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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곡쟁이 톨로키

- 글쓴이 : 자케스 음다

- 옮긴이 : 윤철희

- 펴낸곳 : 검둥소(2008.6.17.)

- 책값 : 1만 원

 

(1) 법이란 누가 누구한테

 

'국립공원'에는 함부로 찻길을 낼 수 없을 뿐더러 굴도 뚫어서는 안 됩니다. 국립공원 안쪽 자리에 집이 있는 분들은 집고치기도 거의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법에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도로공사와 개발업자와 산업자원부 공무원 분들께서는 법그물을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특별법을 만들고 어쩌고 하면서 '북한산 관통도로'를 뚫으려고 했습니다. 이런 서울시와 정부 정책에 맞서서 환경운동에 뜻을 둔 이들이 막아서려고 했고, 이렇게 막아서려던 이들을 정부는 고발로 맞받아쳤습니다.

 

법원에서는 정부 손을 들어 주며 어마어마한 벌금을 물리도록 했습니다. 가난한 환경운동 활동가들 몸과 입과 손을 꽁꽁 옥죄려는 짓이었지요.

 

2004년으로 떠올립니다. 그때 서울 종로 뒷골목 술집 한 곳에서는 '기금 모으는 하루술집'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들, 가난한 환경운동 활동가한테 내려진 벌금을 서로서로 조금씩 보태어 보자는 뜻으로 마련한 하루술집이었습니다. 술값을 아껴서 돈을 모으면 더 좋을 텐데, 그냥 돈을 내는 사람은 없고, 이렇게 술이라는 이음고리를 거쳐서 돈이 모아지게 됩니다. 어쩌면, 어차피 그리 벌금을 물어야 할 판이라면, 식 웃으면서 내주자는 마음으로, 속풀이도 하고 할 말도 다하는 자리로 술잔치를 마련하는 셈 아니냐 싶기도 합니다.

 

.. 노리아는 앞날이 두려웠다. 아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여유를 도대체 어떻게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수업료도 내야 할 것이고, 선생한테 구박받고 쫓겨나지 않으려면 교복 살 돈도 필요할 것이었다. 책도 사야 하고, 선생들이 항상 학부모에게 요구하는 학교 건축 기금도 내야 한다.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  (112쪽)

 

지난 대통령선거 때, 인천에서 애쓰는 시민단체 분들은 '대통령 후보자 비방'이라는 죄목에 따라 법원에서 벌금 조치를 받았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BBK와 한미FTA투쟁 집회'를 열고 있었음에도, 다른 어느 곳에서도 '명예훼손 고발'이라든지 무어니 없었는데, '꼭 한 놈만 잡아서 팬다'는 잣대(?)에 따라서 인천 쪽 시민단체 활동가한테 쇠몽둥이가 내려졌어요. 지난해까지 50만 원 남짓 받으며 일하던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올해는 60만 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한테 내려진 '후보자 비방 명예훼손 벌금'은 자그마치 1200만 원.

 

벌금을 내지 못하면 징역을 살면서 깎아나가야 하는데, 하루에 3만 원씩 쳐 준다고 하니, 400일입니다. 문득, 엊그제 '죄없음' 판결을 받은 큰 재벌 ㅇ 할아버지가 떠오릅니다. 그래도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에 벌금이 1100억 원이라던데. 1100억 벌금을 헤아린다면,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집회를 하다가 물게 된 벌금 1200만 원은 껌값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풋.

 

.. 톨로키와 노리아는 택시 승강장에 다다를 때까지 말없이 걸었다. 그녀의 눈은 젖어드는 눈물 때문에 흐릿했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잃어요. 톨로키 오빠, 아이들은 어머니들을 잃고요.” “죽음은 매일 우리랑 같이 살아. 정말이지 우리가 죽어 가는 방법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들이야. 아니,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들이 우리가 죽어 가는 방법들이라고 말해야 옳은 걸까?” ..  (131쪽)

 

그러고 보면, 저도 ㅈ일보 기자 명예를 더럽혔다는 죄목에 따라서 벌금 200만 원을 문 적이 있습니다. 올 2월에. 그분 이름을 더럽힌 대목에서는 참으로 죄송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삶터를 빼앗기고 사람된 권리와 인격을 송두리째 짓밟힌 분들한테는 어느 누가 '명예훼손죄'를 받거나 배상이나 보상을 해 주지요?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하는 할머님들한테는 누가 잘못했다고 말을 하거나 뉘우치거나 갚음을 하지요?

