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믿기지 않는 사실이지만 김문수를 보기 전까지, 조순호가 관심을 가져 본 남자는 전혀 없었다. 그녀는 좀처럼 남자에게 후한 점수를 주는 일이 없었다. 이성적인 관심은커녕 인간적으로라도 괜찮게 보이는 사람이 그녀에게는 여태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가끔 그녀의 어머니가 괜찮은 남자라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 그녀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한 번 그녀의 어머니가 아주 훌륭한 남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는 더욱더 동감할 수 없었다. 요컨대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는 남자를 파악하는 관점이 정반대였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지만 조금만 분석해 보면 간단한 이치이기도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세속적인 기준으로 남자를 평가했고 그녀는 그렇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매우 고지식한 데가 있었다. 그녀는 자기의 부모나 주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왜냐 하면 그것은 나쁜 것이라고 교육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에게, 사람은 착한 게 제일이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그녀의 부모가 기독교 신자여서가 아니었다. 세상 대부분의 부모는 그렇게 자식에게 말하는 법이다.

돈과 학벌을 싫어하는 여자

그녀의 부모는 그녀에게 사람의 재산이나 학벌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대지주인 그녀의 할아버지는 돈이란 나쁜 것이니 빨리 써서 없애야 된다는 말을 간혹 하고는 했다. 실제로 그녀의 할아버지는 적지 않은 돈을 독립운동에 보태기도 했다.

대체로 그럴 경우 아이는 자라나면서 ‘부모가 말로만 그러는 것이지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느 정도 깨우치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그녀는 고지식해서 성년이 되도록 그런 생각을 전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돈 많은 남자를 하찮게 알기 시작했고 학벌 좋은 남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그런 남자가 자신의 재력이나 학력을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과시하는 꼴을 보면 가차 없이 그 남자를 우습게 알아 버렸다.

다음으로 그녀는 두뇌가 우수했다. 그리고 용모도 어느 여자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수려하고 기품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두뇌나 용모가 다른 사람보다 별로 나을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유 없이 그녀를 칭찬하는 남자를 실없는 사람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그녀는 이성적 매력은커녕 인간적 호감을 가질 만한 남자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유머를 최고 가치로 치는 여자

물론 그것은 그녀 환경의 특수성에도 이유가 있었다. 그녀 주변에 있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돈 많고 학벌이 높았다. 그리고 대부분이 기독교도인 개화한 사람들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그들은 필요 이상으로 경건했고, 쓸데없이 진지해 보였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재미난 것을 보고 웃기를 아주 좋아했는데 기독교 신자 가운데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가 웃었다는 기록을 그녀는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날 이런 말을 노트에 낙서해 본 적도 있었다.

  -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유머러스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그녀의 낙서를 우연히 보게 된 할아버지는 대단히 근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쟈가 뭣 될라고 그런다냐?”

아마도 할아버지는 이런 말을 그녀의 어머니에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에게는 무자비한 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우습지도 않는 말을 우스운 듯이 하는 남자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돈 많은 남자거나 학벌 좋은 남자거나 독실한 신자인 남자를 좋게 볼 리가 없었다. 그녀에게 최악인 남자는 위 셋을 두루 갖춘 경우였는데, 불행히도 그녀 집안 주변 남자의 과반수가 이에 해당했다. 급기야 그녀는 시골 청년을 선망했고, 가난하면 더 좋아 보였고, 외모가 순박해야 했고, 유머러스하면 최상이라고 여겨오던 터였는데, 그녀는 아마도 김문수를 처음 본 날 그런 인상을 확실히 받은 것 같았다.

나민혜가 와서 김문수 집이 부자라고 했을 때 실망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러고는 시골 부자라야 별게 아니라고 말했던 할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 다음부터 그녀는 김문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시골 부자입네 하고 나민혜와 어울려 돈을 쓰고 다니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녀는 김문수를 만나는 나민혜가 부럽기도 했다. 그녀는 김문수가 나민혜 같은 타입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들은 어울리는 커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그녀는 김문수를 좋게 해석했다. 순박하기 때문에 아직 여자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해 버린 것이다.

조순호에게 날아간 김문수의 편지

이런 김문수로부터 편지 한 장이 날아들었다. 한 번 뵙고 싶다는 것이었다. 조순호는 즉각 전화했다.

“여보세요. 문화부 김문수 기자 좀 부탁합니다.”
“부탁할 필요 없습니다. 바로 저니까요.”

그들은 해질 무렵 조선호텔 커피숍에서 좀 서먹서먹하게 만났다.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간에 있는 나민혜 때문이었다. 그들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것과, 그들이 나민혜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 사이에는 일정한 간극이 있었다.

특히 조순호는 갑자기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는 김문수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민혜의 말대로라면 그는 자신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다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김문수는 그렇지 않았다. 조순호가 자기에게 전화를 해 주고 선뜻 만나 준 것만으로도 황홀한 일이라고 여겼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분위기는 차츰 자연스러워졌다. 김문수의 유머가 조순호의 굳은 마음을 열리게 한 것이었다.

“유학 준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저는 추운 지방을 좋아해요. 그래서 북해도에 있는 학교로 가려고 합니다.”

조순호는 삿포로에 있는 훗카이도 국립대학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그녀는 의학을 전공한다고 했다.

“저는 신문사를 그만 두었습니다.”
“어머, 아까 전화 받으셨잖아요.”
“한 시간 전에 그만 두었거든요. 순호씨의 전화를 받고 그만 두려고 사표 제출을 늦추고 있었지요. 요사이 며칠 동안 하루에 100번 정도는 전화통을 보았습니다.”
“왜죠?”
“왜냐고요? 조순호씨 전화 기다리느라고 그랬지요.”

순간 조순호의 표정이 물살처럼 흔들렸다.

그들은 함께 남산에 올라가 달을 보기로 했다. 남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다. 그들은 진달래 가로수 길과 노송 사이를 걸어 올랐다. 저녁 사양(斜陽)이 나뭇가지 그림자를 길에 끌어다 가지가지 도형 무늬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들은 꼭대기에 올라 해가 떨어지고 있는 식민지의 수도를 조망했다. 그날은 보름이었다. 달이 오르자 정자 안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느 새 두 사람의 얼굴도 달빛으로 환해져 있었다. 달은 정자 속까지를 환하게 만들었다. 달은 식민지의 도시를 비추며 빌딩들을 감싸고 있었다.

“급월(汲月)이란 말이 있습니다.”

조순호는 물끄러미 김문수의 얼굴을 보았다.

“달을 길어 올린다는 뜻인데, 술 취한 시인이 배를 타고 강심에 가서 물 위에 있는 달을 즐기는 것이지요.”
“위험하겠군요.”
“맞습니다. 이백이 그러다가 죽었습니다.”

남산에서 거의 내려왔을 때 김문수는 목이 말랐다. 그는 차가운 탁주 생각이 났다.

조순호는 선술집 의자에 앉더니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한테 혼나니까 저는 안 마실래요.”
“냉수라도 드시지요.”

조순호는 갑자기 근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신문사는 왜 그만 두셨는지 물어도 되나요?”
“하하. 방금 물으셨잖아요.”(계속)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쓰는 소설입니다.



태그:#조순호, #급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