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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연행되다

갑자기 밖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더니 중국 헌병과 경찰이 강연장으로 난입했다. <길림군독서>의 병력이었다. 그들은 안창호를 비롯해서 청중들을 닥치는 대로 연행했다. 김영호는 급히 몸을 낮추고 강연장을 빠져 나왔다. 체포된 인원이 300명에 이른다는 말이 떠돌았다.

그렇다면 왜 중국군이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체포했는가? 당시 중국 동북3성을 장악하고 있던 장작림 군벌은 일본과 담합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미쓰야 협정>이 맺어져 있었다. 중국은 공산주의자를 일본은 반일 운동가들을 각각 색출하려는 의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조선 총독부 정무국의 구니도모는 봉천에 가서 중국 사령관 양우정을 만나 수백 명의 조선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하라고 요구했던 것이었다.

김영호는 분노가 치밀고 괴로웠다. 그는 자신이 안창호에게 던진 서면 질의가 마음에 걸렸다. 김영호는 동지들과 모임을 갖고 안창호의 석방 노력 방안을 의논했다. 그런데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 개량주의자를 위해 우리가 싸울 필요가 있는가?"
"안창호도 조선인이고 우리도 조선인이다.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의 노선이지, 그 사람 자체는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인끼리는 어려울 때 협조해야 한다."

"중국에서는 뇌물이 가장 빠른 방법이오."

누군가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김영호는 이럴 때일수록 정통적인 방법이 먹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안창호와 같이 온 기독교인 손정도와 협조하여 길림 예배당에서 집회를 열었다. 집회에는 유지와 신도와 학생들이 많이 모였다.

그들은 <길림독군서>를 비난하는 결의문을 살포했다. 독군서가 왜놈과 한패가 되어 뇌물을 받고 조선의 애국자와 무고한 사람들을 구금하고 있는데, 결의문에는 만약 그들이 일본군 손에 넘어가면 처형을 면할 수 없으니 다 함께 궐기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중국 경찰이 근거 없이 조선인을 박해한다."
"중국 관헌은 일제의 간계에 속지 마라."
"죄 없는 조선 동포를 하루속히 석방하라."

그들은 군독서 앞에 가 시위를 벌였다. 미리 연락을 받은 신문사에서 기자들이 몰려와 취재했다. 마침내 대중의 여론에 못 이겨 군독서는 체포 20일 만에 안창호 등을 석방했다.

나민혜의 이상한 음모

나민혜는 김문수에게 걸핏하면 편지를 보냈다. 그녀는 삶이 괴로울 때가 많다고 했다. 김문수는 편지를 읽을 때마다 그녀에게는 말 못할 어려움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뜬금없이 나민혜는 자기가 유학 갔다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뭘 기다리라는 것인지 김문수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농담인지 진담인지도 분명치 않았다. 김문수는 그녀의 정서가 다소 어수선한 면이 있음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는 여러 차례 선물까지 보냈다. 조화를 보내기도 했고 지갑과 수첩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김문수는 나민혜가 남에게 선물하기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김영세는 조카에게 웬 여성이 선물을 자주 보내자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선물 가게 하는 여성이냐?"

김문수는 웃었다.

김영세는 어떤 소설 얘기를 조카에게 들려주었다.

사랑에 치명적으로 목마른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병으로 죽었다. 그녀는 자기 집의 하인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녀는 백화점에 가서 양말 세 켤레를 샀다. 그러나 막상 선물을 주려고 하니 쑥스럽고 어려웠다. 무엇보다 그가 선물을 안 받을지도 몰라 몹시 두려웠다. 그럴 경우 그녀는 그를 증오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젖어 있었다. 그녀는 양말을 장롱에 둔 채 무섭게 번민하며 긴 겨울을 넘기고 만다.

봄이 되었다. 어느 날 우편배달부가 그녀의 집에 소포를 전달하고 그녀에게 서명을 요구했다. 그녀는 시아버지가 준 만년필로 서명을 했다. 우편배달부는 고급 만년필이 아주 좋아 보였다.

"마님, 만년필이 정말 좋아 보이는군요."
그녀는 우편배달부의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그러나 우편배달부의 시선은 계속 만년필을 좇고 있었다. 그는 그런 만년필을 꼭 갖고 싶었노라고 말했다.

"가지세요."
"네에?"
만년필을 받고 연방 허리를 굽실거리는 우편배달부 앞에서 그녀는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하,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엇을 주기가 이렇게 쉬운 것이로구나.'

김영세는 조카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주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너에게 마구 선물을 보내다니... 아마 그녀는 선물 가게 주인이 아니라면 너를 우습게 아는 여성일 것이다."

김문수는 또 웃었다. 그러자 김영세도 따라 웃었다.

나민혜는 떠나기 전에 확실히 해 둘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순호를 찾아갔다. 그녀는 조순호에게 스타킹을 선물하면서 말했다.

"김문수씨 지갑을 사는 김에 네 생각이 나서 산 거야."

조순호는 말없이 선물을 받았다.

"다음 주에는 김문수씨 고향에 갈 예정이야."
"김문수씨 집에 간다고?"

조순호는 아주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응. 문수씨 부모가 초대했어. 유학 가기 전에 한 번 만나 보자고."

일본으로 떠나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나민혜는 김문수를 만났다.
그녀는 창작과 삶의 무게가 자기에게 너무 벅차다고 말했다. 그녀는 떠나기 전 어디 시골이라도 하루 다녀오고 싶다고 한다. 그러자 김문수가 말했다.

"나민혜씨. 저는 예술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너무 세상을 무겁게 받아들이면 그 세상을 정확히 볼 수 없지 않을까요? 좀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고 봐요. 조순호씨처럼."

순간 나민혜는 가슴이 아팠다. 그것은 예리한 슬픔이었다. 그녀는 두 손의 엄지와 검지로 여덟 팔 자를 만들어 눈에 댔다. 그것은 앞에서 볼 때, 슬픔을 절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동작이었다.

사실 그녀는 불행하게 자라난 여자였다. 그녀의 불행은 가정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녀의 불행은 아버지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나민혜는 그녀의 아버지와 그녀의 집 옛 가정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그녀 아버지의 전처는 정상적인 여인이었다. 전처는 가정부의 배가 불러오자 아이 둘을 데리고 집을 나가 버렸다. 너무 부끄러워 아이들에게 보일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민혜는 자신의 출생 내력을 알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녀의 어머니는 남의 남자를 야비한 방법으로 가로챈 여자였다. 그녀는 지금 자기가 조순호의 남자를 가로채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공포감 같은 것이 서리고 있었다. 김문수에게 그것은 예술가 특유의 예리하고도 진지한 슬픔으로 보이기도 했다.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물들의 매혹적인 삶과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태그:#안창호,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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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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