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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에 왔는데 해수욕장 바닷물 속에 한 번 들어가 봐야 하는 것 아녀?"

 

묵호 어달리 까막바위 마을을 출발하면서 누군가 오늘은 해수욕장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슬쩍 떠보는 말이었다. 모두들 나이 들어가면서 해수욕장과는 가까이 할 기회가 별로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해수욕장은 무슨? 수영도 잘 못 하는데. 계곡물에 발이나 담그고 쉬는 게 좋지."

"수영은 잘 못해도 개헤엄은 조금 할 줄 아는데. 그래도 한번 들어가 보자고 허허허."

"난 수영은 못해도 어렸을 때부터 물싸움엔 자신 있었는데 누구든지 한 번 덤벼보세요."

 

다른 일행은 바닷물엔 영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일행의 부인은 해수욕장 이야기가 나오자 벌써 물싸움 한 번 해보자고 나서는 것이었다. 결국 여름 휴가철에 동해안에 왔는데 해수욕장 한 곳 거쳐 가지 않으면 되겠느냐는 중론에 따라 붐비지 않는 적당한 해수욕장에 들러 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남편들 솜씨 좋은 임시주방장이 되다

 

까막바위를 출발한 일행들은 묵호를 선뜻 지나쳐 남쪽을 향해 달렸다. 전날 밤 넓고 쾌적한 방에서 잘 쉬고, 아침에는 모처럼 동해의 아름다운 일출에 취했던 일행들은 모두들 어린아이들처럼 신나는 모습이었다.

 

아침식사는 남편들이 담당했다. 서툰 솜씨로 밥을 짓고 저녁에 준비해 두었던 재료로 된장찌개를 끓였다. 밑반찬은 서울에서 준비해 간 것으로 충분했다. 기대 반 염려 반으로 식탁에 앉은 아내들은 남편들의 음식솜씨가 좋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다가 이거 집에 돌아가서도 주방장 계속하게 되는 것 아녀?"

 

설거지를 담당한 일행의 농담 속에도 여행의 즐거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 아내들의 칭찬에 힘을 얻은 남편들은 다시 점심까지 지어 차에 싣고 남쪽으로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추암에 잠깐 들러 가자니깐 지나쳤잖아. 잠깐 쉬어 가자."

 

동해를 지나 삼척이 가까워질 무렵 추암을 들러 가자는 말이 나왔지만 무심코 훌쩍 지나치고 말았다. 근처 바닷가의 전망 좋은 곳에서 잠깐 쉬었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다음 목표지는 울진이었다.

 

용화와 장호해수욕장을 기웃기웃 살펴보았지만 별로 마음 내켜하는 사람이 없었다. 임원을 지나 호산해수욕장이 가까워질 무렵 앞장서 달리던 차가 길가 공터로 들어섰다. 공터에는 비닐봉투에 참외를 담아 진열해 놓고 파는 중년부부가 있었다.

 

 

"오늘은 참외를 좀 살까? 어제는 복숭아를 먹었으니까 오늘은 참외 어때?"

 

참외를 깎아 놓고 한 점씩 잘라주며 맛을 보여주는 아주머니의 표정이 해맑았다. 이곳이 어느 도에 속하느냐고 물으니 아직 강원도라고 한다.

 

길가에서 과일 파는 모녀의 정다운 모습

 

우리 일행들이 참외를 사는 동안 남편은 트럭을 몰고 떠났다. 대신 고등학생처럼 앳된 얼굴의 딸이 엄마 옆에 나란히 섰다. 엄마를 거들어주려는 모습이었다. 방학 중인 고등학생이냐고 물으니 대학생이라고 한다.

 

"우리 딸 예쁘고 어려보이죠? 사람들이 고등학생인줄로 아시는데 어려보이지만 대학생이래요."

