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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편수회의 역사 왜곡

김영세는 그토록 의미 있게 역사를 기술했던 전통적인 방법론을 저버리고 있는 <조선사편수회>에 심한 유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병도, 신석호 등이 참여하고 있는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실증주의를 내세워 한국의 역사를 편년체로 나열함으로써 역사의 주체를 없애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 나라를 망하게 하려면 역사를 망각하게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들은 한국인에게 역사의 주체를 망각하게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군 조선의 역사를 신화로 만들었고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안으로 바꿈으로써 조선 상고시대의 역사를 축소, 조작했다. 또한 그들은 일본이 신라와 백제를 도와 고구려와 전쟁을 벌여 고구려를 한강 이북으로 몰아냈으며 상당 기간 신라의 일부는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조작했다. 이른바 '남한경영설' 또는 '임나일본부설'이 그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만주에 있는 광개토왕 비문의 글씨를 쪼아 일본에 유리하도록 조작한 일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토론 정치의 단면인 당쟁을 '국론 파탄의 당파 싸움'으로 몰아붙임으로써 파당심이 조선인의 본성이라고 기록했다. 또한 그들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문제 삼았다.

그들의 의하면 조선은 반도니까 대륙과 섬나라의 틈바구니에서 고난의 역사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세뇌 당한 조선인들은 조선이 반도니까 오히려 대륙과 섬나라의 문화를 포섭할 수도 있다는 지당한 사실을 생각할 수 없었다.

사실 조선사편수회가 꾸민 식민사관의 악영향은 민족개조론자들의 것 이상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조선인을 폄하했다. 여성들이 가장 선망하는 남자는 서구인이 되었다. 젊은 여성들은 조선의 여인이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지옥의 생활이나 다름없이 살았다고 믿게 되어 명절이 닥치면 몸부터 아파진다는 이상한 증후군이 나타난 것도 이 시대였다.

민족계몽주의자를 자처하는 인사들일수록 애창곡으로 <메기의 추억>이나 <베사메무초> 등을 불렀고, 혹시 외국의 대학에 가서 몇 달이라도 기숙사를 빌려 쓰다 오게 되면 외국 대학 교환교수라는 해괴한 이력을 내세우게 된 것도 이 시대에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콤플렉스에 빠지다 보니 누가 자전거만 잘 타도 그것이 국가적인 일이었고, 비행기만 조종해도 동양 제패라고 과장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마라톤을 잘하면 아예 구국의 영웅이 되었다. 모든 것이 국위 선양으로 통하는 국가주의 풍조는 물론 일본을 흉내 낸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그 후로도 오래오래 지속되었다.

모든 사료를 독점한 채 식민사관 만들기에 청춘을 걸었던 소장 조선인들은 대부분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출신이었는데 그들은 해방 후 서울대학교 사학과와 국사편찬위원회를 대부분 장악했다. 조선사편수회 수사관(修史官) 이병도는 서울대 대학원장과 학술원 종신회원을 역임하더니 끝내는 문교부장관이 되었다. 그는 충무공훈장과 문화훈장 대한민국장과 무궁화 훈장을 받았다. 또 다른 수사관 신석호는 서울대학교 교수와 국사편찬위원을 역임했다.

상해를 떠난 정화의 편지 1년 만에 받아보다

정화는 윤봉길의 거사 다음 날 황망히 상해를 떠나야 했다. 그녀는 기차를 타고 가 가흥이라는 곳에 여장을 풀었다. 그녀는 국내로 편지 왕래가 가능한지를 알아보았다. 다행히도 한인들 대부분이 자유롭게 국내와 편지 교환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신의주로 가는 인편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김영세에게 편지를 쓸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다. 하지만 그녀가 김영세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그로부터 무려 1년이나 지난 후였다. 그만큼 삶이 어렵고 각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운 선생님께,
선생님 죄송합니다. 지금 드리는 소식은 1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상해를 떠난 우리는 절강성 가흥현으로 일단 옮겨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10년 간 상해에서 버텼던 임시정부가 간판을 들고 중국 대륙을 떠돌아다니게 된 것입니다. 이동녕, 이시영 선생 두 분은 윤 의사의 거사 그 날로 먼저 상해를 뜨셨습니다. 저는 꼭 필요한 물건만 챙기고 나머지 짐은 친구 집에 맡겼습니다. 한시라도 상해를 떠야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일파 엄항섭은 프랑스 조계 당국의 공무국 직원으로서 고액 소득자인데 그동안 애국단과 임시정부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백범의 유력한 후원자였습니다. 그는 좋은 직장을 버리고 임시정부를 따라 나섰습니다. 이것은 그의 직장 생활이 무엇을 위해서였는지 확실히 드러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애국심이 참으로 순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 분 엄항섭의 가족과 함께 저는 가흥으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우리를 안내한 사람은 석린 민필호였습니다. 그는 휘문의숙 재학 중이던 10대 초반의 나이에 상해로 와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입니다. 그는 임시정부의 기초를 닦은 예관 신규식의 사위이기도 합니다. 민필호는 자신의 가족을 항주로 피신시킨 후, 백범의 지시로 우리를 돌보러 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중국 우편국의 실력 있는 기술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후 민필호는 중일전쟁 때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중국 당국의 훈장을 받고 대령 급에 해당하는 직위에 오르게 된다.)

