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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황량한 벌판 수준이었다.
▲ 2007년 4월 우리 땅의 일부. 거의 황량한 벌판 수준이었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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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농사꾼의 엉성한 밭을 찾은 친지들은 좋다는 말과 함께 진한 부러움을 표시한다. 그러나 그 중에는 나무를 심고 여러 작물을 가꾸는 일쯤이야 누구나 할 수 일인 것처럼 아주 쉽게 말하는 친구도 있다. 또 땅을 하나의 투기 상품으로 오해하여 구입 가격이나 얼마나 올랐느냐를 궁금해 하는 친구도 있음을 본다.

그런 친구에게 제2의 고향을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2만5천 분의 1 지도와 인터넷 지도를 통해 원하는 마을의 지형과 좌향을 가늠하고, 수차례 현장 답사했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오랫동안 수많은 중개사를 만나고, 생활정보지를 통해 매물을 기다렸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보다 자연과 더불어 살기 위해 얼마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편안한 정원을 만들겠다고 지난 1년 아내와 내가 흘린 땀의 무게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농촌 생활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첫째 필요한 것은 농촌을 이해하고 그곳에서 살겠다는 뜻을 확실하게 갖는 것이다. 둘째 농촌 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부부의 뜻이 맞아야 한다. 실제 내 주변에서 남편의 주장만으로 농촌으로 들어갔다가 도시형의 아내에게 끌려 나가는 경우를 봤기 때문이다.

부부가 확실하게 의기투합하여 농촌 생활을 결심했다면 그 다음은 땅을 구입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나름대로 아내와 내가 합의했던 땅 구입 원칙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광주에서 멀지 않은 곳을 선택한다. 도시 가까운 곳을 선택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아내와 나의 건강 때문이었다. 아픈 사람에게도 그렇지만 늙을수록 병원이 가까워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편의시설이 거의 없는 농촌에서 생활필수품을 구하는 것도 문제인데 너무 거리가 멀면 부담이 된다는 점도 고려했던 사항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광주를 중심으로 30분쯤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의 땅을 찾아 다녔다. 

둘째, 사람은 어울려 살아야 한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우리는 산속 깊은 곳에 절간 같은 집을 짓고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런 고독한 선택이 하나의 멋일 수 있다. 그러나 만약의 이웃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될 곤란한 경우를 고려해야 하고, 또 무서움을 느끼는 곳이 아니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마을 가까운 곳을 찾은 것이다.

현재 우리의 땅은 마을 가까운 곳에 있는데 마을 주민들과 교류를 통해 잔디밭을 매는 일뿐 아니라 농사일에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가끔 호박 깻잎 등을 한 움큼씩 나누어주는 주민들이 있어서 좋고, 무엇보다 아내가 혼자 일을 해도 무섭지 않다고 해서 우리의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을 한다. 조용하게 사는 것은 익명의 도시에서도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셋째, 기본적인 풍수지리를 참고한다. 전문적인 풍수에 의하지 않더라도 집은 남향으로 두르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배산임수의 기본 요건을 갖춘 남향받이의 땅을 고른 것이다. 그러나 배산임수의 남향받이의 땅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배산임수의 지형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집을 지을 수 있는 터는 남향에 가까운 곳으로 골라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넷째, 투자 효과도 고려한다. 내가 죽은 후에 우리 자식들이 계속 살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또 무슨 일로 땅을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땅이 팔리지 않아 애먹는 낭패를 막자는 취지였고, 기왕이면 구입했을 때보다 손해 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로 내가 아는 분은 퇴임 후 광주에서 좀 떨어진 조용한 곳에 넒은 땅을 잡아 집을 짓고 들어갔으나 그 분이 먼저 돌아가신 후 부인이 무섬증에 혼자 살 수 없어 팔려고 내놓았는데 쉽게 팔리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했던 사례를 본 적이 있어 나에게는 큰 교훈이었다.

다섯째, 면적은 1000평 정도로 한다. 아내와 내가 생계형 농부가 될 만큼 건강한 몸은 아니다. 때문에 전적으로 농사에 생계를 걸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채소만이라도 가꾸어 먹자는 게 아내와 나의 일치된 생각이었다. 그래서 전원주택지로서는 조금 넓은 땅을 원했다. 덕분에 우리는 장차 마당이 될 잔디밭을 조성하고도 절반의 땅에 갖가지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었다.

또 겨울에도 50여 평의 비닐하우스에 각종 채소를 심어 자급자족했을 뿐 아니라 가까운 친지들과 신선한 채소를 나눌 수 있었다. 이는 처음부터 친지들과 나누겠다며 많은 씨앗을 뿌린 아내의 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잔디가 푸르고 가운데 꽃길이 만들어져 다소 뜨락의 분위기가 풍긴다. 꽃길 너머 비닐 멀칭을 해 놓은 곳에 야콘과 고구마, 옥수수 등을 심었다.
▲ 2008년 4월의 우리 땅 잔디가 푸르고 가운데 꽃길이 만들어져 다소 뜨락의 분위기가 풍긴다. 꽃길 너머 비닐 멀칭을 해 놓은 곳에 야콘과 고구마, 옥수수 등을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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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어진 잔디밭에 백일홍이 어울어진다. 멀리 야콘과 옥수수가 시원하게 자라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2008년 7월 우리 땅의 일부 넓어진 잔디밭에 백일홍이 어울어진다. 멀리 야콘과 옥수수가 시원하게 자라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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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우리의 경제적인 여건, 땅의 모양, 마을의 풍광, 주택이 있는지 여부, 대중교통, 마을 인심, 토양과 수질 등을 살폈는데 자세한 내용은 더 쓰지 않겠다. 아무튼 입에 맞는 떡이 없듯 우리 입맛에 맞는 땅은 찾을 수 없었다. 현재의 땅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완전히 갖추었다고 보지 않는다. 그래도 원하는 기준과 조건의 70% 이상은 충족되었다고 보기에 매도인이 제시한 가격에서 한 푼도 깎지 않고 구입하였다.

