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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개혁개방 30주년 기념 전국 촬영대전이 열리고 있는 왕푸징 거리.
 중국 개혁개방 30주년 기념 전국 촬영대전이 열리고 있는 왕푸징 거리.
ⓒ 이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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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중국이 개혁개방 3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거리사진전이 지난 16일부터 26일까지 중국촬영가협회 개최로 베이징 번화가인 왕푸징에서 열렸다. 이번 사진전은 '민생기억 30년', '도시기억 30년', '가정기억 30년'이라는 주제로 총 800여 점의 기념사진들로 구성돼 있었다.

영하 10도에 매섭게 품속을 파고드는 칼바람이 불어온 20일, 과연 이 거리사진전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왕푸징을 찾았다.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진을 꼼꼼하게 구경하며 카메라에 담는 사람, 바쁜 걸음으로 고개를 돌려가며 사진을 보는 사람 등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시된 사진을 보며 새로운 기억에 젖어든 듯했다.

"맞아, 이때는 이랬어"라며 회상하는 중년 남성 옆에서, 10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아빠, 그때 난 태어나지도 않았어요!"라는 부녀간의 대화도 30년의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경제성장을 목표로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이행하기 위해 30년이라는 시간의 터널에서 가속 페달을 밟아온 중국, 그 동력의 중심에는 분명 일등공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제1세대 여직공의 성공적인 케이스인 웡춘시엔의 선전 이야기가 눈에 띈다.

베이징 왕푸징에서 열린 중국 개혁개방 기념 사진전에서, '제1세대 여직공' 웡춘시엔이 개혁개방 시기를 타고 성공한 이야기가 시간순으로 전시되어있다.
 베이징 왕푸징에서 열린 중국 개혁개방 기념 사진전에서, '제1세대 여직공' 웡춘시엔이 개혁개방 시기를 타고 성공한 이야기가 시간순으로 전시되어있다.
ⓒ 이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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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세대 여직공 웡춘시엔의 성공스토리

웡춘시엔(翁純賢)은 1981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선전 경제구에 위치한 홍콩완구공장 광고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보고 지원해서 제1세대 여직공이 됐다.

120명의 직원을 뽑는 데 무려 1000여명의 사람이 몰렸다고 하니 당시의 극심한 구직난을 알 수 있을 듯하다. 입사시험 문제는 모두 홍콩에서 출제되었으며, 그중에는 지금의 IQ테스트 같은 유형의 문제도 있었다.

웡춘시엔이 풀었던 첫 번째 문제는 어떻게 하나의 사탕을 여러 개로 나눌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은 당시의 생산조직에 들어가 일을 하거나, 부모가 알아봐 주는 곳에 들어가 일을 했던 것에 반해 왕춘시엔은 자신의 노력으로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취업하게 되니 친구들은 다들 부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동경했지만, 그녀의 오빠는 "그곳은 자본주의 세계로부터 가까우니 너무 위험하다, 가지 말라"고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그렇지만 쉽게 물러설 그녀가 아니었다. 한번 가보고 안 되면 다시 고향에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1982년 4월 30일 선전에 도착했다. 120명이었던 직원들은 채 석 달도 되지 않아 향수병과 고된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80명으로 줄었지만 웡춘시엔은 끝까지 남아 일했다. 곧 표준어를 잘 구사하여 조장이 되었으며, 1987년에는 지금의 남편과 3년간의 뜨거운 열애 끝에 결혼했다.

이전에는 회사에서 집을 분배하는 방식이었지만, 이들이 결혼한 1987년도에는 아파트 공개입찰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웡춘시엔 부부는 63㎡ 규모의 아파트를 구입하여 세탁기, 컬러TV, 냉장고를 사서 신혼 생활을 즐겼다. 당시 웡춘시엔의 한 달 월급은 인민폐 700위안, 남편 월급까지 합하면 1100위안으로 당시에는 고소득 가정이었기 때문에 주택이나 살림 장만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1990년에는 아들의 출생과 함께 그동안 일해온 완구공장을 떠나 난보 유리공장으로 직장을 옮겼으며, 1994년에는 전문대학에서 학업도 마쳤다. 같은해 남편과 함께 자비를 들여 태국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전에는 주로 회사에서 조직하여 해외여행을 했었지만, 개혁개방 이후 부를 축적해 자비로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여유 있는 생활 수준이 되었다. 또한 1987년에 구입한 63㎡ 규모의 아파트가 1999년에는 90㎡규모로 바뀌었고, 자동차도 2대나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웡춘시엔이 만일 그녀의 오빠처럼 자본주의 세계를 두려워한 채 고향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이런 개혁개방의 달콤함은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덩샤오핑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 이래 마오쩌둥이 계급투쟁과 고립경제를 옹호하다 내리막길을 걸었다면, 마오쩌둥 사후 정권을 거머쥔 덩샤오핑은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의미)'이란 인식의 전환에서 출발,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접목된 실용적 정치노선인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하여 중국의 경제성장을 꿈꾸었다.

