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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8일 토요일 낮 두 시, 인천 배다리 '시 다락방'에서 여덟째 ‘시읽기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날은 인천에서 태어나 죽 인천에서 살면서 시길을 걸어온 홍명희님 시를 그러모아서 함께 읽고 함께 듣고 함께 나누었습니다.

 

시잔치를 열면서, 잔치를 이끈 전은경님은 “저는 우리 나라에 여류시인이 많은 줄 인천에 와서 처음 알았어요. 고통에 찬 시가 거의 없고, 알알이 아름답게 쓴 시가 굉장히 많아서 놀라워요. 29년 밖에 안 살았어도 괴로운 일이 많은데, 시인 분들 머리에는 아름다움이 더 많이 보이는가 봐요” 하고 홍명희 시인을 소개합니다.

 

홍명희 시인은 소개를 받으면서, “부끄럽습니다. 부끄럽다는 말밖에 없어요. 저는 인천에서 태어났어요. 이제 일흔이 되었는데, 이때까지 살고 있어요. 인천서 공부하고 인천서 결혼하며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 좋은 서점에서, 시 다락방에서 여러분을 만나니 반갑고 기쁘고 감동스럽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말실수도 있을 겁니다. 다음에 또 하면, 말실수도 없을 텐데, 귀엽게 봐주세요” 하고 말씀합니다. 1932년에 태어나셨으니 어느덧 일흔하고도 일곱인 셈입니다. 그런데에도 ‘귀엽게 봐주세요’ 하고 당신을 낮추어 말씀합니다.

 

잔치를 이끄는 분은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아름다우니까 시가 아름다운 거 같아요. 삶이 아름다우니까 시가 아름다운 거 같아요” 하고 맺으면서, 첫 시를 읽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손 잡고 씻어 주었던

 애들의 손을

 지금은 바라만 볼 뿐이다.

 

 갸름하고

 해사하고

 말끔한 그 손들이

 왠지 마음을 간지럽힌다.

 

 몽탁하고 자그마한 내 손을 펴서

 유심히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무엇을 잡으려다

 놓친 손인가

 무엇을 잡으려고

 헤매이는가

 

 덤덤하기만 한

 손 안에 남을 것이 무엇이랴만

 손 안에 든 기억은 다채로워서

 가는 날과 더불어 살져 간단다.  (손)

 

열여덟 쪽짜리 조그마한 책자에 시를 담았고, 시잔치에 모인 분은 저마다 마음에 드는 시를 하나씩 읽습니다. 때로는 같은 시를 두 번, 또는 세 번 읽기도 합니다. 쓴 사람은 하나이지만, 읽는 사람은 여럿이라서, 읽는 사람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느낌과 맛이 다릅니다. 또, 사람마다 다른 목소리와 높낮이이기에, 어떻게 끊어서 읽느냐에 따라서 이야기와 빛깔이 다릅니다.

 

 너 있기 위하여

 내가 있었던 게 아니냐.

 

 또 오늘에 이어서

 내일이 있어 가는 게 아니냐.

 

 그 내일을 위하여

 우리는

 오늘을 사는 거다.

 

 지난 모든 나날들

 너를 예비해 둔

 그 나날들의 일들은

 

 그것은

 이 애미의 독백

 우습고도 괴로운

 

 하기사

 물려줄 아무것은 없어도

 오히려 마음은 풍족한

 내겐

 네가

 있어 가는 것이 아니냐.

 

 활짝

 함박꽃처럼

 다부지게 오돌지게

 그리고

 깨끗이

 

 내겐

 네가

 있어 가는 것이 아니냐.  (내 딸아)

 

홍명희님은 당신 삶에서 시를 얻어낸다고 합니다. 시를 뽑아내지 않고 얻어냅니다. 살고 있는 모습이 고스란히 시로 담기고, 시로 담은 삶결 그대로 마음을 다스리면서 살아갑니다. 말놀이처럼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고 합니다만, ‘시인은 바로 시대로 산다’고 느낍니다. 소설대로 살면 소설쟁이, 시대로 살면 시쟁이, 노래대로 살면 노래쟁이일 테지요. 흙이 좋아서 흙하고 살면 흙쟁이, 땀이 좋아서 땀흘리며 살면 땀쟁이입니다. 돈이 좋아서 돈벌이에만 빠져서 살면 돈쟁이요, 권력에 맛들여 권력하고만 노닥거리면 권력쟁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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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님은 인천 송림초등학교에서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조금 짧게 교사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이 송림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하는 한아무개 님은 “이 자리에 서게 된 거는, 이 자리에 올라서 시를 읽지 않으면 후회할 거 같아서입니다. 선생님 앞에 선 생각으로 읽겠습니다” 하고 시를 읽습니다. 함께 듣는 사람들은 이 떨림을 고이 느끼며 받아들입니다.

