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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드와 동거에 들어간 김수임

서울 옥인동 19번지에는 이완용의 아들이자 총독부 남작 이항구가 살던 집이 있었다. 김수임이 베어드와 살림을 차린 그 집은 몇 개의 중문을 거쳐야 고대광실 같은 안채가 나오는 저택이었다. 미 군정청은 친일 약점이 있는 이항구의 집을 적산으로 간주하여 몰수했고, 베어드는 그것을 헐값으로 불하받은 것이었다.

넓은 정원에는 수목이 많았고 뜰의 화원에는 온갖 야생화가 사철 꽃을 피웠다. 증축된 이층 양옥의 통유리에 따뜻한 햇살이 감돌았다. 대리석 바닥에는 페르시아 풍 카펫이 깔려 있었다. 침실에는 넓은 침대가 한편에 있었고 그 위에 새털 이불이 덮여 있었다. 그리고 주방에는 온갖 술잔과 와인과 도자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수임아, 국제결혼이면 어떠니? 그리고 네 나이도 적은 게 아니야. 애국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나윤숙이 김수임에게 결혼하라고 채근하며 한 말이었다. 베어드는 점령국의 젊은 여인 김수임에게 자상하고 관대했다. 그는 김수임의 예상보다 훨씬 성실하고 얌전한 면모를 보여 주었다. 게다가 그는 김수임이 어려서부터 꿈꾸어 왔던 물질적 환경을 그녀에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인지 김수임은 이강국을 내처 잊기로 했다. 

베어드는 동양 취향의 미국인이었다. 대체로 동양 취향의 서양인이 그렇듯이 그것은 좋게 말해 동양 취향이지 관점에 따라 일종의 '사이코' 기질로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가 동거를 서두른 것은 짝사랑했던 임수경을 의식한 면도 있었다. 그러나 임수경은 베어드가 결혼했는지 동거하는지 아니면 혼자 사는지조차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의로운 사람은 축하하지 않는 결혼

'물질적 선심에 약한 것은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여자들의 애처로운 속성이다.'

김수임이 미군과 동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임주호의 소감이었다.

"저 결혼했어요."

호텔 로비에서 마주친 임주호에게 김수임이 말했을 때, 임주호는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이 말했다.

"나윤숙 씨의 충고를 받은 것이지요?"

김수임은 마음이 어두워졌다. 빈말로나마 축하한다는 말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임주호는 그녀를 연민의 눈빛으로 응시할 뿐 결혼에 관해 어떤 덕담도 건네지 않았다.

임주호와 상관없이 김수임은 예상 외로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다. 그 중에는 내무장관 조병옥과 경찰청장 장택상도 들어 있었다. 그들은 새로 승진 발령된 미군정사령관 정보참모 베어드에게 아주 많은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임주호는 그녀의 결혼을 축하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옥인동 저택 2층 창가에서 커튼을 젖히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김수임의 뺨에 물기가 번져 있었다. 그녀는 임주호가 자기 결혼에 무심했지만 그가 의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아팠다.

'의로운 사람은 축하하지 않는 결혼.'

그녀는 가슴이 허전했다.

'사랑에는 감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베어드에게 감정이 없다. 그의 호의를 나는 잘 안다. 그렇기에 그를 배신할 수는 없다. 임주호에게는 감정이 있다. 하지만 임주호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남자다. 그는 순결하고 풍요로운 사람이다. 그리고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나는 이강국에게 사랑의 감정이 있었고 지금은 증오가 있다. 그런데 증오도 감정이라면 감정이다. 그러므로 동거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이강국과 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이강국은 내게 나타나지 않았다.'

별빛 아래에서 그녀는 이런 상념들을 쓸쓸히 품어보고 있었다.

베어드는 응접실에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들여놓았다. 그녀는 피아노 위에 작은 성경을 올려놓았다. 베어드는 그녀에게 호텔을 그만두고 집에서 음악이나 들으며 평화롭게 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호텔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가끔 임주호를 마주칠 수 있는 호텔이었고, 이강국이 불쑥 찾아올 수도 있는 호텔이기 때문이었다.

성탄절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유년 시절에 다니던 주일학교를 생각했다. 바닥에 하얀 가루를 눈처럼 뿌리고, 선교사들이 보내온 과자를 오물거리며 앙증맞은 카드를 접고 정리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꽃과 나비를 잘 접어 칭찬받던 추억을 되새겼다. 소나무 트리에 장식품들을 얹어 놓고 의기양양 바라보던 일도 떠올랐다.

하지만 왠지 그 시절의 소녀는 지금의 자기와 다른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전축 위에 음반을 놓았다. 감미로운 캐럴이 울려 퍼졌다.

Silent night, Holy night
All is calm, All is bright.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노래를 들으며 불현듯이 명백한 사실 하나를 깨닫고 있었다. 그녀가 갈망해 왔던 아름답고 평화로운 삶은 이제 영영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불현듯 알게 된 것이었다. 캐럴도 마지막을 치닫고 있었다.

Sleep in heavenly peace
Sleep in heavenly peace.

고독한 여인의 성탄이브

성탄절 전 날 밤이 되었다. 베어드가 급한 일로 일본 맥아더 사령부로 출장을 가게 되자 넓은 집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베어드와 함께 아름답고 평화로운 성탄 이브를 보내려고 기대했던 그녀는 맥이 풀리고 울적했다. 때 맞춰 내린 눈으로 서울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그녀는 혼자서라도 밖에 나가고 싶었다. 아니면 '미러라운드'의 이화 동문들에게 연락이라도 해서 성탄을 로맨틱하게 보내고 싶었다. 그때 운명처럼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전화를 건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나 이강국이야."

순간 그녀는 현기증을 느꼈다. 전화 한 통화로 그녀는 이강국을 잊기로 한 결심을 잊어 버렸다.

"성탄 이브가 되니 수임이와 춤추던 추억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
"수임아, 듣고 있니?"
"다시 추자고 하시면 되잖아요."

호텔의 댄스홀은 수많은 연인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강국의 손에 이끌려 김수임은 춤판으로 스며들었다. 이강국의 가슴은 감미로운 캐럴보다 더 감미로웠다. 허리에 와 닿는 이강국의 손길은 그녀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이강국은 그녀를 춤판의 가장자리로 밀어붙였다.

"결혼했다는 말을 최근에 들었어."
"아무 생각 없이 하고 말았어요."

그녀는 '당신이 연락을 했더라면 그런 짓은 안 했을 것'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다. 그녀는 야속하다는 눈길로 이강국의 얼굴을 보았다.

"중요한 일로 평양에 가 있었어."

이강국은 그녀를 출입문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는 김수임을 홍릉에 있는 아지트로 데려갔다. 그들은 삐거덕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 이층 방으로 들어갔다. 온기조차 없는 다다미방에는 이강국의 남루한 옷가지들 몇 개밖에는 없었다. 김수임은 가슴이 아팠다.


태그:#김수임, #이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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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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