 

제가 살고 있는 동네를 놓고, 인천시장을 비롯해서 개발업자와 개발부서 공무원, 더욱이 문화 담당 공무원들마저도 '낙후된 도심지'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습니다. 하나도 둘도 셋도 아닌 수천 수만 사람이 깃들여 살고 있는 동네인데, 어느 누가 무슨 잣대로 함부로 '낙후'라느니 '지저분하다'라느니 '비위생'이라느니 하는 말을 뇌까릴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우리 동네가 '낙후'되었다 한다면, 우리 동네사람들이 여태껏 내 온 세금이 우리 동네를 북돋우는 데에 제대로 쓰인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니온지요? 우리 동네가 '지저분하다'면, 우리 동네를 좀더 깨끗이 다스리는 데에 우리 세금이 알맞게 쓰인 일이 없던 탓이 아니온지요? 우리 동네가 '비위생'이라 한다면, 우리 동네가 '위생'을 찾도록 시설과 문화와 복지에 찬찬히 마음을 기울여 본 적이 없는 정책에 책임이 있지 않은지요?

 

.. 정착촌에 있는 판잣집 중에 닫혀 있는 판잣집은 하나도 없었다. 훔쳐 갈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샤드락처럼 부유한 사람들만이 둥지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새들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도둑질을 하러 자기 집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닌지 항상 경계를 해야만 했다 ..  (198쪽)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이 나라에서 정치권력을 움켜쥔 분들께서는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도심지 달동네를 허물어 변두리로 내쫓았습니다. 1980년대로 접어들고 1990년대까지, 뒤이어 이 나라 정치힘을 휘두르는 분들께서는, '신도시'라는 이름으로 도심지 달동네에서 변두리로 내쫓긴 이들을 다시금 더 먼 바깥자리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를 맞이한 오늘날, 엎치락뒤치락 정권을 뺏고 빼앗긴 분들께서는 '뉴타운'이라는 이름으로, 또 한 번 사람들 삶터를 까뒤집으면서 돈없는 이들을 갈 곳 없는 떠돌이나 떨꺼둥이가 되도록 닦달하고 있습니다.

 

이름만 '새마을'에서 '신도시'를 거쳐 '뉴타운'이 되었을 뿐, 하나같이 '철거와 재개발'을 가리키는 다른 소리였을 뿐입니다. 또한 이 '철거와 재개발'은 돈있는 사람들 집터는 건드리지 않는 가운데, 돈없는 사람들 삶터를 깎아내려서 '그나마 낮은 집값'을 더 낮추어 내쫓은 다음 아파트를 세우며 집값을 껑충 올려서 서민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정책을 꾸려 갑니다.

 

 

(2) 발붙여 사는 곳은

 

자전거를 타고 이웃 동네 마실을 합니다. 저녁 여섯 시로 접어드는 때임에도 햇볕이 뜨겁습니다. 땀이 비오듯 흘러내립니다. 손등으로 땀을 훔치며 자전거를 몰아 언덕길을 오르다가, 자전거에서 내려 골목 계단을 사진으로 찍다가, 그늘자리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아주머니나 할머니나 할아버지한테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합니다. 동네 어르신들은 말없이 살짝 웃고 "그려 그려"하면서 인사를 받아 줍니다.

 

벌써 방학을 맞이했는지, 아니면 학교 끝난 뒤인지, 동네 아이들은 셋씩 넷씩, 또는 대여섯씩, 또는 둘이 짝을 이루어서 골목을 가득 채웁니다.