아직 우리 땅은 이름이 없다. 전적으로 농사만 짓는 농장도 아니고, '타샤의 정원'처럼 아름다운 정원도 아니다. 그래서 이름 짓기가 어려운지 모른다. 아내의 세레명을 따서 '로사의 뜨락'으로 붙이자는 이야기도 했고, 항상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일하며 쉴 수 있는 뜨락이라는 뜻으로 '하심원(下心園)'이라고 붙일까도 이야기하는 중이다.

그리고 아직 집을 짓지 못하고 있다. 출퇴근하는 농부인 셈이다. 다행히 광주 집에서 약15km 정도의 거리(20여 분 소요)로 오가는 부담은 크지 않지만 아무래도 그곳에 가면 일에 쫓기는 경우가 많다. 빨리 집을 짓고 그곳에 거주하면 여러 가지로 편리할 줄 알지만 집이란 한 번 지으면 마음에 안 든다고 옮길 수도 없고, 고치기도 쉽지 않아 여러 가지 사항을 검토 중이다. 노년을 편하게 보낼 수 있는 집, 소박하면서 실속 있는 집을 지을 계획이지만 금년에는 어려울 것 같다. 평생 살아야 할 집이기에 좀 더 생각하여 결정할 작정이다.

현재 우리는 땅의 절반은 잔디와 꽃나무를 심고, 절반은 밭으로 이용하고 있다. 과일나무로는 대추와 자두 외에 아직 묘목 수준의 사과, 배, 감, 석류, 등이 있고 1년생 작물로는 야콘, 고구마, 옥수수, 고추, 가지 오이, 토마토, 토란, 콩, 미나리, 상추, 케일, 비트 등이 자라고 있다.

아내와 나는 날마다 돌아보며 나무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가지와 고추와 익은 강낭콩이며 뽕잎을 따기도 한다. 수확하는 일은 감동이다. 풀을 제대로 매주지 못했음에도 잘 자라서 생각할 수 없는 많은 열매를 주는 농작물에게 미안함을 갖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농작물이 저절로 자랐다는 말은 아니다. 퇴비를 주었고 가지와 고추의 가지치기, 오이 순따기, 호박잎 뜯기, 비닐하우스에 심어진 열무에 물주기, 가지와 고추, 오이, 토마토 따기…, 그중에서도 가을이 오기까지 우리가 끝없이 호미를 들어야 했던 김매기의 공도 있을 것이다. 또 이따금 예초기로 풀베기, 잔디 깎기는 또 쉬운 일인가!

요즘 뜨락에 가면 아내와 나는 옷을 쥐어짤 만큼 많은 땀을 흘린다. 그런 우리 주위를 돌며 살살 약을 올리는 모기와 각종 벌레들은 물리치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노력으로 인해 우리 식탁이 사계절 풍성해졌는데, 이 점은 농사를 짓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요, 보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내와 나의 건강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도 아내는 알 수 없는 병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이제 밤이면 잠도 잘 자고, 음식도 맛있게 먹는다.

고통도 많이 줄어들었다. 나 역시 4주에 한번 꼴로 검진을 했던 대학 병원에서 이제는  6주 혹은 8주 간격으로 오라고 했으니 많이 좋아졌다는 말일 것이다. 자연 속에서 일하며 흘린 땀과 자라는 나무와 꽃이 주는 감동과, 수확의 보람이 우리 병을 서서히 치유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따금 우리 땅에 놀러오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 중에는 '전원생활'을 공기 맑고 풍광 좋은 곳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조용하게 살면서 가끔 친구들을 불러 우아하게(?) '바베큐'를 즐기는 생활로 인식하고 그런 희망을 말하는 것을 듣는다.

이제 겨우 시작한 마당에 아는 것도 없지만, 아직도 우리 땅을 원하는 대로 만들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1년 남짓 경험과 평소 생각을 보태 아름다운 '전원생활'을 꿈꾸는 친구들에게 거듭 이야기하고 싶다.

우선 멋진 집부터 짓겠다는 생각보다 먼저 부부가 뜻을 모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알았으면 한다. 또 농촌의 실정을 정확하게 알고 자신의 목표를 분명하게 할 것도 강조한고 싶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땅을 구하는 일도 어렵지만 땅을 가꾸는 일이 더 어렵다는 사실도 알고 고생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점도 거듭 강조한다.

고생 없이 감동과 보람을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다. 한마디로 예초기를 맬 각오가 없으면 농촌 생활을 꿈꾸지 말라는 말이다. 요즘 농촌에는 일손이 부족해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야 "자기가 기른 농작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농부 없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자기가 기른 것이면 상추 한 잎이라도 아깝다는 생각을 하는 농부, 그래서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냥 주고 싶지 않는 농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고추 몇 개에도 감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몇 푼이나 되겠느냐"며 저울질하는 듯한 눈치를 보일 때는 들고 가는 사람의 등 뒤에서 후회했던 내 경험도 덧붙이고 싶다.

오늘은 제헌절, 오전에는 어제 깎다가 그만 둔 잔디를 깎고, 오후에 조금 시원한 틈을 타 예초기로 풀을 벨 작정이다.

덧붙이는 글 | 나도 농사일에 익숙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귀향을 준비했고 무엇보다 농사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이 조금 달랐다고 생각한다. 관심있는 분들이 참고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천한 내 경험을 적어본다. 사진은 변화과정을 참고하라는 의미에서 실었다.



태그:#전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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