당시 덩샤오핑은 '4대 현대화(농업, 공업, 과학기술, 국방)'와 경제 발전을 시대적 과업으로 규정하여 각 단계별로 비전을 제시했다. 1단계는 원바오(溫飽, 의식주 등 기초생활이 해결된 상태) 수준의 생활을 이룩하는 것, 2단계는 공산당 창건 100주년이 되는 2021년까지 샤오캉사회(小康社會, 국민 모두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를 실현하는 것, 3단계로 건국 100년인 2049년까지 선진국에 진입한다는 목표가 그것이다.

또한 농촌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책임실시제'를 확대 실시하여 농민 스스로 원하는 작물을 선택 생산하고 시장에서 처분해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제도를 실시하고, 연안지역을 부강하게 만든 후 내륙지역을 발전시키자는 '선부론(先富論)'을 제창해 선전, 주하이 등 5개 도시에 경제특구를 설치하는 등 대외개방에 박차를 가하였다.

왕푸징 거리에서 '개혁개방 30주년 사진대전'을 관람하고 있는 부자.
 왕푸징 거리에서 '개혁개방 30주년 사진대전'을 관람하고 있는 부자.
ⓒ 이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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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학시험으로 부활한 '까오카오 세대'

마오쩌둥 집권 이후 문화대혁명 동안 중국에서 대학교육은 거의 정지 상태에 가까웠다. 모두들 정치와 사상개조에 힘을 쏟았고, 당 지도부는 혹시나 당시 이념에 반대하는 지식청년들이 생길까 우려해 "농촌에 가서 배우고 오라"며 하향(下鄕, 농촌으로 축출)시켰다.

도시에서 축출된 청년들은 농촌에서 생활했고, 평소 즐겨 읽던 외국소설이나 간행물들은 금서로 지정되어 볼 수 없었다. 오직 노동을 통한 사상개조만이 강요된 시대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개혁개방 초기에 도입된 까오카오(高考, 대학입학시험) 제도 덕분에 청년들은 배움의 공백기를 염려하면서도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당시 청년들은 시험을 통해 대학교육을 받았으며, 지금은 중년의 나이로 성장해 중국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대전에서 만난 짱앤(47·의사)은 까오카오(高考) 1세대이며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된 30년 동안 개혁개방과 함께 생활했으니 '개혁개방 세대'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개혁개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는 단호한 어조로 "지난 30년 동안의 개혁개방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없었다"며 "(개혁개방 이전은) 물질적인 빈곤으로 고통스러운 날도 있었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더욱 충만하던 시기였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우리는 '까오카오' 1세대!"
 "우리는 '까오카오' 1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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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손목시계·자전거·재봉틀' → 2000년대 '자동차·아파트·여행' 

'산따지엔(三大件)'이란 중국인들이 갖고 싶어 하는 세 가지 물건을 뜻하는 용어인데, 이를 통해서 각 시기의 경제성장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다.

계획경제 시기인 1970년대의 산따지엔은 손목시계, 자전거, 재봉틀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화폐 교환 방식이 아니라 가정마다 보급되는 표(票)를 모아서 물건을 사는 방식이어서, 산따지엔은 사람들간의 삶의 차이를 규정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1980년대 들어 비약적으로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산따지엔도 컬러TV, 냉장고, 세탁기 순으로 변했으며, 사람들은 점차 물질적 욕망을 추구했다. 1990년대에는 전화, 에어컨, 컴퓨터로 과학기술이 점차 사람들의 생활에 진입했으며 동시에 산따지엔을 구입하기 위해 물질적인 부담도 가중되는 시기였다. 2000년대에 산따지엔은 자동차, 아파트, 여행 등으로 변했다.

직업 분배 제도에서 양방향 선택으로

빠른 경제성장을 중시한 덩샤오핑 집권 초기까지도 정부 당국에서 직업을 정해주는 '직업 분배' 제도에 따라 대학생들의 직업이 결정됐다. 직업분배제도는 신중국 성립 이후부터 1980년대 초까지 실행되었다.

그렇지만, 전공의 세부사항이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관리자의 실수로 대학생들이 전공에 부합하지 않는 엉뚱한 곳에서 일하는 등 인재 낭비 문제가 생겼다. 과거 부모가 독단적인 태도로 배우자를 정해주는 혼인마냥 기업과 대학이 모든 결정 권한을 갖고 있어, 학생은 방관자적인 태도로 통보된 결과에 따르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1989년 본인 스스로 적극적으로 직업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양방향 선택' 제도가 실시되었다. '양방향 선택'은 본인 스스로 지원하고 싶은 기업에 지원하고 면접 등의 선발과정을 거치면, 기업은 이들 중 일부를 채용하는 자유경쟁 방식이다. 때문에 학생들은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하기 위해 취업3종 세트(영어+인턴+컴퓨터)를 구비해야 한다.

