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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수목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조선 후기 천재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의 이야기를 다룬 사극이다.
 SBS수목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조선 후기 천재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의 이야기를 다룬 사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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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신윤복'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학창시절 풀었던 미술시험 문제였다. 두 화가의 그림을 놓고선 객관식으로 '다음 중 두 그림에 대한 설명으로 알맞은 것은?', 이런 문제 말이다. 미술시험뿐만이 아니었다. 국어시험에도, 국사시험에도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지겹도록 두 화가의 그림을 보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건 '김홍도-서민적, 신윤복-귀족적'과 같은 '단편적 지식'들 뿐이었다. 이러한 '얕은 지식' 그리고 어떤 그림이 김홍도의 그림이고, 신윤복의 그림인지 구별할 수 있는 능력만 있어도 시험문제를 푸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으니까.

다행히 두 화가의 그림을 구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김홍도의 그림은 소박하면서도 풍자와 해학이 넘치고, 신윤복의 그림은 세련되면서도 교태롭달까. 한 시대를 함께 살았던 두 천재화가는 한 눈에 보기에도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더 이상 수능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는 대학생이 되면서 꽤 오랫동안 그들을 잊고 살았다. 김홍도도 신윤복도 내게는 교과서 속에서나 살고 있는 인물들일 뿐이었다. 그들의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취업이라는 또 다른 수능을 준비하는 요즘, 나는 김홍도와 신윤복에게 푹 빠져있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 때문이다.

'동성애 코드'?... 신윤복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예인(藝人)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 역을 맡은 문근영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 역을 맡은 문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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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 드라마를 보게 된 건 순전히 신윤복 역을 맡은 문근영 때문이었다. 이 드라마에서 신윤복은 여자로 태어났지만 화원이 되기 위해 남자로서의 삶을 사는 인물로 나오는데, 과연 '국민 여동생' 문근영이 '남장 여자' 역할을 어떻게 소화해낼지 궁금했다.

사실 여기서 '남장 여자'라는 표현이 적절할지 잘 모르겠다. 커피프린스에 취직하기 위해 자신을 남자라고 속인 <커피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과는 달리, 신윤복은 스스로 남자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으며 기생 정향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욱더 복잡한 건 (윤복을 남자로 알고 있는) 스승 김홍도가 제자인 신윤복에게 애틋한 감정을 품는다는 것이다. 윤복 역시 때때로 김홍도와 묘한 눈길을 주고 받기도 한다. 따라서 이 드라마의 '동성애 코드'를 두고 이런 저런 말들이 많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윤복과 기생 정향의 사랑도, 사회적으로 남성인 윤복과 스승 김홍도의 사랑도 이 나라의 수많은 호모포비아들에게는 더없이 불편한 일이니 말이다. 더구나 이 드라마의 배경은 조선시대 아닌가.

이에 대해 신윤복 역을 맡은 문근영은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남자, 여자, 남장여자 뭐든 간에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는 건 성 정체성 이전의 문제 아닌가요?"라며 "남장여자가 아닌 그림에 미친 신윤복이고 싶다"고 말했다.

나 역시 문근영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그저 그림에 미친 '예인(藝人)'일 뿐이다. 기생 정향과 스승 김홍도가 윤복에게 끌리는 건 그가 남자여서도 여자여서도 아니다. 남자, 여자 이전의 '인간 신윤복', '예인 신윤복'을 보았기 때문이다.

두 천재화가의 그림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즐거움

<바람의 화원>에서는 신윤복(문근영 분)과 김홍도(박신양 분)가 저잣거리에서 본 군상들을 함께 그림으로 옮기기도 한다.
 <바람의 화원>에서는 신윤복(문근영 분)과 김홍도(박신양 분)가 저잣거리에서 본 군상들을 함께 그림으로 옮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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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과 정향, 김홍도의 사랑뿐만이 아니라 이 드라마의 중심에는 그림 즉, 예술이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천재화가였던 김홍도와 신윤복은 <바람의 화원>속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나는데,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의 천재화가의 그림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건 <바람의 화원>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매력이다. 무엇보다도 눈이 즐겁기 때문이다.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은 그림의 소재가 되고, 그들의 붓질이 닿는 곳에선 한 폭의 예술이 탄생한다.

