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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여보, 정말 더워 죽겠어요.”

“아무리 더워도 죽기야 하겠어?”

 

요새 우리 부부가 자주 나누는 대화다. 내가 사는 집은 조립식건물이어서 더 덥다. 모르긴 몰라도 같은 동네라도 다른 집보다 5도 정도는 더 오르내리는 것 같다. 추위야 보일러 온도를 높이면 되는데 더위가 문제다. 거기다 벽 하나를 둔 교회에 성도들이 무얼 한다고 우리 집엔 없는 에어컨을 틀어대면 더 짜증이 난다. 문을 열면 실외기 열기가 다 내 방으로 들어온다. 버르집어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가 헬리콥터 소리처럼 들린다.

 

왜 그렇지 않은가. 잠이 잘 오지 않는 밤, 잠자려고 하는데 곁에 사람이 잠을 자면서 내는 부스럭대는 소리, 심지어는 코를 고는 것도 아닌데 숨소리가 너무 커 귀에 거슬리는…. 교회의 에어컨 실외기 소리는 바로 그런 거다. 특별히 큰 에어컨 소리라서 그런 게 아니란 걸 잘 알면서도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을 수가 없다.

 

 

이런 심정을 가지고 상대적 빈곤감이라 하는가 보다. 옆에 사람도 같이 더위를 감내하면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은데 나만 더워야 하는 걸 못 견디는 옹졸함이 내 속에 있는 것이다. 나뿐이 아닌가 보다. 정말 못 견디겠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아내가 말한다.

 

“여보, 피서 갑시다.”

“이 사람이? 아니, 휴가도 아니고 무슨 피서를 간단 말이야. 정신 차려! 더윌 먹었나? 무슨 소리야?”

 

그러나 아내는 지지 않고 말한다.

“아니, 가까운 계곡에라도 가서 발이라도 담그면 살 것 같아요. 이러단 죽을 거 같아요.”

 

죽기야 하겠냐만 내가 생각해도 너무 덥다. 아내는 이미 오금마다 진물이 흐르는 게 심상치 않다. 여기저기 땀띠가 나 약 바르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벌써 이러니 한 여름에는 어쩌나 싶다. 아내의 말은 과장이지만 그래도 그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하는 게 남편이지 않나 싶다.

 

나는 ‘그래 피서가 별 건가? 더위를 피하는 게 피서지’ 생각하고 하던 일을 잽싸게 정리하고 인터넷에서 봐두었던 만수계곡으로 내비게이션을 맞추고 차를 몰았다. 잘 뚫린 청원 상주 간 고속도로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달리니 삼가저수지, 조금 더 가니 만수계곡이 나타났다. 속리산에 딸린 계곡으로 천황봉에서 시작하여 삼가천을 거쳐 삼가저수지에 이르는 길이 4㎞의 계곡이다. 아직 한여름이 아니어서 고즈넉했다.

 

가는 길목에 정이품소나무가 서있다. ‘어? 근데 뭔가 좀 다르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정부인소나무(천연기념물 352)’였던 것. 어찌 품새가 그리도 닮았는지. 그러고 보니 계곡 주변의 소나무들은 다 같은 품새를 하고 있었다. 정통 한국의 소나무, 그것이었다. 재선충병 때문에 소나무가 별로 없는데 이곳은 그래도 건재했다.

 

계곡 내내 좁긴 했지만 아스팔트가 깔려 잘 정돈된 길이다. 삼가저수지를 휘휘 돌아가는 길은 뭐 환상의 드라이브코스라고나 할까. 너무 좋았다. 창문을 열었다. 그렇게 열기만 가득 들어오던 차창으로 신선한 피톤치드 공기가 한 가득 들어왔다. 에어컨을 끄고도 이리 시원할 수 있다니. 하나님 솜씨인 자연이 주는 은혜는 참 곱단 생각이 들었다.

 

“여보, 물이 맑아요.”

“그러게, 물빛 참 곱다. 하늘이 다 계곡으로 내려앉았어.”