 

본래 대구에서 살다가 이곳 강원도 삼척 땅으로 이사 온 지 십 년이 넘었다는 아주머니는 방학 중인 예쁜 딸이 엄마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이곳에서 파는 과일들은 참외뿐만 아니라 복숭아와 사과도 팔고 있었다. 대부분 자신의 밭에서 재배한 것들이지만 이웃 농장에서 가져온 것들도 있다고 한다. 남편은 지금 다른 이웃 농장에 가서 과일을 실어오기 위해 차를 몰고 나갔다고 했다.

 

모녀가 함께 파는 참외를 한 봉지 사서 차에 싣고 다시 길을 나섰다. 그런데 조금 더 내려가노라니 길옆 바닷가 언덕에 '황영조기념공원'이라는 높다랗게 세워진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바로 옆에는 허술한 가게 하나가 저리를 잡고 그 앞쪽으로는 철조망 아래로 해수욕장이 펼쳐져 있었다.

 

우선 가게 마당에 차를 세우고 주변을 돌아보려 하자 가게 할머니가 빨리 차를 빼란다. 차를 세운 지 3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직 오전이어서인지 가게 마당도 해수욕장도 텅 빈 쓸쓸한 모습이었다.

 

올림픽을 앞두고 마라톤 영웅 황영조의 고향 땅을 지나가다

 

마라톤 영웅 황영조 기념공원을 둘러보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조금 더 달리자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도계표지기 나타났다. 강원도 삼척 땅을 벗어나 경북 울진 땅으로 접어든 것이다.

 

날씨는 전날부터 3일 동안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무색하게 따가운 불볕이 대지를 후끈후끈 달구고 있었다. 이쯤에서 적당한 해수욕장을 찾아보려 할 즈음 기다렸다는 듯 안내판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후정해수욕장이었다.

 

 

후정해수욕장은 해변 큰길에서 구불구불한 이어진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야 했다. 해안도로변이 아니어서 매우 한산할 것 같았다. 그런데 주변에 소나무 숲이 우거진 주차장에 들어서자 세워져 있는 차량들이 상당히 많아 보인다. 주차비나 입장료는 없었다.

 

일행들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아내들 세 사람은 양산을 펼쳐 들고 멀뚱멀뚱 우리들을 쳐다본다. 바닷물에 들어올 마음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모래밭에서 구경만 하고 있으랄 수는 없었다.

 

세 명의 아내들에게는 바닷물을 가르며 신나게 달리는 보트를 타도록 해주고 물에 뛰어든 사람들은 신나는 물놀이가 시작되었다. 물은 시원할 뿐만 아니라 깨끗하고 맑았다. 가슴 깊이에서도 물 속의 발등이 선명하게 들여다보였다.

 

발뿐만이 아니었다. 물에 들어온 사람들을 환영이라도 하려는 듯 작은 물고기들이 다리와 발 가까이에 떼지어 몰려든 모습도 훤히 들여다보였다. 시원한 물에서 가볍게 몸을 풀던 일행 한 사람이 갑자기 가까이 있던 다른 일행에게 물을 끼얹으면서 물싸움이 시작되었다.

 

"어! 뭐야, 이거, 한 번 해보자는 거야? 자! 좋아! 덤벼봐!"

 

일행들의 물싸움은 주변의 어린이들과 다른 사람들의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손바닥을 펴서 물 위에 세워 힘껏 앞으로 밀어내 상대방의 얼굴에 물을 뒤집어씌우는 물싸움은 일행들을 어느새 어린 시절의 동심으로 되돌려 놓고 있었다.

 

"뭐야. 이건, 그럼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여보 힘내, 내가 도와줄게."

 

그러나 두 사람이 시작한 물싸움은 엉뚱한 양상으로 바뀌었다. 근처에서 물싸움을 구경하던 한 사람의 부인이 남편을 도와 물싸움에 가세한 것이었다.