 

시읽기를 듣고 난 홍명희님이 말문을 엽니다. “첫 시집에 있던, 그때가 마흔 좀 넘어서예요. 살림이 좀 안정되면서 …… 쓰기 시작한 지는 오래되었는데, 그때는 뭐 단순했지요. 시도 사람도 나는 단순하지만, 이때는 그저, ‘외롭다 그립다 기다림’ 그런 데서 헤엄치던 시절에 쓴 거거든요. 만날 이런 데서 헤매야 하느냐, 그러니 ‘소녀 같다 무게가 없다’ 그런 소리를 듣던 때예요. 그러면 무게를 담아 볼까 하며 쓴 시예요.”

 

무게가 없이 썼다는 시를 어느 분이 읽어 줍니다.

 

 삼라만상

 아름다운은

 물그림자 지듯한

 빛의 그림자

 흔들림 없는

 고요로운 것

 

 마음속에 와 밝고

 살갗에 닿아 따스며

 눈에 들어 빛나는

 풍요로운 잔치

 

 구름은 떠 가고

 바람은 지나며

 물은 흐르게

 빛은 미소짓는다.

 

 네게도 내게도

 낯가림 없는

 햇빛 넘노는 그 속에

 펼쳐 보이고 싶다.

 우리 모두 맨손인 것을―.  (햇빛 넘노는 속에)

 

이번에는, “실제로 있던 얘기예요. 이웃집 할머니가 박정희 시절에 남편이 끌려간 얘기를 하는데, 정말 우습고요, 내가 증말 한번 써 본 겁니다” 하고 한 마디 덧붙여 줍니다. 이웃집 할머니한테 들은 이야기를 고스란히 옮겼다는 시, 박정희 때 이야기를 담았다는 시, 이런 시라면 누구나 무던히도 많이 쓸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다만, 몇몇 시인을 빼놓고는 이런 이야기를 시로 담아내지 못했고, 또 이웃사람한테 그때 이야기를 듣지 않으며, 자기 스스로도 지난날 겪은 이야기를 시로 잘 안 써 버릇합니다만.

 

“지금은 대처 됐지유. 그때는 달랑 우리 집 하나지유. 자기 없으문 애들하고 못 살겠응께 요리 피하고 조리 피하고 박정희 대통령 때 길에서 군대루 붙잡혀 가지 않았네뷰. 애 들 학교 보내고 지금 영미 애미 젖 멕일 땐디. 애이고 고생 고생 말이나 할 수 있간디유. 산이란 산은 다 다녀서 솔방울 가마 주워다 팔아 애들 학교 돈 줬지유. 가끔 친정 아버지 와서 농사일 안 해 줬으면 살기나 했간디유.”

“하루는 논산에 있다구 연락이 왔건디, 같이 붙잡혀 간 건너말 이씨네 그 아짐씨하고 함께 가는디, 그 집도 똑같이 애를 업었는디 애가 똥질을 하누만. 버스는 저기서 오는디 똥은 비질비질 나오지 않나베. 아짐씨는 징징 울며 같이 가유 같이 가유 하는디 지금같이 휴지가 있나 뭐가 있나 난감하던 걸유.”

“냄새를 있는대루 풍기면선 논산까지 갔이유. 애는 질끈 동여매구 우선 국밥 한 그릇 사서 식을께비 가슴에 품구서 어찌어찌 하니까 참 이이가 나오뎅게유. 날 보드만 애부터 덥썩 받아 안는디 그래두 좋덴게유.”

 

 지금은 이웃에 별장 집이 들어서고

 그래서 이웃 마실 오는데

 넓은 테두리 노란 모자에

 노란 수건까지 둘러쓰고

 햇빛을 막아도

 그스름이 막아지는가

 

 인생에 자랑할 것은

 고생뿐이라니

 고생한 이야기도

 지금 이웃 마실에선

 꽃으로 피어난다.  (이웃 마실)

 

초등학교 6학년이라는 어린이가 시를 읽습니다. 아이가 시를 다 읽고, 손뼉을 받으며 자리로 들어가 앉자, 잔치를 이끄는 분이 “시 안에 꽃이 있지만, 어린이가 읽으면 시가 더 꽃 같아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러게요. 시에는 꽃이 담겨 있습니다. 시 아닌 글이나 말에도 꽃이 담겨 있습니다. 아직 활짝 피어나지 못하고 가시만 날카로울 수 있고, 끝내 봉우리를 올리지 못하기도 합니다만, 모든 시며 말이며 글에는 꽃이 담겨 있습니다.

 

홍명희님도 한 말씀 붙입니다. “여러분보다 제가 더 감동하고 있어서, 무슨 말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이런 믿음, ‘시는 생활이다. 생활 속에 시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시어 찾는 사건이 있는데, 나는 생활에서 그 말들이 시로 승화하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내 시에서 어려운 말을 표현할 수도 없지만, 그런 노력을 안 하려고 합니다.” 잠깐 말을 끊었다가 잇습니다. “제 시에, ‘할머니 놀자’ ‘그래 놀자’, 그러면서도 시를 쓴 게 있는데, 그걸 쓰면서, 아, 이게 내 모습이지 않은가, 내 생활 모습 그대로 표현하는 게 내 시가 아니냐 생각하며, 어려울 것도 없겠고, 삶에서 동떨어질 것도 없겠고, 내 생활에서 멀어질 것도 없겠고, 그게 내 시입니다. 이제 더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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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그림대로 만납니다. 사진은 사진대로 만납니다. 글은 글대로 만납니다. 글 가운데 시는 또 시대로 만납니다. 그림이나 사진이나 글이나, 모두 지은이 삶이 묻어나기 마련입니다. 지은이 삶이 묻어나지 않았다면, 무엇인가를 훙내낸 얼치기가 아니랴 싶습니다. 지은이 삶을 느낄 수 없다면, 용두질에 그친 작품이 아니랴 싶습니다. 아니, 이런 용두질에는 ‘작품’이라는 이름도 붙일 수 없겠지요.