 

저는 창영동에 살고 아이들은 창영동과 맞닿은 이 송림동과 숭의3동과 금곡동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이웃한 동네임에도 모두들 자기 동네에서만 노닐 뿐 옆동네까지 가지는 않습니다. 어르신도 아이도 낯선 사진쟁이를 구경하면서 빤히 쳐다보고,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쑥스러워서 사진기를 차마 들지 못하고 우물쭈물 인사만 하며 지나갑니다.

 

.. 호상은 경찰이 쏜 총알이 벽에 맞고 튀어나오는 바람에 안마당에서 소꿉장난을 하고 있던 아이가 맞았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그런 경우를 많이 봐 왔다. 경찰이 쏜 총알은 타운십에 있는 집들 벽에만 맞으면 이상한 궤적을 그리며 튀어나왔고, 그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총알들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아이들을 향했다 … 그래서 (부모는) 경찰서로 갔지만 이런 말을 들었다. “아이들은 날마다 실종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들은 나가서 찾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거라는 말입니까?” “어디를 살피라는 거요? 이 아이들은 테러리스트 집단에 가담하려고 집에서 도망친 건데.” “그 애는 여섯 살밖에 안 됐어요.” “아주머니, 여섯 살짜리들이 우리한테 돌하고 화염병을 던져요.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당신네들이 좀더 규율 있게 자식 키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게 전부요.” 어린 사내아이의 시체는 초원 지대에서 발견됐다. 그 애는 거세되어 있었다 ..  (60쪽)

 

옆지기하고 함께 거닐었다면 좀더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걸었을까 생각하다가는, 아직 한두 번 낯익히기를 했을 뿐이니, 더 다니면서 인사를 하고 만나야 자연스레 말문이 트이지 않으랴 생각합니다. 어르신이나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걸며 동네 삶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곧 밀어닥칠 재개발 바람을 어떻게 맞이하며 앞으로 어떻게 삶을 꾸려 나가실는지 여쭙고 싶기도 하지만, 공무원이며 통반장이며 개발업자 사람들이며 기자들이며 또 사진 찍는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며 번거롭게들 하기에, 여기에 한몫 거들고 싶지 않습니다.

 

건너편으로 재능대학교가 보이고, 이 앞으로 골목집을 싹 쓸어낸 다음 아파트를 올려세우고 있는 공사터를 내다봅니다. 저곳 공사를 채 끝나지 않고 이곳까지 밀어내고 아파트를 짓는다고 하려나. 저렇게 높이 아파트를 올려세우면 아파트 수십만 채가 새로 지어지는 셈인데, 이 동네에 깃들일 수십만 사람이 있을까. 깃들일 사람이 있다손 치고, 그러면 비싼 분양값을 댈 만큼 주머니가 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골목골목마다 크고작은 가게를 차리고 저잣거리에서 좌판을 깔고 서로서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온통 아파트숲으로 바뀐 데에서는 무슨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아파트값만큼이나 비싼 상자나 쇼핑센터에 자리를 얻을 돈이 될까. 지금 이 골목에 깃들인 사람들은 돈있는 사람들 가정부나 밥어미로, 또는 운전수나 뒤치다꺼리 하는 사람으로, 골프장 심부름꾼이나 풀뽑는 사람으로, 대형마트 계산원이나 점원으로 일하는 자리에서 '봉사'만 해야 하나.

 

.. 경찰관이 호통을 쳤다. 남자는 도난당한 옥수수 자루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고 했다. 그러자 경찰관이 화를 내면서 그의 불알을 걷어찼다. 그러고는 그를 의자에 묶고, 그의 손가락과 목에 전선을 부착했다. 경찰관은 벽에 있는 콘센트에 이 전선들을 연결했고, 남자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면서 자기도 모르게 똥을 싸고 말았다. "그 농사꾼은 누구고, 그놈들이 묵고 있는 데는 어디야?" "솔직히, 나리, 저는 그 사람을 모릅니다." "네가 그놈한테 옥수수를 팔았잖아. 그러고도 그놈을 모른다고?" "저는 옥수수를 판 적이 없습니다, 나리." ..  (81쪽)

 

한참 골목을 거닐고 자전거로 달리면서 대문 안쪽에 퍽 우람하게 자란 대추나무를 봅니다. 대추나무는 가지를 집 바깥 골목 복판까지 드리웁니다. 푸르게 맺힌 열매가 보입니다. 한 달쯤? 두 달쯤? 얼마쯤 있으면 대추가 익으려나. 대추가 익을 무렵, 이 골목 사람들은 한두 알씩 맛을 볼 수 있으려나. 아무렴 나무임자 혼자서 다 따 버리지는 않을 테지.

