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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23일 자 <조선><중앙><동아> 1면 머리기사
 23일 자 <조선><중앙><동아> 1면 머리기사
ⓒ 조선 중앙 동아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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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법 위에 시위대"
<중앙일보> "'주말 촛불' 다시 폭력으로 변질"
<동아일보> "'주말 촛불' 격렬 시위"

제목으로 모든 걸 말해준다. 23일 자 <조중동> 1면 머리기사와 사진 설명에 붙은 것들이다. 망치 든 시민(중앙), 파손된 경찰버스(동아), 경찰버스 위에 오른 시민들(조선)의 컬러사진도 1면에 크게 실렸다. 마치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국가 소요사태라도 발생한 듯하다.

시민들의 광고주 압박운동으로 지면을 축소 발행한 '굴욕'에 대한 앙갚음일까, 아니면 잠시 '보류'해 두었던 본색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일까. <조중동>의 '반격'이 거세졌다. 물 만난 고기 같다. 촛불 진화를 위해 총력을 펼치는 모양새다.

<조중동>은 22일 새벽 광화문 인근 세종로 사거리에서 있었던 밤샘시위를 꼬투리 잡았다. 도대체 그날 새벽 무슨 일이 있었기에 <조중동>이 이토록 신이 났을까. <오마이TV> 등을 통해 이미 생중계됐지만, 다시 그날 현장에서 벌어진 몇 장면을 재구성해 본다.

헌법이 보장한 자유를 막아선 차별과 폭력의 상징, 명박산성

그래, 맞다. 22일 새벽에는 <조선>의 보도처럼 망치로 경찰 버스를 부순 시민도, <동아>가 말한 대로 경찰버스를 밧줄로 연결해 끌어낸 시민도 있었다. 그리고 <중앙>이 보도했듯이 경적을 울리며 시위대에 항의하는 운전자도 있었다. 또 일부는 경찰과 격렬히 충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그날 시위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사건은 아니다. 그리고 수만 명이 참가한 집회 전체 모습을 설명해주는 사건은 더더욱 아니다. 그건 청계천에서 한 서울시민이 노상방뇨를 했다고 서울시민 전체의 도덕성이 도마 위에 오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22일 새벽 망치를 휘두른 한 시민의 행동은 절대다수의 시민들에 의해 금방 제지 됐다. 경찰 차량에 불을 붙이려 했던 한 시민을 제지한 뒤 붙잡아 경찰에게 인도한 것 역시 현장에 있던 절대다수의 시민들이었다.

경찰버스 끌어내는 행위를 보자. 이는 지난 6일부터 8일까지 진행된 '국민 MT' 때부터 시작됐다. 시민들은 청와대로 가는 길을 막아선 경찰버스를 밧줄로 묶어 끌어냈다. 이런 행위가 있기 전부터 시민들은 경찰버스에 많은 낙서를 남기고 스티커를 붙였다. 이런 경찰버스는 '국민낙서판'으로 불렸다.

물론 경찰 쪽에서 보면 이런 모든 행위는 불법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시민들의 생각은 다르다. 한 시민은 "우리는 모든 경찰 버스를 끌어내는 게 아니라 청와대로 향하는 길을 막아선 버스를 끌어내는 것"이라며 "대통령이 얼마나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이렇게 하겠나, 우리의 행위는 일종의 저항"이라고 말했다.

지난 10일 경찰이 세종로 사거리 청와대 방향 도로를 컨테이너로 쌓았을 때, 시민들은 이를 '명박산성'이라 불렀다. 풍자이자, 조롱의 표현이었다. 시민들은 길을 막아선 경찰버스와 컨테이너를 1개월 넘게 진행된 촛불집회에도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이명박 대통령의 상징으로 여긴다. 헌법이 보장한 집회 시위의 자유를 막아선 차별과 폭력으로 여긴다.

