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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정문이다. 창경궁에도 홍화문이라는 정문이 있었으나 동궐이라는 개념아래 돈화문을 법궁의 정문으로 사용했다.
▲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이다. 창경궁에도 홍화문이라는 정문이 있었으나 동궐이라는 개념아래 돈화문을 법궁의 정문으로 사용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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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도가 세자의 출발을 독촉했다. 인조는 연접도감(延接都監) 관반을 보내어 날짜를 늦추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오목도와 친분이 있는 승지 박노를 보내어 통사정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목도의 의지를 확인한 조정은 세자의 출발을 서둘렀다. 황제에게 바칠 예물로 은 천냥을 마련하고 소현은 종묘에 하직을 고했다. 우의정 강석기가 면대를 청했다.

"신은 몸이 연로하여 멀지 않아 죽을 것입니다. 세자께서 다시 돌아오는 경사가 있다 하더라도 신이 다시 세자의 모습을 보는 것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신이 내일 세자를 모시고 가 벽제에서 지송해야 됩니다만 전하께서 은혜를 내려 저로 하여금 미리 파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그러면 이틀간 배행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할 것입니다."
"그리하시오."

강석기는 강빈의 아버지이며 소현의 장인이다. 소현이 왕위에 올라 임금이 되면 국구가 될 사람이다. 공적으로는 저하의 신하였지만 사적으로는 끈끈한 정이 흘렀다. 준비를 마친 세자가 양화당을 찾았다.

"아바마마!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세자는 근본을 잃지 말고 몸을 세우도록 하라."
"명심하겠습니다."

근본을 잃지 말라는 부왕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비록 세자이긴 하지만 볼모의 몸으로 얼마만큼 체신을 지키라 하시느냐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인조는 세자의 입장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세자 역시 전쟁에 패한 군주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간극이었다. 하직 인사를 마친 소현이 돈화문을 빠져 나와 무악재를 넘었다.

벽제관 터에 건물은 없고 주춧돌만 남아있다.
▲ 벽제관지. 벽제관 터에 건물은 없고 주춧돌만 남아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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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관에서 하룻밤을 묵은 소현은 혜음령을 넘어 북행길에 올랐다. 임진강을 건너고 대동강을 건넜다. 세자 일행이 정주를 지나 용천에 이르렀을 때 행차를 따라붙는 의문의 사나이가 있었다. 머리는 산발했고 행색은 남루했다. 괴나리봇짐도 없었고 여벌로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짚신도 없었다. 그냥 몸뚱이 하나였다.

"임금은 쥐새끼!"

세자 행렬과 일정 간격을 두고 뒤따르던 사나이는 혼자 흥얼거렸다. 악다구니도 아니었고 고함소리도 아니었다. 혼잣말처럼 지껄이는 소리였지만 높낮이가 있었고 음절이 있었다.

"임금은 쥐새끼 같은 새끼. 저 혼자 살려고 산성에 들어가 갔다 백성이 다 죽은 다음에 오랑캐에게 목숨을 구걸하여 살아남은 놈. 죽어도 싼 놈이 살아남아서 백성들의 가슴에 염장질이나 하고 있으니 나원 참, 귀신은 뭐하는겨? 그런 놈은 안 잡아가고..."

간덩이가 부은 사나이, 세자 앞에서 건방을 떨다

간덩이가 부었다. 임금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임금에 대한 험담이 도를 넘었다. 임금님은 나랏님이다. 나랏님을 능멸하면 당장에 처단감이다. 배짱이 좋은 건지 뭔가 덜 떨어진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 사나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하늘을 보고 웃다가 행렬이 멀어지면 뛰어서 따라 붙었다.

의주에 도착한 세자가 의주관에 들었다. 이제 압록강을 건너면 청나라 땅이다. 청나라에 들어가면 제약이 심하다. 그래도 내 나라에 있을 때 휴식을 취하고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사흘을 묵기로 일정을 잡았다. 의주관을 배회하던 의문의 사나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세자는 뭐 하러 압록강을 건너려 하느냐? 여기에 있다 애비가 죽으면 왕이나 해쳐먹으면 돼지."

익위사 군관의 보고를 받은 소현은 그 사나이를 당장 잡아들이라 명했다. 의주부윤 황윤후가 사나이를 오랏줄에 묶어 대령했다.

"뭐하는 놈이냐?"
"나요?"

