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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째 딸 수재너 홀에게 내 모든 동산과 부동산을 양도한다. 내 둘째 딸 주디스 홀에게 내가 쓰던 은잔을 남긴다. 내 아내에게는 두 번째로 좋은 침대를 남긴다."

 

셰익스피어가 남긴 유언의 일부다. 이 유언장이 공개되는 순간, 가족들 간에는 희비가 엇갈렸을 것이다.

 

돈방석에 올라앉은 수재너는 귀를 의심했을 테고, 셰익스피어의 아내와 주디스는 뒤통수를 맞은 심정이 되서 말문이 막힐만 하다.

 

이런 감정의 뒤에는 유언의 정체에 대한 커다란 호기심이 자리잡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살아있었다면 가족들은 그에게 달려들어서 엄청난 공세를 한바탕 퍼부었을 것이다. 

 

아무리 자기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분배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형평에 어긋나는 방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원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둘째 딸에게는 은잔 하나, 아내에게는 두 번째로 좋은 침대가 전부라니. 세계사를 통틀어서 이렇게 짓궂은 유언장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유명한 극작가였던 만큼 유언 공개 장소를 연극의 한 장면처럼 연출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왜 맏딸에게 모든 것을 남겼을까

 

스페인 작가 세사르 비달의 <폭풍의 밤>은 바로 이 유언에 담겨있는 비밀을 파헤쳐가는 팩션(Fact+Fiction)이다. 때는 1616년 4월, 셰익스피어의 유언장이 공개된다는 변호사의 통보에 따라 가족과 지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다. 그곳에서 고인의 유언이 낭독되자 사람들은 모두 충격에 잠긴다.

 

최대 수혜자인 맏딸 수재너도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그녀는 평생동안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지 못했다. 셰익스피어는 런던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가족들이 살던 스트래트퍼드에는 방문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인 햄닛이 병으로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가족을 찾지 않았다.

 

수재너는 지금까지 아버지와 백 마디 남짓한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녀가 모든 것을 차지하다니, 셰익스피어 본인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기이한 일은 계속 이어진다. 유언장이 공개된 다음날, 수재너에게 한명의 남자가 찾아온다. 푸른 옷에 노란 모자, 챙에 꽂힌 붉은 깃털. 마치 연극판의 한 가운데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외모의 인물이다. 그는 수재너에게 유언의 비밀을 알려주겠다며 오늘 밤 혼자서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한다.

 

이 제안을 거부할 수도 있지만 수재너의 호기심은 그녀를 그냥 두지 않는다. 결국 먹장구름이 몰려오는 폭풍의 밤, 수재너는 조용히 집을 빠져나와서 약속 장소로 향한다. 낯선 남자가 털어놓는 비밀은 수재너가 가지고 있던 의문을 해소해줄까. 아니면 그녀에게 더 커다란 충격을 안겨줄까.

 

작가가 들려주는 셰익스피어의 삶

 

세사르 비달은 자신의 손에 들어온 셰익스피어의 유언장 사본을 보고 이 작품을 구상했다. 상식적이지 못한 유언장의 내용을 셰익스피어의 삶과 연관시키기 위해서 무척 많은 자료조사와 상상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폭풍의 밤>에서는 푸른 옷의 사나이가 셰익스피어 삶의 많은 부분을 그의 작품과 함께 묘사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셰익스피어는 줄리엣을 만난 로미오처럼 열정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때로는 오셀로처럼 질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인 만큼 셰익스피어도 이런 모든 감정들을 치르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그가 겪었던 사건과 경험들을 정제된 무대언어로 옮긴 결과물이 아닐까.

 

영문학계 최대의 음모론은 셰익스피어의 존재부정설이다. 글자 그대로 셰익스피어는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관련서적들이 국내에 번역 소개될 정도로 역사가 오래되고 구체적인 음모론이다.

 

그런 음모론이 의심될 경우에 <폭풍의 밤>을 펼쳐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팩션치고는 분량이 많지 않은 편이지만 그만큼 셰익스피어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품 속에서 셰익스피어는 기뻐하고 슬퍼하며 때로는 고뇌에 빠진다. 셰익스피어의 존재부정설이 잊혀질만큼 인간적인 모습이다.

덧붙이는 글 | <폭풍의 밤> 세사르 비달 지음 / 정창 옮김. 다산책방 펴냄.


폭풍의 밤

세사르 비달 지음, 정창 옮김, 다산책방(2008)


태그:#폭풍의 밤,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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