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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주>

'정치는 타이밍'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훌륭한 정치행위도 언제 어떤 상황에서 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천지차이다. 정치인의 말은 더욱 그렇다. 천냥빚을 갚을 수 있는 보배가 되기도 하고, 한낱 세치 혀의 놀림이 될 수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번번히 타이밍을 놓치고 있다. 아무리 '여의도정치 탈피'를 선언했다지만, 너무나 비정치적이다. '고의적'이라는 의혹이 제기될 법 하다. 대통령도 정치인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정치인이 정치를 못하면 민심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다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다.

 

이 대통령은 9일 민심과의 소통에 나선다. 이날 오전 국무회의에서 최근 종교편향 사태와 관련 불교계에 유감을 표명했다. 이날 밤 '대통령과의 대화'에서는 최근 고물가·고환율로 촉발된 경제위기설에 대해 설명한다고 한다. 당초 '국민과의 대화'가 추진됐지만 민심을 듣겠다는 취지에서 '대통령과의 대화'로 명칭까지 바꿨다.

 

그러나 이미 지나 6월 20일 국토해양부 '알고가' 교통정보에 교회·성당만 표시하고 사찰을 전부 누락시키면서부터 불교계는 이 정부를 불신했다. 지난 7월 29일 경찰이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 차량을 검문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됐다. 그리고 한 달이 더 지난 뒤에야, 이 대통령이 유감 표명에 나선 셈이다.

 

경제위기설도 마찬가지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경제성장론을 부르짖으며 고환율 정책을 내걸었을 때 이미 경제 전문가들은 황색신호를 켰다. 경제위기설이 곪을 대로 곪은 뒤에야 "근거없는 설"이라는 뒷북을 치고 있다. 그래서 9일 이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는 뒤늦은 감이 많다.

 

인사 파동·촛불정국 때도 '실기'와 '조급증' 반복

 

이명박 대통령의 실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정권이 출범하면서 이미 '고소영 청와대'로 대표되는 이 대통령의 인사 시스템은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박미석 전 사회문화수석이다. 논문 표절 의혹으로 만신창이가 됐지만, 이 대통령은 박 전 수석을 끌고 갔다. 게다가 '강부자 내각'까지 단행하면서 '오기 인사'의 절정을 이뤘다.

 

그러나 박 전 수석은 부동산 투기 의혹까지 겹치면서 결국 3개월 만에 낙마하고 말았다. 경질 시기를 앞당겼더라면 '오기 인사'라는 말은 듣지 않았을지 모른다. 또 있다. 쇠고기 정국의 책임을 지고 내각이 총사퇴 의사를 밝혔지만, 이 대통령은 "국회 원구성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후임 인선을 한 달 가까이 미루며 국정공백을 방치했다. 여당으로부터 인적쇄신을 요구받은 지 2개월만이다.

 

시기가 늦어진 탓도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도 어떤 쇄신이나 감동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대통령은 취임 100일만에 한 자리수 지지율을 기록했다. 국정의 극심한 혼란상을 감안할 때 총리 교체를 포함한 대폭 개각이 예상됐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7·7 개각을 통해 한승수 총리와 환율관리 실패 등의 책임이 있는 강만수 재정기획부 장관 등 대부분의 각료를 유임시켰다. 당시 보수언론들조차 "생색만 낸 개각" "찔끔 개각" "감질난 쇄신"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강만수 장관의 경우 경제위기설이 고조되고 있는 현재까지 전방위 사퇴 요구가 끊이지 않지만, 이 대통령은 '업무의 연속성'을 내세워 버티고 있다. 당시 강 장관을 교체했다면 9월위기설의 양상은 달랐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강 장관이 금융시장으로부터의 신뢰를 상실한 상황에서 정부의 어떤 조치도 시장에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또 5월 2일부터 시작된 촛불집회가 장기화 조짐을 보인 뒤에야 뒤늦게 첫번째 대국민담화를 내면서 '광우병 괴담'을 거론하는가 하면, 추가협상이 채 타결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너무 성급하게 두번째 대국민담화에 나서 비난을 자초했다. 실기에다가 조급함까지 겹친 것이다.

 

추가협상 타결 직후에는 속전속결로 장관고시를 강행하는 바람에 등원을 준비하던 야당의 명분을 빼앗았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장관 고시를 1주일만 늦췄어도 야당이 국회에 등원했을 것이고, 지금처럼 국회가 민생 현안을 방치하고 있다는 비판은 듣지 않았을 것"이라는 한탄이 터져 나왔다.

 

이 대통령은 "뼈아픈 반성"을 얘기한 지 5일만에 "법질서 확립"을 치켜들며 촛불집회에 대한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혀 또 다시 조급증과 무감각을 드러냈다. 이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등 종교계의 '개입'을 불러 스스로 더 깊은 수렁에 빠졌다. 

