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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되기 전 숭례문 모습이다. 청나라 군사가 양철평에 이르렀다는 급보를 받은 인조는 숭례문 누각에 올라 강화로 갈까 망설이다 길이 막혔다는 소식을 듣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 숭례문. 소실되기 전 숭례문 모습이다. 청나라 군사가 양철평에 이르렀다는 급보를 받은 인조는 숭례문 누각에 올라 강화로 갈까 망설이다 길이 막혔다는 소식을 듣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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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에 들어온 사신단의 일정은 공개되지 않았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예상하지 못한 요구를 불쑥불쑥 내밀었다. 얼마 전, 삼전도 비를 파손한 사건 있었다. 일종의 반청시위다. 비석을 파괴한 경상도 유생을 잡아들이고 급히 수리를 마쳤으나 그 소문이 심양까지 날아 갔을까봐 조정은 전전긍긍했다. 또한 사신이 도성에 들어와 있는 이때에 또 다른 훼손 사건이 터질까봐 군사를 풀어 비각을 지켰다.

백악산 등정을 취소한 오목도가 남별궁을 나섰다. 한강에 나아가 뱃놀이를 즐기기 위하여 나선 것이다. 숭례문을 빠져나온 오목도가 누각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문이 무슨 문이오?"
"숭례문이라 하며 도성의 남문입니다."

"우리가 양철평에 들이닥쳤을 때 국왕이 누각에 올라 우왕좌왕했다는 그 문이오?"
"그렇습니다."

"햐, 그렇다면 우리가 김포로 빠지지 않고 곧바로 이리로 왔다면 국왕을 사로잡았을 수 있었겠구만."

오목도가 아쉽다는 듯이 군침을 삼켰다. 조선 원정군 선봉에 섰던 그는 박석고개 넘어 양철평에서 진로를 놓고 고심했다. 도성으로 즉각 공격할 것인가? 정묘호란과 같은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김포로 진격할 것인가? 그는 후자를 택했다. 왕이 강화도에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기 위하여 양화진을 건너 김포에 진을 쳤다. 그것이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자기반성이다.

"그 때 잡혔으면 우리도 고생하지 않고 조선 백성들도 상하지 않았을 텐데 뭘 믿고 산성에 들어 갔누?"

 한강에서 바라본 삼각산.
▲ 한강. 한강에서 바라본 삼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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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오목도가 청파역을 지나 용산강에서 배에 올랐다. 만초천 하구를 빠져나온 배가 중지도를 지나 노들에 닻을 내렸다. 쌀쌀한 강바람이 상큼하다. 사신단 일행이 모두 뱃놀이에 나섰으니 한 두 척이 아니다. 노들강변이 조개껍질을 엎어놓은 듯 유선으로 뒤덮였다.

"한강에서 바라보는 삼각산은 언제 보아도 명산이단 말이야."

오목도가 감탄을 연발했다. 삼전도에서 뗏목을 타고 철수할 때 각인된 바로 그 모습이었다. 심양은 산이 없다. 끝없이 펼쳐진 평지에 요하와 혼하가 있을 뿐이다. 그러한 심양인에게 삼각산은 수려한 명산으로 보였다.

"삼각산이 한성만 끼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센 여자를 품고 있다는 걸 어젯밤 처음 알았소. 쇠라도 녹일 듯했소. 우리 청나라에는 그런 여자 없다 해. 크크크."

비파소리와 함께 몇 잔의 술을 들이 킨 오목도가 흥에 겨워 넋두리를 풀어놨다.

"오늘밤에도 그 여자를 넣어드릴까요?"
"에혀! 무신 말씀을… 무섭다. 무서버. 캬캬캬."

한강의 명품, 삼배탕을 아시나요?

"그러시다면 여기에서 삼배탕을 올려드릴갑쇼?"
시중을 들던 반관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넌지시 던졌다.

"삼배탕이 무었이오?"
"배 위에서 배를 타고 배를 깎아먹는 한강의 명품입죠."

"달콤하면서도 사각사각한 조선의 명물 배(梨)는 알겠소만 배위에서 배를 탄다는 소리는 도무지 모르겠소."
"에이 장군님도 내숭은. 귀 좀 잠깐 빌려주세요."

오목도의 귀에 반관이 입을 대고 소곤거렸다. 그리고 오목도가 손사레를 치며 파안대소했다. 강 놀이와 강 문화가 별로 없던 여진족에게 선상유희는 호기심 만빵이었지만 선상 성희(性戱)는 생소했다. 뱃놀이를 마치고 돌아온 오목도에게 조정에서 보내온 예물 목록이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적나? 황제의 칙사를 이렇게 대접해도 되는 것이냐?"
예물 명단을 살펴본 오목도가 벌컥 화를 냈다. 세자의 환국 길 호위대장을 명받았지만 스스로 자칭 칙사다.