눈을 치뜨고 되묻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임금과 세자의 하문에 되묻는 것은 불경죄다. 당장에 물고를 낼 수 있는 죄목이다. 관아 마당에 무릎 꿇린 사나이가 소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사나이의 눈초리에서 광기가 번득였다.

"나 밥 먹고 똥 싸는 놈인데 먹을 밥이 없어 굶었수다."

사나이가 이죽거렸다. 그 사나이를 응시하던 소현이 긴장의 끈을 놓았다. 정상이 아닌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예사롭지 않은 사나이를 직접 신문하다

"예가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느냐?"

곁에 있던 의주부윤이 눈알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부윤은 진정하시오. 내가 직접 신문하겠소."
"이놈은 무엄하게도 전하와 저하를 능멸한 놈입니다. 신문할 것 없이 의금부로 압송하여 능지처참에 처해야 마땅할 줄 아뢰옵니다."
"알았소. 압송할 때 하드래도 내가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으니 부윤은 잠자코 있으시오."

황윤후의 객기를 차단한 소현이 사나이를 지긋이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디에 사느냐?"
"장동에 사는데 건 왜 묻소?"

장동이라면 한양에서도 권문세족들이 몰려 사는 동네다. 강화에서 순절한 김상용이 그곳의 터줏대감이었고 영의정 강석기 역시 장동에 살고 있다.

"장동에서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느냐?"
"세자가 곧 압록강을 건너 심양으로 간다는 소문이 있기에 세자를 만나러 왔소."

"내가 세자다. 세자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느냐? 어서 말해 보거라."
"에잇, 쓸데없는 소리 마슈. 세자는 댁네같이 생기지 않았단 말이오. 세상이 난리통이니까 왠 별놈이 사기를 다쳐. 에잇 재수 없어. 퇴퇴퇴."

사나이가 침을 뱉었다. 소현은 어이가 없었으나 그 사나이의 가슴속에 무슨 사연이 있는 것만 같았다. 소현은 그것이 알고 싶었다.

경희궁의 정전이다. 여기에서 소현세자와 강빈의 가례가 올려졌다.
▲ 숭정전. 경희궁의 정전이다. 여기에서 소현세자와 강빈의 가례가 올려졌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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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세자를 본 일이 있느냐?"
"있다 말구. 네놈 같은 주제는 하늘이 두 쪽 나도 세자를 볼일이 없겠지만 나는 봤다."

사나이가 의기앙양하게 어깨를 펴며 소현을 멸시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어디서 보았느냐?"
"세자가 강승지의 딸에게 장가가던 날 경희궁에서 보았다. 어쩔래?"

사나이는 오라에 묶인 가슴을 우쭐하며 으시댔다. 소현은 가슴이 뜨끔했다. 경희궁 숭전전에서 올렸던 가례를 목격했던 놈이라면 예삿놈이 아니다. 소현은 점점 궁금해졌다.

"좋다. 네 말대로 내가 세자가 아니라고 치자. 그럼 세자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랬느냐?"
"내 마누라가 심양에 잡혀가 있다. 그 마누라를 찾아오기 위하여 날 심양까지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단 말이다."

말을 마친 사나이가 꺼억꺼억 목을 놓아 울었다. 그 사나이를 바라보는 소현의 가슴이 싸했다. 사나이를 하옥하라 명한 소현은 침소로 돌아와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그 시각, 의주부윤 황윤후는 전하와 저하를 능멸한 자를 체포했으니 효시를 윤허해 달라는 장계를 올렸다. 거의 같은 시각, 잠을 이루지 못한 소현이 익위사 군관 이세용을 은밀히 불렀다.

"내가 아무 소리 안하고 있으면 저 사나이는 죽게 된다. 이 서찰을 전하께 급히 전하라."

범인을 직접 신문한 결과 실성한 사람으로 판명되었으니 용서해 달라는 소현의 친서를 휴대한 급주마가 의주를 출발했다.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내걸어라'는 왕명이 떨어진 다음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허사다. 말은 달림 본능이 있지만 지구력이 약하다. 의주부윤이 보낸 전령은 매 백리마다 있는 역참에서 말을 갈아 탈 수 있다. 허나, 세자가 보낸 군관은 밀사이기 때문에 역마 징발권이 없다. 천리 길 의주대로에 때 아닌 말들의 경주가 붙었다.


태그:#소현세자, #오목도, #의주, #벽제관, #혜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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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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