우리는 가흥 매만가에 있는 허름한 2층 목조건물에 임시정부의 간판을 달았습니다. 이렇게라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손문의 친구인 저보성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이동녕, 이시영 선생은 이미 와 계셨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 지 두 주일 쯤 되어서 제 남편 성엄이 백범을 모시고 가흥에 왔습니다. 백범은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발견 즉시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의 소재가 파악되면 일본군은 비행기로 공습까지도 불사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놈들은 얼마 전부터 독립군 토벌에 비행기까지 동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선혁명군의 양세봉 장군이 지휘한 전투에서 그들은 비행기를 출격시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백범은 청사 건물에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저보성의 수양아들인 진동손의 집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그곳도 안전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백범에 관한 소식을 따로 전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백범의 부인 최준례 여사의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최 여사는 3층 작은 단칸방에서 어머니, 아들 등 다섯 식구와 함께 살았습니다. 방 두 개가 더 있지만 생활비 조달을 위해 세를 내 주었습니다.

최 여사는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여사는 둘째 아들 신을 낳고는 백일쯤 되어 크게 실족해 거동조차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폐결핵까지 앓았습니다. 저는 매일 여사에게 가서 간난아이와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그 단칸방에서 백범의 가족과 함께 살다시피 하게 되었습니다. 돈이 없어 환자를 입원시키지도 못해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저는 헌옷을 구해다가 아기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그러나 최 여사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무료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혹독하게 추운 날이었습니다. 저는 병원에 문병을 갔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병원 측에서는 우리를 병실에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환자가 운명 직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매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큰 소리로 따졌습니다.

"아니, 환자가 운명 직전이라면 빨리 가족에게 연락해야 할 것 아닙니까?"

저는 병실 문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최 여사는 이미 하얀 얼굴로 탈진한 상태였습니다. 그녀는 기운은 없었지만 정신은 살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내 손을 꼬옥 쥐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너무 위험해서 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최 여사는 그렇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체온도 느껴 보지 못한 채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백범에게는 가족의 불행이 늘 따라다녔습니다.

상해에서는 프랑스 조계가 있어서 일경이 공개적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중국 정부도 적극적으로 우리를 보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동정하며 은밀히 도움을 줍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 우리는 안전을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남편은 상해에 있을 때는 간도 독립군에 연락도 하고 탁상으로나마 거사 계획을 세우고는 했었는데, 이곳에 와서는 임시정부의 살림을 꾸려가는 일만 하게 되어 속이 편치 않은 듯합니다. 덩달아 저도 마음이 편할 리 없습니다. 결국 남편은 중국인으로 위장하여 중국 전원공사에 취직했습니다. 그는 진해라는 중국 이름을 썼으며 호는 서울의 청계천이 생각났는지 청계라고 붙였습니다.

저는 남편을 따라 임지인 강서성 풍성현으로 옮겨갔습니다. 풍성현은 이름 그대로 식품이 풍성하고 물가가 쌌습니다. 남편은 월급 20원을 받았는데 저에게는 호강을 누릴 수 있는 거금으로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얼마 후 다시 무령으로 갔습니다. 남편의 직장이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너무 늦게야 소식을 전했습니다. 최근 우리는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남편은 형편이 조금만 풀리게 되면 다시 임시정부에 복귀하겠다고 합니다. 저도 어서 그곳으로 가 일하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자리매김하려는 의도로 쓰는 소설입니다.



태그:#백범, #최준례,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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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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