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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그리움처럼 생각나는 게 있다. 바로 부침개다. 비 오는 날, 고전적인 즐거움이 되어버린 '부침개 먹으면서 배 깔고 엎드려 책보기'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나이 서른이 되어도 비오는 날 이것 이상 가는 취미를 발견하지 못한 건 내 취미가 그만큼 궁색하다는 소리일까. 아니면 그만한 즐거움에는 다 이유가 있어서일까. 어쨌든 어린 시절, 비오는 날 엄마가 해주던 부침개를 먹으며 아무 걱정 없이 빈둥거리며 책을 보며 깔깔거렸던 그 시절이 그리워서 부침개가 더 생각나는 지도 모르겠다.

'처치 곤란' 채소들, 전부 부침개 속으로!

뜨거운 열기 앞에서 부침개를 부친 뒤 시원한 맥주와 함께 먹으면 더 맛있다.
 뜨거운 열기 앞에서 부침개를 부친 뒤 시원한 맥주와 함께 먹으면 더 맛있다.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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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여름날 비릿한 흙냄새, 비 냄새가 집안에 번질 때면 우리 집 부엌에서도 기름 냄새가 났다. 어린 시절, 엄마는 비가 올 줄 알고 부침개 재료를 미리 장을 보아두셨던 것일까. 그러나 부침개에 들어간 재료라야 별게 없었다. 기껏해야 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채소들이었다. 별 대단한 재료가 들어간 것도 아닌데 금방 만든 부침개를 먹으면 참 행복했다. 왜 그때는 그렇게 맛이 있었을까.

우리 가요 '빈대떡 신사'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먹지", 언젠가 누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왜 돈이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는 건데? 그러자 대답이 이랬다.

"돈이 없으니까 요리 집에 갈 수가 있나. 그래서 그냥 집에 가서 있는 재료 없는 재료 긁어모아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자는 거지."

아, 그랬구나. 빈대떡은 아니지만 채소 부침개를 부치면서 빈대떡 신사의 한 구절을 흥얼거려본다. 그리고 그 노래구절의 자못 심오한(?) 뜻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 비오는 날 부침개가 심하게 당겨서 냉장고를 열어보았더니 마땅한 부침개 재료가 없었다. 샅샅이 뒤져보니 마침 요리에 쓰고 남은 부추, 양파, 당근, 호박, 풋고추 등 야채들이 자잘하게 남아있었다.

'부추가 좀 부족한데 좀 더 사올까, 아니면 오징어를 한 마리 사서 아예 해물파전을 부쳐? 아니면 장을 봐서 좀 다른 야채들을 보충할까?'

야채들을 전부 펼쳐놓고 궁리를 한다.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그 사이에 모처럼 찾아든 부침개의 흥이 깨질까봐 그냥 있는 채소들을 모두 모아 부침개를 부쳐 보기로 하고 서둘러 반죽을 만들기 시작한다.

비오는 날의 부침개, 이보다 더 맛있을 순 없다

부추가 좀 부족한 자리는 호박이 좀 채워주면 되고, 이것으로 좀 밋밋하다면 칼칼한 고추가 대신할 것이다. 색깔이 너무 단조로운가? 그렇다면 당근이 좀 도와주겠지. 여기에 불 조절을 잘 해서 노릇노릇한 색깔까지 연출된다면 뭐 바랄 것이 없겠다.

부침개는 이렇게 자잘하게 남은 채소들을 모아서 만들어먹을 때 더 맛있다. 찌개에 넣기는 좀 부족하고, 나물을 하기도 좀 애매했던 존재들이 부침개의 엄연한 구성원으로 다시 태어날 때 더욱 빛나고 값져 보인다. 그래서 부침개는 일부러 장을 보아서 만들기보다는 가끔은 이렇게 즉석에서 있는 재료로 만들어 먹을 때 더욱 맛있다.

돈이 없을 때에도 집에서 간단히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 그래서 난 부침개가 좋다. 너무 거창하게 많은 재료가 들어가거나 너무 값비싼 재료가 들어간 부침개는 왠지 상상이 안 된다. 부담스럽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누구나 부쳐 먹을 수 있는 부침개야말로 '부침개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싶다.

여담 한마디 더. 부침개의 성공은 바로 반죽의 성패에 달려있다. 반죽이 너무 묽어서도, 너무 되어도 곤란하다. 내 경험에 의하면 국자로 떴을 때 반죽이 떨어질듯 말듯 뜸을 들이다가 마침내 톡 떨어지는 상태가 되어야 성공한다. 반죽이 성공하면 그 부침개는 반은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 삶에도 이런 적당한 반죽이 필요하다. 너무 빡빡하거나 너무 묽어서도 안 되는. 지난 한 주, 빡빡한 폭염 때문에 시들었다면 오늘같이 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은 부침개로 흥취를 한번 돋구어본다. 부침개로 인해 오늘, 조금은 더 찰진 하루가 된다.


태그:#부침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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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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