 

더구나 물싸움에 가세한 부인은 어렸을 때부터 물싸움에는 자신이 있다던 그 부인이었다. 그러니 혼자서 두 사람을 당해낼 수가 있겠는가. 승부는 너무 쉽게 판가름 나고 말았다. 두 사람의 공격을 받은 일행 한 사람이 얼굴을 감싸고 패배를 인정한 것이다.

 

"부부가 합동작전으로 협공을 했겠다. 좋아, 이번엔 내가 상대한다."

 

다음은 사진을 찍어준 내 차례였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물속으로 뛰어든 내가 그들 부부에게 일단 호기롭게 도전하고 나선 것이다. 곧 물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상대편 두 사람의 물싸움 솜씨가 정말 대단했다.

 

 

양쪽에서 협공으로 물세례를 퍼붓는 그들의 공격을 피하여 뒤로 물러서다보니 한 순간 몸이 물 속으로 푹 잠기는 것이 아닌가. 두 손을 물 밑으로 꾸욱 밀고 올라선 나는 일단 헤엄을 쳐 바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개구쟁이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물싸움놀이하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

 

저만큼 가까운 곳에 수영장 경계표지인 하얀색 스티로폼 부표가 떠있는 것이 보였다. 그쪽으로 헤엄을 쳤다. 내 수영 실력으로 그 정도의 거리는 전혀 어렵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표가 떠있는 곳으로부터 4~5미터쯤의 거리에서 온몸의 힘이 쑤욱 빠지는 것이 아닌가.

 

"이크, 큰일 났다. 이거 이러면 안 되는데."

 

순간 온몸이 긴장했다. 잘 못하면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몰골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근처에는 튜브를 타고 노는 젊은 커플들도 보였고 해안에서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익사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누군가의 구조를 받게 되면 이 얼마나 망신이란 말인가. 더구나 일행들 중에서는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없었다. 부표와의 거리를 어림해 보며 안간힘을 썼다. 부표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자꾸만 물 속으로 빠져드는 몸을 용을 쓰듯 힘껏 솟구치며 몇 번의 호흡 끝에 부표가 손에 잡혔다.

 

"흐유! 부표야. 나 좀 살려 주렴!"

 

부표를 꼭 끌어안았다. 몸이 힘들이지 않고 둥실 떴다. 이 편안함이라니, 조금 전 물싸움 하던 일행들을 살펴보니 그들은 부표 쪽으로 헤엄쳐가는 나를 바라보며 안심했던지 자기네들끼리 다시 물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바다 저 멀리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바위 섬 속에서 부우웅 하는 보트소리가 들려왔다. 물속에 들어오지 않은 아내들이 신나게 달리는 보트에서 우리 남편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바라보였다.

 

"아니, 부표 쪽으로 헤엄쳐 가다가 힘이 빠져 죽을 뻔 했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물싸움만 하고 있으면 어떡해? 나 바닷물에 빠져 죽을 뻔 했잖아!"

 

다시 일행들이 모여 있는 얕은 물로 나온 내가 투정을 해보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옛날에 한강도 헤엄쳐 건너다니던 실력이었잖아? 뭘 저 정도 거리에서 설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농담이지?"

 

이런 친구들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허허 웃고 말아야지. 실제로 어렸을 때는 정말 한강을 헤엄쳐서 잘도 건너다닌 것이 사실이었다.

 

모두 나이 탓이었다. 세월의 무게를 어찌 당할 수 있으리오, 더구나 나이 들어가면서 수영장이나 바닷물에서 수영할 기회가 별로 없어 수영을 해본 지가 몇 년이나 지났으니 몸도 그만큼 둔해지고 수영감각도 떨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북 울진의 후정해수욕장에서 오랜만에 친구들과 어울려 개구쟁이 시절로 되돌아가 물싸움도 해보고 힘겨운 수영을 해본 것은 근래 들어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될 것 같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후정해수욕장, #물사움 놀이, #부표, #임시주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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