 

또한 이 대통령은 쇠고기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단행한 7·7 개각에서 촛불집회 과잉·폭력 진압으로 사퇴 압박을 받는 어청수 경찰청장을 유임시켜 화근을 남겼다. 결국 어청수 청장의 해임 문제는 종교편향 사태의 핵심 쟁점이 되고 있다.

 

 

3개월 미뤄진 '국민과의 대화'... 여전히 감동이 없다

 

이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는 당초 지난 6월 초에 예정했던 것을 무려 3개월이나 미룬 것이다. 당시 청와대 확대비서관 회의에서 연기 결정을 한 뒤 이동관 대변인은 "원래 '국민과의 대화'를 취임 100일이 되는 3일에 하려다가 국회 개원연설이 5일이어서 일정을 뒤로 미뤘다"며 "그런데 국회 개원 협상도 불투명하고, 언제 열릴지 몰라서 다시 연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국민 대표기관인 국회에서 국정 운영에 대한 청사진도 밝히고 이해를 구하는 절차를 거친 뒤에 '국민과의 대화'를 하려는 게 당초의 계획이었다"는 것이 이 대변인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청와대가 '국민과의 대화'를 하겠다고 비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5월 20일경이었다.

 

야권이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추진하는 등 '광우병 쇠고기' 파동으로 정치권에 갈등이 고조되고 있던 터라, 이미 6월 초 국회 개원 일정은 불투명했다. 특히 청와대는 '국민과의 대화' 앞에 '취임 100일 기념'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국회 일정보다 취임 100일에 초점을 맞춘 행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와대가 국회 개원 일정을 문제삼아 '국민과의 대화' 일정을 연기한 것은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게다가 청와대는 '국민과의 대화'를 언제까지 연기할지에 대해서도 명확한 일정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청와대가 당시 이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를 연기한 것은 마땅한 정국 수습책을 찾지 못한 가운데, 이 대통령이 등돌린 국민들과 직접 공개 토론에 나섰다가 낭패를 볼 것이 우려됐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일단 들끓는 민심이 잦아들 때를 기다려보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촛불정국이 수그러들었고, 이명박 정부는 올림픽 특수에 힘입어 지지율이 30%대까지 올랐다. 그러다가 종교 편향 사태가 불거지고, 다시 지지율이 20%대로 돌아섰다. 청와대가 "추석을 앞두고"라는 구차한 해명을 내놓고 있지만, 이번 '국민과의 대화' 시점 역시 한참 실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명박 "불교계 마음상한 것 심히 유감"... 불교계 "부족하다"

 

내용에 있어서도 민심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친다는 지적이다.

 

이 대통령은 9일 오전 국무회의에서 "본의는 아니겠지만 일부 공직자들이 종교 편향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런 언행이 있어서 불교계가 마음이 상하게 된 것을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또 "오늘 공무원 복무규정 개정을 계기로 공무원들이 종교중립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갖게 하고 앞으로는 종교편향 오해가 없도록 인식을 시켜주기 바란다"며 "특히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그러한 것을 감시·감독하고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국무위원들도 관심을 갖고 철저히 교육시켜 주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이 대통령의 발언에는 불교계의 핵심 요구사항인 '직접 사과'도 없었고, 어청수 경찰청장 해임 조치도 없었다. 이 대통령은 "이번 기회로 종교계나 모든 사회단체가 관용하고 화합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불교계는 이 대통령의 유감 표명이 부족하다며 더욱 반발하는 분위기다.

 

'헌법파괴 종교편향 범불교대책위원회'는 9~11일 전국 1만여 사찰에서 '정부 규탄 철야법회'를 봉행하고, 10일 대구 동화사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는 지역대회 준비모임의 결정에 따라 추석 이후 대구·경북권을 시작으로 지역별 범불교도 대회를 연다는 당초 계획에 변함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앞서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지난 8일 기자들과 만나 "사과냐 유감 표명이냐 하는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면서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또 "이건 사과고 저건 유감이고, 그렇게 구분되는 문제가 아니다"며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 아니냐"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어청수 청장 해임 여부와 관련 "그 문제는 불교계의 핵심적인 요구사항에서도 상당히 물러난 게 아니냐"는 입장을 밝혀, '앞으로도 어청수 해임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는 게 아니냐"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은 청와대가 여전히 '이 정도면 되지 않느냐'는 안이한 인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청와대는 쇠고기 정국 당시 이 대통령의 두 번째 대국민담화를 분명히 '사과' '사죄'라고 규정한 바 있다.

 

실기를 했으면 내용이라도 충실해야 민심이 기다린다. 민심이 인내심을 접고 등을 돌린 순간, 권력은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다.


태그:#이명박 대통령, #불교편향 논란, #어청수, #국민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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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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