 

뒷날, 이 동네를 죄 개발해야 한다고 하면, 이 대추나무도 베어내 버릴까. 얌전히 파내어 고이 옮겨심어 주려나. 파내어 옮겨심기까지 돈이 많이 든다며, '대추야 돈 주고 사먹으면 되지' 하면서 차갑게 꺾어버리려나.

 

.. 밤에는 부둣가나 기차역 벤치에서 잠을 잤다. 공중 화장실에서 몸을 씻었다. 그 시절에는 그와 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도시 해변에 들어가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때에는 요즘 그가 하는 것처럼 바닷가에서 몸을 씻을 수가 없었다 … 정부는 사람들에게 집을 주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대신 자격이 있음을 입증하는 서류를 갖춘 사람들은 도시에서 팔십 킬로미터도 더 떨어진 타운십으로 이사를 해야만 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팔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어떻게 일터에 올 수 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의 직장과 가까운 곳에는 사방에 땅이 있었다. 그 땅들은 모두 백인 주민들을 위한 개발 지역으로 계획된 곳이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자격을 입증하는 필수 서류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 존재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그들의 고향이라고 정해진 곳들로 그들을 돌려보내는 일에만 열심이었다 ..  (163∼164쪽)

 

우각재13길을 지나면서, 얕은 대문간 위로 촘촘히 박아 놓은 '깨진 병조각'을 봅니다. 대문간 바로 옆 담벽은 그리 높지 않은데, 여기에는 '깨진 병조각'을 심어 놓지 않았습니다. 도둑이 넘어오려 한다면, 대문간 위가 아닌 담벽을 타고 넘을 텐데, 이 동네에 뭘 훔치려고 찾아올 도둑이 있을까, 헤아려 보다가, 도둑은 많건 적건 돈만 볼 뿐, 이웃사람들 삶을 돌아보지 않지, 하는 생각이 뒤따릅니다.

 

도둑이 걱정스러워 집집마다 자물쇠를 단단히 채우고, 창문에도 쇠로 된 창살을 붙입니다. 새로 지은 아파트는 단추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고, 첨단경비장비에 경비원까지.

 

.. 보석으로 몸을 장식하고 있는 여자가 노리아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노리아는 조용히 듣고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멀리 떨어졌다. 그녀는 할 수 있는 말이 한 마디도 없다고 느꼈다. 지도자들은 그녀를 향해 얘기만 했지, 아들의 죽음에 대해 그녀하고 논의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당신들, 우리 존경스러운 지도자 분들께 빵하고 양배추를 대접한다는 게 말이나 돼?” “당신들은 우리가 뭘 대접해 주기를 바란 건데요?” “우리 지도자 분들께 어울리는 음식이지. 너무 게을러서 고기랑 감자랑 쌀은 요리를 못하겠던가? 샐러드 만드는 것도 못하겠고?”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먹는 음식들만 그들에게 줄 수 있어요. 그들은 우리가 겪는 가난을 두 눈으로 목격해야만 해요. 저녁으로 팝하고 물만 먹는 처지인 우리가 고기에 쌀을 먹고 사는 사람들인 척 꾸밀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요.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에게 잘 대접했어요. 평소에 우리는 빵도 못 먹잖아요.” ..  (237∼238쪽)

 

 어둑어둑해질 무렵, 자전거머리를 돌려 집으로 달립니다. 가는 길에 정보산업고등학교 뒷문 가에 자라는 해바라기 앞에 멈춰서 손짓으로 인사를 한 다음, 금곡슈퍼 앞에서 자라는 꽃들한테 눈짓으로 인사를 합니다.