"경제성장도 좋지만, 도덕과 사상은 글쎄"

'빠링호우 세대' 리하이펀은 이 사진이 전시된 사진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빠링호우 세대' 리하이펀은 이 사진이 전시된 사진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 이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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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진(天津)에서 올라온 아이궈펑(52)은 "개혁개방으로 인해 의식주가 크게 변화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기는 했지만, 짧은 기간 동안 온갖 사상의 유입과 인터넷 등 기술발전으로 인해 젊은 세대가 폭력적이고 색(色)을 탐하는 경향이 있어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또 "경제성장도 좋지만, 도덕과 사상교육이 더욱 중요시되어야 한다"며 젊은층의 도덕적 타락을 우려했다.

젊은 세대의 정신적 소양을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라도 하듯이 빠링호우(80后, 1980년대 이후의 출생자) 리하이펀은 전시된 기념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을 가리켰다.

사진은 꽃구경을 나온 할머니가 먼 곳을 볼 때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 할머니는 휴지통 위에 서서 관망하고 자녀들은 할머니가 떨어질까봐 옆에서 부축하고 있는 사진이다. 그녀는 이 사진을 정성껏 카메라에 담아 두고,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된다면 남편에게는 "이렇게 나를 아끼고 사랑해줘"라고 말할 것이며, 자녀에게는 "이렇게 나에게 효도해줘"라고 할 것이라고 했다.

80후세대 "우린 개혁개방의 수혜자"

푸지엔(福建) 출신의 씽인(30대)은 올해 12살이 된 아들의 병원치료를 위해 베이징에 왔다가, 아들에게 견문을 넓혀주기 위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담당의사에게 허락을 받아 특별히 개혁개방 사진대전을 찾았다고 했다.

베이징에서 신문사를 다니고 있는 티엔즈잉(여, 25)은 "1980년대 이후 출생자들은 고생이라고는 별로 한 경험도 없고, 개혁개방이 가져온 풍요로 인해 생활여건이 많이 좋아졌다"라며 개혁개방의 수혜자라는 말에 동의했다.

리하이펀(여, 25)은 "개혁개방으로 인해 물질뿐 아니라 정신도 함께 성숙해졌다"고 생각한다며 "대외개방 후 많은 외국의 문화와 사람들을 접하게 되는데, 한국인에게는 예의를 배우고 서구유럽사람들에게서는 열린 마음가짐을 배우게 됐다"고 했다.

그는 또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노력 여하에 따라 60점에서 90점을 받기는 쉽지만, 90점의 성적을 받은 학생이 이를 뛰어넘어 100점의 성적을 받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비유를 들어 개혁개방에 대해 사람들이 보이는 과도한 감격을 경계했다.

왕푸징의 서점에서는 개혁개방 30주년 관련 기념 도서를 전시하고 있었다.
 왕푸징의 서점에서는 개혁개방 30주년 관련 기념 도서를 전시하고 있었다.
ⓒ 이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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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할수록 커지는 '빈부격차' 등 해소해야  

경제성장과 현대화 지향이 지도자의 과제로 남겨졌고, 인민들은 국가의 정책에 맞춰 삶의 방향을 맞추어갔다. 중국에서 세 가지 하(下)라고 불리우는 '산시아(三下)'가 인민 삶의 변천사를 대변해 주고 있는 듯하다.

마오쩌둥 시대 지식인과 학생층에게 농촌으로 가서 농민에게 배우라며 이들을 지방으로 축출했던 '시아팡(下放)', 덩샤오핑 시대 국가에서 배분해준 직업을 버리고 개인 사업열풍이 불었던 '시아하이(下海)', 장쩌민 시대 정리해고를 일컫는 '시아강(下崗)'이 그것이다.

또한 개혁개방 정책에 맞춰 연안지역부터 공업화의 붐이 일자, 농촌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상경하는 '농민공'과 '다꽁메이(打工妹, 여직공)'가 대량 출현한다. 국가의 발전을 위한 정책이었다 할지라도 일부에서는 중국의 세 가지 하(下)가 인민들을 병들게 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선 선부론(先富論)과 연안지역부터 발전시키자는 덩샤오핑의 주장에 따라 연안지역은 발전했지만 내륙지역은 발전속도가 더뎌 빈부격차가 생겨났고, 마찬가지로 도농간의 빈부격차도 크게 벌어졌다.

이밖에도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는 중국의 공장들은 금융난을 이유로 문을 닫고 있으며,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상경한 농민공은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또 누군가는 고급외제차를 끌고 고급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식당에서 일을 하는 여종업원의 월급은 그들이 먹는 요리 하나 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중국은 30년에 걸친 개혁개방에서 성과도 거뒀지만 빈부격차, 도농간 차이, 호구문제, 민주화에 대한 열망, 멜라민 파동이 여실히 보여주는 안전불감증 등과 같은 문제들도 다시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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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중국 개혁개방, #왕푸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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