 

맞장구를 치고 돌멩이들을 간질이며 흐르는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얼마만이던가. 한 5년? 근래에는 피서라는 걸 한 기억이 없다. 그간 겪은 우리 가정의 질곡이 고스란히 이런 역사에 잠겨있다. 생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힘겨웠던 몇 년간이었으니까. 물론 오늘도 휴가라는 이름의 피서는 아니지만, 잠시의 휴식이라도 이리 한가하게 즐길 수 있는 게 꿈만 같다.

 

잠시 발을 담그고 있는 것만으로도 더위는 사라졌다. 그렇게 땀이 번질거리던 이마는 어디로 갔는지.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땀방울은 어디로 갔는지. 그들이 줄행랑을 친 자리엔 매끈한 살들이 행복에 겨워한다. 현재 기온보다 5-7도는 낮은 듯하다. 이 비좁은 대한민국 땅도 이리 다르다니.

 

“정말 여름 맞아?”

 

아내가 행복에 겨운 한 마디를 한다. 아내의 가지런한 발이 물 가운데에서 돌멩이들과 경쟁을 하며 물들의 마사지를 받는다.

 

“아니, 여긴 가을이네 뭐. 그저 발만 담갔을 뿐인데, 이리 시원하다니?”

 

나도 한 마디 대꾸를 한다. 어떤 화장품 광고 카피가 설핏 머리를 때리며 지나간다. 그래 그저 발만 담갔을 뿐인데 더위는 금세 사라지고 이리 고운 시원함이 내 주변에 모여 들다니. 돈도 안 들었다. 한여름에는 모르지만 입장료도 주차료도 안 냈다. ‘만수계곡’을 알리는 표지석 옆을 유유히 차를 몰고 들어왔으니까.

 

어느 새 일어나 계곡 위아래를 이리저리 뒤지며 물속에 손을 넣었다 뺐다 하던 아내가 손을 펴 내게 내밀며 말한다.

 

“이만 하면 된장국 한 끼는 넉넉하겠는데요.”

 

아내 손에는 다슬기가 한 움큼 들려 있다. 질세라 나도 한 마디 한다.

 

“그래, 이따 내려가다 어느 집 울타리에서 호박서리도 하고. 호박뿐 아니라 호박잎도 얼마나 맛있는데. 된장찌개 걸쭉하게 끓여 호박잎에 턱 싸 한 입 물면….”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아내가 큰 소리로 말한다.

 

“당신 이젠 도둑놈까지 되려고 그래요?”

 

우리는 서로의 눈을 보며 원 없이 웃었다. 냇물에 발을 담그고 놀다 지칠 때쯤 소나무 숲 아래 자리를 깔고 나란히 누웠다. 소솔하니 바람이 배며 손이며 얼굴을 간질이고 지나간다. 새소리가 낭랑하고 개울소리 또한 낭창하다. 여기가 천국이다 싶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가 스피커 소리가 우리의 행복한 조요를 일으켜 세웠다.

 

“양파, 라면, 커피, 가스, 과일, 다 팔아유! 쫄깃쫄깃한 빵도 있어유! ….”

 

캠핑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이동 슈퍼였다. 아직은 캠핑객이 없어 그의 철 이른 부지런함은 그저 공허한 외침이 되고 말았다. ‘사람의 근면도 때가 안 맞으면 복이 못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도 우리는 한참을 더 누워 있었다. 저녁때가 되어 일어나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피서는 이렇게 하는겨!”

아내도 대꾸한다. “그러게요. 오늘 당신 덕분에 진짜 피서했네요.”

 

이제 진정한(?) 피서법을 알았으니 더워서 죽을 것 같은 날(?)에는 가끔 이곳을 이용하기로 마음을 다지며 갔던 길을 되돌아왔다. 여전히 더워서 못 살 것 같은 집으로.

덧붙이는 글 | '2008 이 여름을 시원하게 응모' 돈 들여 피서 떠나는 것만 피서는 아닙니다. 올 여름에는 가까운 계곡에 가서 발 담그고 다슬기라도 잡으며 더위를 날리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부부의 너무 평범해서 특별한 피서법을 추천합니다.


태그:#만수계곡, #다슬기, #피서,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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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행복이라 믿는 하루가 또 찾아왔습니다.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엮으며 짓는 삶을 그분과 함께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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