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1일, 낮 12시 점심시간이었습니다. 배가 고파 사내 식당에 밥 먹으러 갔습니다. 넓은 식당에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는 TV에서 회사 사내용으로 제작된 방송이 흘러 나오고 있었습니다. 소리를 크게 틀어놔서 귀청이 다 얼얼할 지경이었습니다.

"불타는 아름다운 단풍의 가을 산 구경을 떠나 보세요."

아리따운 젊은 여성이 나와서 생기발랄하게 이야기를 해댑니다. 그리고 화면 가득히 예쁜 단풍이 너울거리는 산과 계곡을 비추어 주고 억새풀과 갈대 숲을 멋지게 찍어 내보냅니다. 가고 싶은 마음 굴뚝 같습니다. 멋진 그 풍경 속으로요.

"멋진 가을 산 타고 나면 출출해지지요."

그래서 준비 했답니다. 음식 맛 나기로 소문난 집을 이곳 저곳을 소개 합니다.

"와~ 너무 맛있어요."
"두 말이 필요 없어요. 끝내줘요."

맛나게 먹으며 말하는 손님들의 모습에 식당에서 밥먹고 있는데도 군침이 돕니다. 먹고 싶습니다. 식당에서 먹는 짬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방영되는 그 그림 속 음식을 먹어 볼 수 없으니 그야말로 '그림의 떡'입니다.

방송 속 그 아름다운 경치는 어딘가 있겠지만 내겐 한가로이 나들이나 갈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방속 속 그 맛있는 음식들은 그 곳에 가면 얼마든지 사먹을 수 있겠지만 내겐 거기 가서 그런 좋은 음식 사먹을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림의 떡이라 할 밖에요.

원청 노동자는 휴가 내고라도 갈 수 있습니다. 특근 한 개 하지 않고서라도 가면 됩니다. 그러나 나는 하청 노동자라 그들과 처지가 다릅니다. 그들은 생활의 여유가 있어 대부분 승용차를 보유하고 살지만 나는 한 달 생활비 들이대기도 버겁습니다. 그들은 년월차가 많아 쉬면 쉴 수 있지만 나는 하청이라 쉬고 싶어도 쉬기 어렵습니다.

나도 그런 멋진 가을 풍경을 만끽하며 가족들과 가족 나들이 한 번 가보는 게 소원입니다. 하지만 올해도 못갈 거 같습니다. 지난 여름 원청노조의 파업 여파로 덜 생산한 물량을 채우기 위해 올 연말까지 작업 시간이 빽빽히 짜여져 있답니다. 토요일, 일요일은 물론이고 법정 공휴일까지 특근이 빈틈없이 생산계획으로 잡혀 있답니다. 그래서 나는 못 갑니다. 가족들에게 송구스럽지만 못갑니다.

오늘 점심시간 사내 방송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야, 염장 지르는 거야?'

아, 멋진 가을 풍경 보러가고 싶어도 못가는 신세. 비정규직 노동자 신세. 멋진 풍경, 맛 난 먹거리, 가을 나들이. 그런 방송을 기획하고 제작한 사내 방송 관계자들은 알고 있을까요?
돈 없고 시간없어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내 비정규직 노동자도 '그림의 떡'일 뿐인 그 사내 방송을 본다는 사실을. 좀 가려가면서 하심이 어떨지.


태그:#비정규직, #비정규직 철폐, #인간차별 철폐, #노동해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간해방 사회는 불가능한가? 노동해방 사회는 불가능한가? 청소노동자도 노동귀족으로 사는 사회는 불가능한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