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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일 레이스 들어봤나?

대한민국은 기본적으로 산이 많은 나라다. 그래서 산을 활용한 다양한 이벤트를 개최하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과 공존하려면 욕심을 버리고 인위적인 편리함을 배제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트레일 레이스'는 친자연적인 신종 스포츠라 하겠다. 자급자족을 기본으로 하는 일종의 산악 마라톤인데 쓰레기 금지는 물론이고 자연환경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절대 금지한다. 때문에 코스도 새롭게 개발하지 않고 기존의 등산로를 이용한다. 그렇지만 누가 어떻게 만들고 운영하냐에 따라서 결과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자연과 함께하는 이벤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업체의 관점이 아닌 참가자 관점의 대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연도 살고 우리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노조리코 가는길
 노조리코 가는길
ⓒ 유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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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품 전시회장
 용품 전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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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한 사람, 왜?

일본 도쿄에서 나가노 산골짜기로 가기 전 비 올 확률이 90% 이상이라는 일기 예보를 들었다. 일본의 일기 예보 정확도가 우리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기에 잔뜩 긴장이 된다. 방수가 되는 고어텍스 재킷을 한국에 두고온 것이 내심 불안했다.

물론 1회용 비옷을 준비했지만, 혹시라도 악천우를 만나면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에서 살인적인 물대포를 맞고 버틸 때 입었던 1회용 비옷이라 나도 한 번 믿어 보기로 했다.

5월에 열렸던 노베야마 울트라 마라톤 대회처럼 이번에도 3명의 일본 '언니'들과 함께 동행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층 젊어진 언니들로 멤버가 업그레이드됐기에 왠지 좀 더 상큼달콤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일행 4명 중 대회 장소를 가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카 내비게이션'만 바라보고 길을 떠났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에 나타난 정보를 보니 거리상으로는 200km가 안 되지만 도착시간을 따지니 거의 5시간이 소요된다. 이게 뭔일인가 싶어 여기저기 알아보니 그 동네는 오로지 비탈만 있는 동네라 한다. 왠만한 동네의 높이가 기본 1500~2000m 이상으로 하늘과 만나는 지역, 즉 고봉들이 모인 일본 알프스의 친척 동네인 것이다.

가는 길이 멀어서 지루할 것 같았지만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웃고 떠들다 보니 예상보다 일찍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중에 유명한 멧돼지 음식점을 만나서 '멧돼지 우동'이란 걸 먹어봤다. 어머 세상에나! 걸쭉한 국물이 완전 보약 그 자체다. 내 평생 그렇게 진하고 맛있는 돼지고기국은 처음 먹어봤다.

대회 출발지점은 일본에서 스키장과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난 처음 가봤으니 그런가 보다 했는데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온통 스키장과 온천 투성이었다. 계란 썩는 것 같은 고약한 유황 냄새가 진동하고 바위색도 이상했다. 그런 와중에 눈은 안 녹고 쌓여 있었다. 으실으실 춥고 배고픈 초저녁이엇다.

거기다 내일 비가 온다고 하니 온종일 비 맞고 미끄러져 구르다 무릎 돌아간 지난 2월 베트남 대회의 악몽이 떠올라 한층 머리가 복잡해진다. 괜시리 다쳤던 무릎이 아프다고 하소연한다. 그나마 우리가 투숙한 호텔에 온천이 있어 몸과 마음을 풀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좋았다. 그리고 낯선 곳에서 3명의 일본 여인네들과 혼숙(?)을 하려니… '아~! 어쩌란 말이냐 흩어진 이 마음을…'

친구들과 함께
 친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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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전 기념사진
 출발전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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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속의 출발
 비속의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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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의 산오르기
 초반의 산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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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장 달리기
 스키장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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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서 미끄러우면? 구르면 되지

유행하는 CF '되고송'이 있다. 이번 대회를 '되고송'에 접목시키면 아래와 같다.