 

 

 (3) 남아프리카와 <곡쟁이 톨로키>

 

집으로 돌아와 후다닥 씻고 빨래 담가 놓은 다음 시민모임 회의에 가려고 서두릅니다. 손가방에 책 하나 챙겨듭니다. 여러 사람이 부지런히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한귀로 이야기를 듣고, 눈으로는 책을 읽습니다. 이야기는 길어져서 두 시간을 넘깁니다. 뒤풀이 자리가 있어 소주 한 병 들이키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비누질을 해서 몸을 씻고 빨래 한 점을 한 다음, 책상맡에서 책 세 권을 집어서 잠자리에 놓습니다. 한 권 한 권 조금씩 펼치자니 졸음이 쏟아지고, 이내 잠듭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 읽던 책을 다시 들춥니다. 여러 해 앞서 사두고 읽다가 그만둔 책을 다시 펼치는데, 읽는 내내 물음표를 자꾸 찍습니다. 이런 철없는 책을 낸 출판사 일꾼들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며 무엇을 느끼기를 바랄까, 하는 생각이 잇따릅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사람들을 '야만인'처럼 여기는 이야기를 '뒤로 가면 글쓴이 스스로 자기가 철이 없었다고 깨달으며 달라지려나' 하고 생각하며 꾸역꾸역 읽는 저도 참 철이 없습니다.

 

내가 참 철없는 책에 돈을 쏟았군, 하고 생각해 보았자 어쩔 수 없는 노릇. 읽던 책을 덮고 다른 책을 집어서 펼칩니다. 삼백 해쯤 앞서 우리 나라 어느 지식인이 적바림한 글입니다. 양반집 사람이라 한문으로 쓴 글을 요샛말로 옮긴 책입니다. 훈민정음이 있던 때에 한문으로 글을 썼으니, 한문을 아는 사람한테 읽히려고, 또는 한문을 아는 뒷사람한테 물려주려고 썼겠지요. 이분은 뒷사람한테 어떤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서 이와 같은 글을 남겼나, 생각하면서 읽는데, 지루해서 하품이 나옵니다. 그때로서는 훌륭한 선비였다고 하지만, 그때로서 훌륭했던 분이라 해도 세월이 흐른 뒤까지도 우리가 훌륭함을 느끼기는 어렵기도 하군요.

 

.. 톨로키는 그들이 방문하는 모든 판잣집에서 여자들이 가만히 있는 경우는 결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들은 항상 손으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요리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아이들을 야단치고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물을 긷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 있었다. 판잣집 바닥과 땅을 쓸고 있었다. 마분지와 플라스틱으로 판잣집에 난 구멍을 막고 있었다. 빨래를 빨랫줄에 걸면서 이웃들과 시끌벅적하게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아니면 자기네 아이를 때린 아이들 때문에 이웃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또는 그들의 일자리인, 주인마님의 주방이 있는 도시행 택시를 잡기 위해 택시 승강장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항상 움직이고 있었다. 여자들은 끊임없이 몸을 놀리고 있었다. 반면 남자들은 시시하고 공허한 자존심으로 자신들의 머리를 흐리멍덩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 그러고 나서 밤이 되면 음식이 저절로 집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처럼 저녁이 차려져 있기를 바랐다. 아이들이 다 잠들었다는 믿음이 생기면, 남자들은 쾌락을 얻고 싶어했다 ..  (239∼240쪽)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났으나 고향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더는 발붙이지 못하고 미국으로 망명을 가야 했던 사람이 쓴 <곡쟁이 톨로키>를 읽어냅니다.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글쓴이는 고향나라로 돌아가고 싶을까. 고향나라에서는 자기처럼 떠나간 사람을 다시 불러 줄까. 지금 깃들여 사는 나라에서는 자유나 평화나 평등을 누릴 수 있을까. 고향나라에서 따돌림과 푸대접과 괴롭힘이 사라진다면 글쓴이는 고향나라로 돌아가고자 할까.