항상 촛불집회를 폄훼한 <조중동>의 행보

한미 쇠고기 재협상을 촉구하는 48시간 릴레이 농성이 벌어지는 가운데 22일 새벽 세종로 네거리에서 경찰과 밤새워 격렬하게 대치했던 시민들이 날이 밝아오자 노래를 부르며 대동놀이를 하고 있다.
 한미 쇠고기 재협상을 촉구하는 48시간 릴레이 농성이 벌어지는 가운데 22일 새벽 세종로 네거리에서 경찰과 밤새워 격렬하게 대치했던 시민들이 날이 밝아오자 노래를 부르며 대동놀이를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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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새벽 시민들은 한 대의 경찰버스를 끌어냈고, 그 안에는 10여명의 전의경이 있었다. 전의경들은 시민들과 기자들에게 사진 촬영을 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했고, 이 요구는 지켜졌다. 그리고 전의경들은 시민들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차벽 뒤로 돌아갔다. 이런 모습은 <조중동>의 지면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시위대에게 항의하는 차량운전자는 또 어떤가. 이런 시민들은 거리 시위 시작 이후 늘 있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반대로 시위대가 외치는 구호 박자에 맞춰 지지를 보내는 차량운전자들도 항상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경찰과 정부가 시민들을 자극한 측면도 있다. 21일 밤 경찰은 광우병 국민대책회의가 주문한 모래를 실은 2.5톤 트럭이 광화문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 전날도 모래 트럭의 진입을 막았다. 서울경찰청의 한 관계자가 "10톤 이상의 트럭이 서울 중심부를 통과할 때는 허가증이 있어야 한다"면서 합법성을 강조했던 것과는 이율배반적인 행태다. 결국 시민 3000여 명의 시민들이 서울역 인근까지 달려가 모래를 비닐봉지 등에 담아왔다.

뿐만 아니라, 경찰은 밤샘 시위 때 선무방송을 통해 "시민들이 경찰에게 돌과 모래주머니는 던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돌과 모래주머니로 경찰을 공격한 시민은 없었다. 이 때문에 현장에 있던 기자들조차 "경찰 방송이 계속 시민을 자극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자신을 목사라고 밝힌 한 시민은 "더 이상 정부의 폭력에 맞서 가만히 있는 건 무저항과 다름없다"며 스스로 경찰버스를 넘어 자발적으로 연행되기도 했다.

23일 보도를 보면 <조중동>은 마치 자신들이 과거에는 평화로운 촛불집회를 지지했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하지만 촛불집회가 50일 넘게 진행되는 동안 <조중동>은 늘 촛불집회를 폄훼했다.

이들은 여중고생이 처음 촛불을 들었을 때는 물론이고 촛불이 청계광장에 머물러 있을 때도 '인터넷 괴담', '배후조종 세력' '좌파세력의 선동' 등의 수사를 사용하며 촛불을 끄려 노력했다. 이런 눈물겨운 안간힘에도 촛불이 계속 확장될 때는 이명박 정부의 태도를 슬쩍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촛불의 규모가 다소 축소되고, 한미 쇠고기 추가협상이 완료되자 <조중동>은 다시 촛불 진화 선봉대로 적극 나서고 있다. 이는 최근 진행되는 정부와 우익단체의 촛불에 대한 반격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광고주 압박운동 벌이는 이유를 고민해보라

22일 새벽 세종로 주변에는 많은 비가 내렸다. 그때까지 현장을 떠나지 않던 수천 명의 시민들은 우비를 입고 윤도현의 <아리랑>과 민중가요 <처음처럼>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거리에 펼쳐진 거대한 군무였고, 큰 합창이었다.

기자에게 이런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5월 2일부터 시작된 촛불집회에는 늘 웃음과 발랄함이 있었다. 민주적인 과정, 그리고 대화와 토론의 미학을 생략한 답답한 정부에게 시민들은 그런 유쾌한 방식으로 맞서왔다.

늘 배후 조종론과 좌파 적출론에 입각해 촛불을 보도해왔기에 그런 것일까. <조중동>의 감수성은 22일 아침의 군무를 보지 못했고, 촛불집회 내내 시민들이 만들어 낸 민주주의 가치를 외면해왔다.

거리시위가 끝나면 쓰레기봉투를 들고 늘 거리를 청소하는 시민들이 있다. 하지만 이 풍경이 촛불집회 전체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폭력적 행위를 하는 일부의 모습으로 촛불집회 전체를 평가하는 것 역시 옳지 못하다.

<조중동>은 왜 시민들이 자신들 본사 출입구에 '조중동 폐간'이라 적힌 스티커를 붙이고, 광고주 압박운동을 벌이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23일 보도를 보면 아직 그 이유를 모르는 듯하다.


태그:#촛불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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