폭우가 와서 길이 막히면~
가고싶은 사람 돌아가면 되고~
가기 싫으면 안 가면 되고~
생각대로 하면 되고

나가노현과 군마현을 걸쳐서 관통하는 코스에는 300mm 이상의 집중호우로 도로가 유실되고 입산 금지령이 내릴 정도로 커다란 자연 재해가 발생했다. 문제는 우리가 출발하고 난 후 입산 금지령이 내려진 것이다. 그러니 참가자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안 봐도 답이 나올 것이다.

일단 코스에 들어서니 비바람이 쳤다. 길이 막히면 돌아가는 것외에는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가기 싫어서 기권을 하려고 해도 2000m 넘는 산을 내려 가는 것 외에는 어떻게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가야 한다.

중간중간 저체온증으로 사지가 뒤틀린 사람이 생기면 안전요원이 올 때까지 가슴 깊이 끌어 안고 몸을 녹여줘야 한다. 이럴 때면 여자가 남자보다는 이점이 많다. 남자가 이상이 생기면 선뜻 끌어안기가 부담스러워 주저하지만 대상이 여자면 모든 남자들이 갑자기 천사로 돌변한다. 코스에서 3명의 저체온 증상을 보인 여성 참가자를 만났다. 하지만 나에게는 좀처럼 도움을 줄 기회가 안 생겼다. 순수한 의도에서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항상 경쟁에서 밀린 아쉬움만 가득 남는다.

대회 장소가 산으로 둘러쌓인 지역인지라 처음 출발은 스키장 슬로프를 역주행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산속으로 올라가 순식간에 2000m 이상을 찍는 고봉찍기 놀이가 시작된다. 출발 후 얼마간은 사람들의 간격이 상당히 촘촘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앞뒤로 간격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2000m 이상에서 정상 탈환전을 힘겹게 벌이고 있는데 쏟아지는 비의 양이 장난이 아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느낌이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바닥이 많이 미끄럽지 않아서 힘으로 버틸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상태로 가다가는 분명 달리기보다는 구르기의 연속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점점 강해지는 빗줄기
 점점 강해지는 빗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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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2100미터
 해발 2100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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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적인 비와 안개의 코스
 몽환적인 비와 안개의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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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 스위스 "개뿔~"

한참을 오르내렸다. 그런데 같이 참가한 일본 친구 중 두명은 산악 레이스 베테랑들인지라 첫번째 체크포인트 이후로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잠깐 여기서 친구들을 소개하자면, 먼저 '유카꼬'는 사하라 사막 대회 원년 동기로 언제부터인가 나보다 기량이 한참을 앞서가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사막에 가면 잘 먹는 게 최고라며 45리터짜리 커다란 배낭에 거의 80%를 먹거리로 채우고 "다베테, 다베테(먹자)"를 외치는 가냘픈 여성이다.

초콜릿만 있으면 밥은 처다보지도 않는 초콜릿 중독자답게 배낭에는 물과 각양각색의 초콜릿이 가득 넘쳐난다. 초콜릿을 먹는 폼도 특이해서 영화 <데스노트>의 주인공 'L'과 비슷하게 이상한 자세로 쪼그리고 앉아서 먹는다. 그런데 그 모양이 묘하게도 초콜릿이 굉장히 맛있어 보이는 시각적인 효과를 연출한다. 괜시리 초콜릿을 따라서 먹게 되는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특이한 언니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동화 작가로 활동 중이다.

'미호'상은 좀 무섭다. 소싯적 배트민턴 선수 출신 답게 기초 체력이 아주 튼튼하다. 일반 마라톤은 잘 안 나가고 산에서 주로 달리는데 달릴 때 보면 힘들어 하는 모습이 전혀 없다. 엘리트 선수 출신들은 세월이 가도 기본 가락은 한다는 느낌이다. 일본의 마라톤 잡지인 <러너즈>에서 일을 한다. 그리고 와인을 전문적으로 배운 와인 전문가다. 와인을 마실 때면 항상 뭔가 열심히 설명을 해주고 교육을 시키지만 우리들은 돌아서면 바로 잊어 버리고 만다.

