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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철이 일찍 들었다는 말은 좋은 말일까. 내가 생각하기로는 별로 좋은 의미 같지는 않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 아이답게 천진하고 앞뒤를 생각지 않고 즉흥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철없는 아이는 자라면서 철이 드는 게 자연스럽다.

 

철이 일찍 들었다는 것은 마냥 아이답게 자랄 수 없는 환경이 일찍 어른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일찍 철들게 하는 것은 아이를 아이다울 수 있는, 유일하게 빛나는 시간을 뺏어버린 일종의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이가 아이답게 자랄 수 있도록 우리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 '완득이'라는 친시골스러운 이름을 가진, 아이답지 않은 아이의 범주에 속하는 전형적인 인물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이면 꼭 내 동생 나이다. 해서 굳이 지나가버린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려보지 않아도 충분히 그 나이 또래 아이의 고민과 번뇌를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완득이는 난쟁이 아버지에 베트남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집을 나가고 아버지가 홀로 키웠다. 정말 평범하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다. 뼛속까지 주류가 아닌 수많은 완득이를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어린 나이에 남편 얼굴도 안 보고 먼 나라까지 시집왔는데, 남편이 장애인이거나 곧 죽을 것 같은 환자인 경우도 있다고. 말만 부인이지 오지 마을이나 농촌, 섬 같은 곳에서 죽도록 일만 하는 경우도 있단다. 그러다 보니 아이 하나 낳고 자신에게 관심이 좀 소원해졌을 때 가슴 아픈 탈출을 하기도 한다고. 남편 입장에서는 부인이 도망간 것이겠지만 부인 입장에서는 국제 사기결혼이라나. (46쪽)

 

우리는 신문에서 종종 이주여성, 이주노동자들을 야만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어쩌면 인간이 인간에게 그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우리가 조심하며 살아도 남에게 의도와는 다르게 상처를 주고 살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닌가.

 

나는 아버지를 숨기고 싶은 게 아니라, 굳이 꺼내 보이고 싶지 않은 거였다. 비장애인 아버지는 미리 말하지 않아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데 장애인 아버지를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상관하기 시작한다. 아버지를 숨긴 자식이라며 듣도 보도 못한 근본까지 들먹인다. 근본은 나 자신이 지키는 것이지 누가 지켜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근본을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좀 있어 보이게 비웃을 수 있으니까.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만 가지고 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똥주. 이것이 바로 내가 똥주를 죽이고 싶었던 진짜 이유다. 나는 아버지에게도 나에게도 딱지가 앉지 않는, 늘 현재형이라 아물 수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196~197쪽)

 

어린 시절 내 심장을 뛰게 한 친구가 있었다. 친구가 되고서 한참이 지난 뒤에야 친구네 집에 갈 수 있었는데, 그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굉장히 기대가 컸다. 마치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처럼. 진작부터 가보고 싶었지만 친구는 쉬이 나를 데려가주지 않았다. 그래서 더 가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친구는 누군가를 집에 데려온 적이 없었다며, 내가 처음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의식이 강한 친구에게 무슨 비밀이 있었던 걸까.

 

비밀은 아버지였다. 친구네 아버지는 키가 매우 작았다. 내가 인사를 하자 이부자리에서 일어나시는데 등의 모양이 다른 어른들과 다른 모습이었다. 순간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코끝이 시큰하다. 친구가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열 셋의 나이에 나는 친구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집에 친구를 데려가기를 왜 꺼려했는지 의문이 풀리는 동시에, 우리가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는 생각에 기뻤다. 비밀 아닌 비밀을 공유하게 되는 순간 친구와는 더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친구는 키가 작은 아버지 때문이었을까. 결혼식장에서 처음 본 친구 남편의 키는 상상을 초월했다. 190이라고 들었다. 정말 컸다. 지금까지도 꿈을 향해 매진할 수 있는 건, 마음 속에 강단을 품을 수 있었던 건 남다른 환경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쾌속질주하는 친구의 성장을 나는 지금도 지켜보고 있다.

 

일종의 아픔을 어떻게 치유하느냐에 따라 성장에 큰 동력이 될 수도 있는 거구나 생각하게 된다. 성장의 밑천이 아픔이라는 건 서글프다. 아프지 않고 성장도 안하는 게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이미 주어진, 우리가 어쩔 수 없는 환경에서는 앞만 바라보고 살아야 할 수밖에 없다.

 

이주노동자센터에서 일하는 선배는 하루에도 몇 번씩 '도와주세요…'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고 한다. '월급을 못 받아 대신 받으러 가야하고, 아파서 병원에 갈 때도 같이 가야하고, 한국말을 몰라 이런 저런 볼 일을 볼 때도 같이 가야만 하고…. 한국말을 모른다는 이유로 바보취급을 받는 이 땅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이주노동자를 보노라면 화가 치민다'고도 했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우리가 되면 안 될까. 한 사회의 인권 수준을 보려면 감옥에 있는 재소자와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보면 된다고 했다. 그들을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은 특별한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다.

 

김려령의 <완득이>는 이미 다문화사회에 접어든 우리 사회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책을 읽고 나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다른 빛깔의 성장소설이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따뜻한 심성을 품을 수 있게 하고, 어른들에게도 인권의 가치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이라 믿는다.


완득이

김려령 지음, 창비(2008)


태그:#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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