드라마 속에서 김홍도·신윤복은 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화폭에 담는다. 그들이 소재를 찾는 곳도 저잣거리, 주막과 같은 삶의 활력이 넘치는 곳이다. 이처럼 생동감 넘치는 현실은 화폭 속으로 들어가 '박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생동감을 얻게 된다.

'그림이란 무엇이냐'라는 김홍도의 질문에 도화서 생도 신윤복은 이렇게 답한다.

"그린다는 것은 그리움을 말하는 것이 아닐지요.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자꾸 떠올라 그를 그리게 되니 그리움은 그림이 되고, 또한 그 사람 그림을 보고 있으면 잊고 있다가도 그 사람이 다시 그리워지니 이는 그림이 그리움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은 화폭 속으로 들어가 예술이 되고, 화폭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명력을 얻게 된다.

'이 그림은 어떻게 그렸을까'... 상상하는 즐거움  

신윤복, 단오풍정(端午風情)
 신윤복, 단오풍정(端午風情)
ⓒ 간송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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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 등장하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은 우리가 교과서 등을 통해 접했던 친숙한 것들이 많은데, 이러한 그림들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즐거움이다(물론 대부분이 작가의 상상력에 기초한 것이지만 말이다).

먼저 신윤복의 단오풍정(端午風情)을 보자. 학창시절 '이 그림, 참 야하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궁금했던 건 '이 풍경을 어떻게 보고 그렸을까'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공간은 여자들만 있을 수 있는 은밀한 공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신윤복도 저 뒤에있는 사내들처럼 몰래 숨어서 여인들을 훔쳐 본 것일까.

도화서 화원 시험을 보던 날, 신윤복은 여인들이 단오 놀이하는 모습을 화폭에 담기 위해 계곡으로 가려한다. 하지만 그곳은 '금남'의 공간. 여장을 한 윤복이 정향과 함께 그네를 타면서 바라본 계곡의 풍경과 여인네들의 모습은 그대로 화폭 속에 담긴다.

김홍도, 빨래터
 김홍도, 빨래터
ⓒ 국립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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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와 신윤복이 똑같은 풍경을 보고도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려내는 것 역시 흥미롭다. 똑같은 빨래터의 모습을 보고도 김홍도의 '빨래터'에는 빨래하는 여인네들을 몰래 숨어 지켜보고 있는 양반을, 신윤복의 '계변가화(溪邊佳話)에는 빨래하는 여인네들 옆을 지나가며 넌지시 눈길을 보내는 양반을 그려넣어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같은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처럼 지금까지도 '명화'로 불리우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 한 점, 한 점이 탄생하는 과정은 신윤복과 정향, 김홍도의 '러브스토리'와 함께 이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축이다.

학창시절, 시험문제를 풀기 위해 김홍도·신윤복 작품의 특징을 달달 외웠던 나는 요즘 드라마 <바람의 화원>을 보면서 조선시대 두 천재화가의 작품세계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든다. 그들의 그림과 삶에 얽힌 이야기가 너무도 궁금해진 것은 물론, 앞으로 또 어떠한 그림을 보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물론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이 문헌기록에 바탕을 둔 '사실'은 아니다. 신윤복이 여자였다는 것도, 김홍도와 사제지간이었다는 것도 작가의 상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그림에 미쳤던 두 천재화가의 예술에 대한 열정만큼은 '팩션(팩트+픽션)' 속에서도 오롯이 살아있다.

무엇보다도 멀고도 어렵게만 느껴졌던 '그림'의 세계를 대중이 더 쉽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게되었다는 점에서 <바람의 화원>의 시도는 분명 의미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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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바람의화원, #신윤복, #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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