"나라 형편이 좋지 않아 조금 줄어들었습니다."
"듣기 싫다."
궁으로 돌아온 승지의 보고를 받은 조정은 비상이 걸렸다. 사신을 화나게 했으니 황제에 대한 불경으로 비칠까 전전긍긍했다. 비국에서 대안을 내놓았다.

"돌아가는 서로(西路)에서 물건을 더 보충해준다 하고 사죄의 뜻을 표해야 할 것입니다."
"준급해 주면 되지 무슨 사죄냐? 사죄할 필요 없다."
조정의 뜻을 전달받은 오목도는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며 관반 이명을 보냈다.

압박하면 다 나온다

"세자는 떠날 준비를 하시오."

전가의보도다. 세자가 들어온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재촉이다. 조사하면 다 나오듯이 조선을 압박하면 다 나온다고 청나라는 믿고 있었다. 이명을 돌려보낸 인조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사신에 대한 대접이 소홀하여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경들이 잘못 주선하였으니 그 잘못을 면하기 어렵다. 영상이 오목도를 만나보도록 하라."
홍서봉이 남별궁을 찾았다.

"고정하시옵소서."
"날더러 지금 고정이라 했소? 영상은 지금 누구 때문에 영의정 자리에 오른 것을 몰라서 그 따위 말을 하는 거요?"

"압니다. 황은이 망극할 따름입니다. 또한 오장군의 덕이라 생각합니다."
"알고 있는 사람이 날더러 이해하란 말이오? 일없소. 난 빈손으로 가리다."

오목도가 홍서봉의 면전에서 예물명단을 내던졌다. 홍서봉은 최명길의 후임으로 발탁된 조선의 영의정이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홍서봉이 궁으로 돌아갔다. 영의정이 면박을 당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한 소현은 긴급 구수회의를 소집했다.

 남별궁터에 원구단이 지어졌고 현재는 조선호텔이 있다.
▲ 남별궁. 남별궁터에 원구단이 지어졌고 현재는 조선호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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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목도를 만나봐야 될 것 같소."
"아니 되옵니다. 저하! 세자의 신분으로 찾아간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 하옵니다."

"오목도는 나와 함께 왔지만 우리나라에 온 손님입니다. 손님을 세자가 접대하는 것이 무에 잘못이라 하오?"

"우리가 심양을 떠나올 때 예부상서 범문정은 3개월 말미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자 재촉하는 것은 몽니이며 월권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만나보자 하는 것이오."

소현은 솔직한 심정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자신이 돌아가야 나이 어린 석철이 되돌아  온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돌아가서 석철을 귀국시키고 싶었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나라가 망했고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나이 어린 석철이 심양에 있다는 것이 마음 아팠다.

창살 없는 감옥 같은 세자의 동궁생활

환국 후, 소현은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나날이었다. 부왕을 한 번 뵈었고 종묘에 배알 한 것 이외에는 두문불출이었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였다. 오목도가 익위사 군관을 폐하고 청나라 군사를 동궁에 배치했다. 출입자를 철저히 통제했고 빈객 이외는 접견을 금지했다. 심양 세자관 생활보다 더 부자유스러웠다. 이튿날, 세자가 일행을 이끌고 남별궁을 찾았다.

"오장군 덕분에 고국에 돌아와 편안하게 보내고 있소. 고맙소이다."
"세자는 편 할런지 모르지만 나는 불편하오. 빨리 돌아가야 하니 세자는 채비를 갖추도록 하시오."

"어마마마의 상중에 조국을 떠났다가 이제 돌아와 종묘에 전알을 드렸을 뿐입니다. 이제 떠나게 되면 재기(再期)와 상제(祥祭), 담제(禫祭)를 모두 이국땅에서 지내게 되니 숙녕전에서 정례(情禮)를 지내고 떠나도록 해주십시오."

듣고 있던 오목도가 어지러워졌다. 무슨 제(祭)가 그리도 많은지 아리송했지만 부모님에 대한 정성이라 하니 수긍이 갔다. 인열왕후 상중에 청나라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심양에 있는 동안 어마마마에 대한 불효가 항상 마음에 걸렸다. 소현세자의 효심에 오목도가 많이 누그러졌다.

"고국에 돌아오도록 도와주신 오장군의 은공을 갚기 위하여 조선의 특산물로 잔치를 베풀어 드리려고 주부(廚夫)를 데리고 왔소이다."

남병궁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주관자는 세자다. 세자가 청나라 사신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것이다. 온갖 산해진미가 동원되었다. 소현이 베푼 잔치는 아부성 잔치도 아니었고 사례성 잔치도 아니었다. 오목도는 심양에 돌아가면 원하던 원치 않던 자주 부딪혀야 하는 인물이다. 꼬인 실타래를 풀기 위한 투자라 생각했다.


태그:#한강, #삼배탕, #숭례문, #남별궁, #소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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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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