'미에'는 조그마한 키에 옆으로 쭉 찢어진 '네꼬노메(고양이눈)'을 가진 귀여운 언니다. 글을 쓰는 작가인데 거래하는 출판, 잡지사가 한둘이 아니다. 작업하는 잡지들을 보면 전문가의 손을 거친 글들의 수준은 다르다는 걸 한눈에 알수 있다. 그에 비하면 나의 글빨은 완전 애송이 수준이다. 그나마 3명 중에서는 나하고 달리는 수준이 비슷해 동반주를 자주 하게 된다. 2006년 아타카마사막 레이스에서 중도 탈락했지만 올해 멋들어지게 복수전을 펼쳤다.

해발 2100m

첫번째 체크포인트에서 유카꼬를 만났다.

"유상, 좃또마떼. 다베마쇼.(잠깐 먹고가자)"

유카꼬가 반갑다며 한 무더기의 먹을거리를 꺼내든다. 아니, 이 여자는 인생을 먹는 데 목숨 걸었나. 그리고 도대체 그 작은 배낭에 얼마나 많은 음식이 있는 건지 궁금하다.

첫번째 체크포인트에서 반가운 소식을 전해준다. 악천후로 인해 40km 코스가 26km로 줄었단다. 그래 잘 됐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너무 힘들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갈수 있냐는 한탄이 환호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계속되는 폭우 속에 우려했던 '구르기쇼'가 시작이 됐다. 예전 베트남 대회 같이 두꺼운 진흙 때문에 미끄럽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온통 길이 '물바다'라는 것.

이곳은 화산의 영향인지 흙 색깔이 약간 검은색을 띤다. 코스에 수시로 나타나는 웅덩이의 색깔도 시커먼 늪지대 같다. 아주 더러운 기분을 가지고 웅덩이를 건너자면 물 밑에서 나무 뿌리들이 발을 걸어 넘어뜨린다. 코스 중간부터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세찬 비가 시야를 가렸다. 가만히 있으면 춥고, 비를 피할 만한 곳도 없고, 살기 위해서 뛰다 걷다를 반복한다.

원래 2000m를 넘나드는 코스의 능선을 타고 달리는 맛은 스위스의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커버터블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느낌 그대로다. 하지만 벼락치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수도 없이 많은 우박 같이 커다란 빗방울을 맞고 달리다 보면, "풋! 스위스는 개뿔", 이렇게 된다.

제한시간의 압박으로 뛰어야 한다.
 제한시간의 압박으로 뛰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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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웠던 고봉찍기
 힘겨웠던 고봉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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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퍽한 코스, 미끄럽다.
 질퍽한 코스, 미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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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미...뭔짓인지...
 흐미...뭔짓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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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 후반부에서 만난 미에가 자꾸 처지면서 힘들어서 못가겠다고 한다. 얼마를 가다보니 5명 정도의 참가자들이 모여서 그룹으로 가게 됐다. 모두 지치고 추위에 찌들어 몰골이 말이 아니다.

나의 상태도 뭐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왼쪽 정강이 쪽은 언제 다쳤는지 몇 군데서 피가 나고, 엉덩이는 욱신거리고, 나무에 계속해서 부닥친 머리는 두통이 심하다. 왼쪽 검지 손가락 부위는 넘어질 때 충격을 받았는지 접히지도 않고 부어 있다. 그 와중에 어쩌다 보니 내가 리더가 되어서 "1km만 가면 골인이다"라는 통속적인 거짓말을 계속 우려먹으며 억지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산 밑 어디선가 안내방송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웅덩이에 빠지고 길에서 구르고,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마지막 3km 정도의 내리막은 시간에 쫓기어 말 그대로 구르면서 내려왔다. 미에와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소리를 지르며 골인 게이트를 통과했다. 저쪽에서 사막 레이스 멤버인 영국의 크리스가 반가운 얼굴로 환영을 나온다.

최종 기록 8:44:15 / 전체 673명 중에서 499등으로 완주했다. 참고적으로 이번 대회에서 153명이 탈락했다.

힘들어도 기념사진은...
 힘들어도 기념사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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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골인이다.
 드디어 골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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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노조리코 트레일 레이스 2008년 6월 29일 일본 시가-노조리코 트레일 레이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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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08년 6월 29일 일본 시가-노조리코 트레일 레이스 참가기 입니다.



태그:#마라톤, #여행, #일본, #사막, #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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