 존은 호주국적의 가수이지만 1948년 영국 캠브리지의 명문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브라이언 뉴튼 존은 캠브리지 대학 교수였고, 같은 대학에 근무하면서 1954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막스 본(Max Born) 교수는 그녀의 외할아버지다.

올리비아 뉴튼 존은 가족을 따라서 5살 때 호주 멜버른으로 이주하여 성장했고, 음악적 재능을 살리기 위해서 스무 살이 되던 1968년에 영국으로 돌아갔다. 호주TV 음악프로그램에 나가서 ‘Sing, sing, sing'이라는 노래를 불러서 받은 상금으로 비행기 티켓을 샀다.

영국에서 계속 공부하면서 데카레코드에서 취입한 노래들이 작은 반응을 보이다가 1971년에 취입한 밥 딜런의 곡 '당신이 없으면(If not for you)'이 크게 히트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이 된 노래

가수들 세계에서는 종종 자신이 부른 노래가 운명이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올리비아 뉴튼 존의 경우도 그렇다. 그녀의 첫번째 히트곡이었던 '당신이 없으면(If not for you)'이 그녀의 운명을 예시한 곡이 되고 말았다. 다음은 그 중의 몇 소절이다.

당신이 없다면 그대여, 난 현관조차 못 찾을 거예요. / 심지어 거실의 마루조차 보지 못할 겁니다. / 당신이 없다면 난 너무 슬퍼서 우울증을 앓겠지요.(If not for you, babe, I couldn't find the door / Couldn't even see the floor / I'd be sad and blue if not for you)

패트릭 김이 실종될 당시 전세 낸 낚싯배의 이름이 '자유(Freedom)'였다고 한다. 그는 그 배를 타고 스스로를 지우면서 할리우드의 번다한 삶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을까? 아니면 남아메리카를 떠도는 '해변의 길손'이 되어 자유인으로 살고 있을까?


태그:#올리비아 뉴튼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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