 

.. 옛날, 그러니까 내가 시를 뜻하고 애쓸 때 그때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다. 원래 성격이 단순하고 외곬수여서 그랬는지 시인 외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게 재주가 있다고 자부하는 것도 아니요, 시를 많이 쓰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에게 시를 잘 쓴다고 하는 이도 없고, 지금처럼 시 쓰기를 지도해 주는 사람도 모임도 없는 시절이었는데 무조건 시가 좋았다. 아니 막연히 시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었는지……. 사실은 시가 무엇인지나 알았겠는가. 어찌어찌 나이가 들다 보니 날보고 시인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시인으로 소개되기도 하고 시인 대접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혼자 속으로 당황한다. 외로워진다. 발밑이 무너지는 듯한 허전함을 느낀다. 내가 생각해 온 시란 내 정도여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내게 늘 있다. 시란 인생을 넉넉히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어야 하고, 심오하고 오묘하며 아름답고 부드러우며 별빛처럼 영롱한 예지로 빛나야 하고, 때로는 섬광같은 칼날로 환부를 도려내는 과단성이나 정의로운 정감이 엿보이는 따뜻함이 있어야 한다. 어찌 시를 다 말할 수 있으랴. 내 전 생애와 전 인격으로 돌진해 간다 해도, 시는 내게 멀리만 있는 것을 안다. 그래도 나는 시인이고 싶다. 내 시를 읽어 주는 분들께 나는 시인이고 싶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성구, 바울 선생의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칠 때” 나는 시인이고 싶다. 또 세월이 가고 또 가서 먼먼 훗날 내 시 한 편이라도 읽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 나는 시인이고 싶다 ..  (나는 시인이고 싶다)

 

시잔치에 온 분이 한 번, 또 시인 스스로 한 번, '나는 시인이고 싶다'라는 글을 읽습니다. 그리고 홍명희님이 마지막 한 마디를 붙입니다. “시집을 낼 때 서문으로 썼던 거예요. 내 걸 내가 잘 썼다고 하면 안 되겠지만, 내 진정을 담아낸 거 같아요. 그래요 …… 글이라는 건, 시라는 건, 일단 내 손에서 나가서 읽어 주는 분이 있을 때, 그때부터는 내 시가 아니라 여러분의 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시를 이렇게 해서 이렇게 쓴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여러분이 받아들이고 작품이 되고 하면 바람입니다.”

 

모두들 큰 손뼉으로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한 시간 반 조금 못 되게 이어진 시 읽는 잔치는 조용히 마무리가 됩니다. 시인하고 사진찍기를 하는 분이 있고, 잔치 끝난 뒤 차를 함께 들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분이 있습니다.

 

저는 사진기를 잃어버린 탓에 사진은 못 찍고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제 생각을 책자 빈자리에 끄적여 보았습니다. 다음달 시잔치 때에는 사진기를 새로 장만해서 사진을 찍으면서 말씀을 들을 텐데, 언제나 제 몸과 함께 움직이던 사진기가 없이 있자니,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시를 쓰는 분들한테는 당신들 마음으로 샘솟는 싯말 하나하나를 적바림할 연필과 종이가 없다면, 배부르고 돈 넉넉한 삶을 꾸릴 수 있다고 해도 당신 삶이 당신 삶 같지 않다고 느끼지 않을까 싶습니다. 젊었을 적에는 젊었을 적대로 시삶을 꾸려 갔을 홍명희 할머님은 나이 일흔일곱인 지금, 일흔일곱 나이 그대로 시삶을 꾸리면서 사람들을 만나며 웃고 있습니다.

 

홍명희 시인은……

1932년에 인천에서 태어남

1937년에 인천 박문유치원에 들어감

1944년에 인천 박문초등학교를 마침

1945년에 인천여자중고등학교에 들어감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인천 송림초등학교 교사를 맡음

1952년에 연합신문 전시판 신춘문예에 입선

1953년에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에 들어감

1978년에 <현대문학>으로 등단

1980년에 첫 시집 <범부의 서> 냄

1990년에 둘째 시집 <사랑으로 가는 길> 냄

1992년에 인천시 문화상 받음

1993년에 셋째 시집 <네가 어디에 있느냐> 냄

1997년에 넷째 시집 <햇빛과 비바람 천둥 번개> 냄

2000년에 다섯째 시집 <조용히 그리고 환하게> 냄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태그:#시잔치, #시 다락방, #홍명희, #배다리, #아벨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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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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