 

.. 캠프에 사는 사람들은 유대 관계가 돈독한 공동체다. 그들은 서로를 알았다. 한편, 그는 사람들이 ‘불법 거주자’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종종 물었다. “우리 땅, 우리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불법 거주자일 수 있는가? 바다를 가로질러 우리 땅을 빼앗은 자들이야말로 불법 거주자다.” ..  (62쪽)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에 따른 차별)'가 있었으나, 이 '아파르트헤이트'보다 무서운 것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돈, 힘, 무리.

 

돈은 마을사람 사이를 쪼개 놓을 뿐더러 같은 겨레나 식구나 동무를 갈라 놓습니다. 힘은 살갗 하얀 사람과 검은 사람 사이를 나눌 뿐 아니라, 살갗 같은 사람들끼리도 계급을 나누며 푸대접받는 이는 또다른 굴레를 뒤집어쓰게 합니다. 무리는 사랑이 아닌 욕심을, 나눔이 아닌 빼앗음을 불러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떨쳐낸다고 한들, 돈을 떨치지 못하고 힘을 떨치지 못하며, 무리를 떨치지 못한다면, 허울좋은 이름으로 '인종분리 차별'은 없다고 외칠 수 있을지 모르나, 사람들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 “나머지는 말이야, 노리아! 네폴로브호드웨가 제안한 대로 팔아 버려야 할까 봐. 마딤브하자의 하치장(고아원)에 돈을 줄 수 있게.” “그냥 여기 놔둬서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웃게 해 주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이것들 주위에 커다란 판잣집을 지어서 아이들이 마음에 내킬 때면 언제든 와서 웃을 수 있게 해 주는 거예요.” ..  (289∼290쪽)

 

나이든 분들은 으레 '한국이 배고픔에서 벗어난 데에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가 경제개발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만, 경제개발을 했다고 하더라도(참말 했는지 안 했는지 알 노릇은 없습니다만) 우리 스스로 사랑을 버리고 돈을 좇는다면, 나눔을 내팽개치고 힘을 바란다면, 믿음을 깔아뭉개고 무리를 따른다면, 한국 사회는 ‘먹고살기 팍팍하던 때’하고 조금도 달라질 대목이 없습니다.

 

 옷차림은 번듯해졌는지 모르나 옷값 대느라 쩔쩔매고, 반찬 가짓수가 늘었는지 모르나 밥값 대느라 힘겨우며, 넓고 시설 갖춘 아파트에 살는지 모르나 관리비에 학원비 버느라 등골이 휩니다. ‘좋아졌네 나아졌네’ 하지만, 끝없이 서로 겨루고 다투어 올라서야만 하는 노릇이라면, ‘나빠졌네 죽겠네’ 꼴입니다.

 

 희망? 꿈? 앞날? 아이들? 글쎄, 좋아서 그리도록 하지 못하고 입시미술만 있는데. 좋아서 글쓰도록 하지 못하고 입시논술만 있는데. 좋아서 가르치지 못하고 입시교육만 있는데. 쓸모가 있어서 배우지 못하고 입시영어만 있는데.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인데. 좋아서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아랫도리 흐뭇하려고 만나는 사람인데. 좋아서 마시는 술이 아니라 그저 퍼넣는 술인데.

 

 무엇이 사람이고 무엇이 삶이며 무엇이 목숨인지를 잊어버린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사람과 삶과 목숨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믿음이며 무엇이 나눔인지를 내팽개친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사랑과 믿음과 나눔을 물려주지 못합니다. 무엇이 착함이고 무엇이 아름다움이며 무엇이 맑음인지를 팔아치운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착함과 아름다움과 맑음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어른한테 배우고 물려받으며 보는 것이란, 오로지 돈벌기와 돈굴리기와 돈쓰기입니다. 계급과 차별과 겉치레를 낳는 돈만 배우고 물려받고 바라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곡쟁이 톨로키

자케스 음다 지음, 윤철희 옮김, 검둥소(2008)


태그:#문학책, #청소년문학, #소설책, #인종차별, #남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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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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