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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문제와 관련해 '일본에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면 독도문제는 달라질 것'이며 '(일본도) 내부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 파문이 예상된다. 이 대통령은 24일 청와대 춘추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독도문제를 둘러싼 일본의 태도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이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필자가 만일 지난 23일 청와대 기자실에 있었다면 이런 기사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용의 기사는 당일은 물론 그 다음 날 아침 언론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언론은 대통령의 휴가일정에 관한 기사만 다뤘다. 이 대통령의 발언 중 독도문제 등에 대한 발언 내용은 빠졌다. 왜일까? 

 

한 청와대 출입기자에 따르면, 이날 이 대통령은 휴가를 앞두고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만나 약 30여분간 질의 응답 시간을 가졌다. 휴가에 관한 이야기와 아들의 이른바 '낙하산' 입사 문제도 오갔다. 민감한 현안에 관한 질문을 기자들이 빠뜨렸을 리 없다.

 

이 대통령은 "(일본) 후쿠다 총리에 많이 실망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어느 순간 일본에도 위대한(큰) 지도자가 나오면 독도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유럽같이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면 분규의 여지가 없는 것이고 실마리가 나올 수 있다"라면서 "거기도(일본도) 국내 사정이 있으니까…"라고 대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대통령은 이밖에 대북특사 문제, 미국선거 문제, 지역개발정책, 수도권 규제완화 등 여러 가지 주제에 관해 소신과 의견을 밝혔다.

 

대통령의 발언에 눈감은 출입기자들

 

대통령의 발언은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는다. 아무리 의미를 축소하더라도 대부분 파장이 예상될 만큼 중요한 게 대통령의 발언이다. 이날 발언들도 그렇다.

 

우선, 독도문제로 가뜩이나 한일 양국 관계가 예민한 시기에, 상대국 지도자에 대한 품평식 발언은 분명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대통령의 이날 발언을 거꾸로 해석하면 '일본에 위대한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독도문제가 생긴 것'이라는 의미가 돼, 일본 총리에 대한 폄하발언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있다.

 

또 이는 후쿠다 현 총리뿐 아니라 독도문제가 불거졌던 당시의 모든 일본 지도자들에게 해당될 수 있으므로 양국 간 외교적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발언이다.

 

외교적 문제로 비화해 국익차원의 유-불리 논란에 휩싸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독도분쟁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관점과 소신을 보여주는 부분이기 때문에 언론이 무조건 입을 닫을 사안은 아니다. (전해듣기로 '위대한 지도자' 언급은 두세차례 반복하며 강조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실언'이었다면 더욱 언론이 그냥 눈감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일본도 국내사정이 있을 것'이란 부분도 그렇다. 이는 얼마 전 일본 보수언론에서 보도돼 파문을 일으켰던 이 대통령의 '기다려 달라' 발언과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일본도 국내사정이 있어서 독도 분쟁을 야기하는 것 아니냐'는 뜻으로 들린다.

 

독도문제로 외교갈등이 갈수록 첨예하게 불거지고 있고 전 국민이 정부의 미숙한 독도대응에 실망하고 있는 와중에 나온 이 발언은, 마치 이 대통령이 일본 쪽을 적극 옹호하려는 듯한 뉘앙스를 주고 있다. 청와대와 대통령 권력을 감시하러 나간 춘추관 출입기자들이 왜 이를 문제삼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일본 지도자에 대한 품평 발언, 독도문제에 대한 일본입장 옹호로 비칠 수 있는 발언 등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었다. 소재 자체가 현안이요, 뜨거운 감자다. 기자의 질문에 대한 이 대통령의 답변 내용과 수위 역시 기사화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가볍지 않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의 외교는 '무능 외교'로 연일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직접 현장에서 들은 기자들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과문한 필자가 판단하기엔, 언론이 이 발언들을 즉시 보도하고 의미와 문제점, 대통령의 외교 및 국정운영 철학과 소신에 대해 정확히 평가하고 날카롭게 비판하는 게 당연했다. 청와대 춘추관을 빌려쓰는 기자 본연의 역할이자 고유한 임무다. 

 

그런데 왜 청와대 출입기자 누구도 이를 기사화하지 않았을까? 바로 청와대의 사후 '비보도(Off-the-record)' 요청을 출입기자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한 기자에 따르면, 이 대통령이 기자들을 만나고 돌아간 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 독도문제 와 관련된 대통령 발언에 대해 '오프더레코드(비보도)'를 요청했다. 기자들은 회의를 열어 이를 받아주기로 합의했다.

 

비보도 남발하는 청와대, 수용을 밀어붙인 출입기자단

 

이해할 수 없다. 기자들이 도대체 무슨 근거로 또는 누구를 위해 청와대의 '사후 오프더레코드' 요청을 받아들였는지 의문이다. '오프더레코드'는 일반적으로 보도가치가 있는 내용을 취재원을 보호하거나 취재원과의 관계를 고려해 보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흔히 취재원이 기자에게 사전에 '오프더레코드'를 요청하고 이를 전제로 정보를 준다.

 

사전 오프더레코드는 정보원과의 '신뢰' 차원에서 지켜지는 것이 원칙이지만, 정보의 중요성이나 파장 정도에 따라 깨지는 경우도 많다. 사전 요청이 아니라 이번처럼 사후 요청은 더더욱 그렇다. 오프더레코드 요청을 받아들일 것이냐 마냐는 기자의 판단이다. 판단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기자의 양심'이요 '국민의 알권리'다.

 

도대체 어떤 기준과 근거인가? 취재원 보호를 위해서였을까, 대통령과 출입기자단 사이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대통령의 거침없는 발언이 국익에 해로울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을까? 기자들이 평소 금과옥조로 여기는 '국민의 알 권리'는 어디로 갔나? 권력기관을 감시해야 하는 언론의 소명은 또 어디로 사라졌나?

 

이 정부 들어 청와대의 언론개입이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차레 알려졌다. 청와대 대변인이 툭하면 언론사에 전화를 걸어 기사를 삭제하거나 고쳐달라고 요구한 사실은 이미 다 밝혀졌다. 정치적으로 불리한 내용이면 '오프더레코드'나 '엠바고'를 걸어 보도를 막은 사례가 부쩍 늘었다는 게 한 언론사 청와대 출입기자의 전언이다. 모 언론사의 청와대 출입기자는 엠바고(보도유예) 요청을 거부했다가 뒤에 회사에서 부당한 인사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의 직접 발언은 하나하나가 통치철학과 정책 방향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오프더레코드' 요청을 남발해서는 안 된다. 청와대의 잦은 비보도·보도유예·보도삭제 요구도 문제지만, 기자들이 너무 쉽게 출입처의 '부적절한' 요구와 관행을 인정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더욱이 이번 경우는 2~3개 언론사의 출입기자들이 청와대의 오프더레코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견을 냈는데도 '출입기자단' 차원에서 이를 수용하도록 밀어붙였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 들어 청와대의 이런 부적절한 요구가 늘고, 기자단 역시 이를 별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인 경우가 많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청와대 춘추관을 기자들에게 빌려준 것은 권력을 더 날카롭게 감시하고 비판하라고 한 것이지, 오프더레코드 요청에 적당히 순응하면서 원하는 기사만 받아쓰라고 한 것은 아니다. 언론에 대한 신뢰, 기자에 대한 신뢰가 갈수록 곤두박질 치고 있는 것은 언론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크다.

덧붙이는 글 | 김성재 기자는 인터넷 경제신문 <이데일리> 경제부 차장입니다.  


태그:#이명박, #독도, #오프더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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