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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이란 아름다운 미완성이다

 

천흥사지를 떠나 성거산(579m) 중턱에 있는 만일사를 향해 간다. 천흥저수지 건너편 물가에는 여기저기 강태공들이 주저앉아서 고기를 낚고 있다. 아마 세상엔 낚시만큼 마음 닦기에 좋은 일도 드물 것이다. 마치 선승의 면벽수도를 방불케 하는 측면이 있다.

 

깨달음의 한 소식을 얻으려 용맹정진하는 선승이나 이제나저제나 물고기가 낚일 것을 고대하는 강태공. 어쩌면 둘은 마음을 비운 채 마냥 기다림이 주는 막막함을 견뎌야 한다는 점에서도 비슷할는지 모른다. 텅 빈 구럭을 든 채 터덕터덕 귀가하는 강태공. 그의 도로아미타불은 결코 헛수고가 아니다. 완성 혹은 꽉 채움은 인생을 교만하게 만든다. 비움이란 아름다운 미완성인가. 그러므로 저 강태공의 구럭은 텅 비어야 한다. 

 

만일사 가는 길은 멀다. 이따금 산딸나무 하얀 꽃과 붉은 싸리나무 꽃 등이 나타나서 나그네에게 말을 건다. 때로는 아름다움보다 더 큰 독(毒)이 없다. 산에 사는 꽃들이여, 나에게 말 걸지 마라. 만일사에 이를 때까지 난 내 마음의 구럭을 텅 비워야만 한다. 온갖 잡념과 분별심 따위를 이 길 위에 죄다 떨어트리고 가야 한다. 마음의 허공이 깊고 넓을수록 커다란 진리를 품을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온갖 유전을 겪은 끝에 봉안된 관음상

 

가파른 고갯길을 한 시간쯤이나 올랐을까. 이윽고 만일사 주차장께에 도착한다. 눈들어 올려다보니 저 높이 만일사가 결가부좌를 튼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운치 있는 돌계단을 즈려밟으며 만일사 경내로 들어선다.
 
전각이라야 관음전과 영산전, 산신각이 전부인 소박한 절집이다. 만일사를 세운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921년(고려 태조 4) 에 도선이 비보 사찰 중의 하나로 창건하고 만일사(萬日寺)라 했다는 설도 있지만 별로 신빙성이 없는 얘기다. 도선은 이미 898년에 입적했기 때문이다. 도선이 직접 창건했다기보다 도선의 비보사찰설에 따라 창건된 많은 절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주불전인 관음전은 앞면 4칸·옆면 2칸 크기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이 건물은 1876년(고종 13)에 지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현재의 건물은 1970년에 개축한 것이다. 개축할 적에 본래의 주춧돌 등 부재를 땅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왜 그랬는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관음전 안에는 동제 관음상을 모시고 있다. 저 불상은 1002년에 천흥사에서 조성한 것이다. 불상 배 아래 쪽에 '통화20년천흥사(‘統和二十年天興寺)’라 새겨진 명문이 그것을 알게 해준다.

 

관음상의 높이는 여남은 살 먹은 소년의 키만 하다. 오른손엔 감로수병을 들고 있으며, 왼손엔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한다는 청심환를 들고 있다. 얼굴은 도톰하며, 눈은 자비스러운 표정으로 지그시 감고 있으며 코가 아주 오똑하다.

 

천흥사가 폐사 되고나서 이 관음상은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엔 일본인들이 보관하고 있었는데 임홍근이란 스님이 거두어 만일사에 봉안 했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한다는 보살이다. 세상 사람들의 비원을 모두 다 들어줄 것 같은 인상이다. 게다가 온갖 유전을 겪으신 분이시니 중생의 마음을 오죽 잘 헤아리겠는가.

 

만일사의 위치를 결정한 건 석불좌상

 

관음전 뒤로 올라가자 자연 동굴이 있다. 이런 곳에 굴이 있다니 의외다. 굴 속으로 들어간다. 동굴 안은 매우 좁다. 몸을 겨우 움직일 수 있을 정도다. 안에는 한 자루 촛불이 암벽을 조각하여 만든 석가여래좌상을 조용히 비추고 있다.

 

깊게 주름이 새겨진 옷이 돌부처의 왼쪽 어깨를 감싸고 있다. 돌부처는 오른손을 가만히 무릎 위에 내려놓고 있다. 오른손보다 훨씬 가는 왼손은 왼발 위에 슬쩍 걸쳐놓고 있다.

 

조각 기법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석불의 머리는 본래 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머리가 잘라져서 시멘트로 새로 만든 것이라 한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이 석불좌상 때문에 이곳에다 만일사를 세운 것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이 높은 곳에다 절을 지을 이유가 있을까.

 

만일사는 가려진 것이 너무 많다. 주춧돌 등 부재를 땅에 묻어버린 일도 그렇고, 동제 관음상이 겪은 기구한 역정도 그렇다. 만일이라는 가정을 세우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아 만일사인가.

 

석굴을 나와 이번엔 영산전으로 올라간다. 영산전 아래엔 5층석탑이 서 있다. 원래는 관음전 앞에 있었으나 법당을 새로 보수하면서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위치가 어중간하다. 관음전 정면도 아니고, 영산전 정면도 아니다. 마당이 좁아서 그럴 것이다.

 

기단 4면에는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겨놓은 후,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으며 맨 윗돌의 밑면에 연꽃무늬를 두어 장식하였다. 1층 몸돌은 옮길 때 잘못 놓았는지 거꾸로 놓여 있다.

지붕돌 처마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어 자연스럽다. 그러나 군데군데 깨져 있어 바라보는 이를 무척 안타깝게 한다. 안타까운 것은 탑 꼭대기도 마찬가지다.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이 남아 있을 뿐 보주 등 다른 장식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영산전 안에는 열여섯 분 나한을 모시고 있다. 나한은 아라한의 약칭이다. 나한은 득도의 최고 경지에 이른 성자다. 우리나라에서 십육나한에 대한 신앙이 깊어지기 시작한 것은 8세기 후반 말세신앙이 득세하면서부터였다. 내가 절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이 나한상이다. 나한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진지한 표정을 짓는 나한, 심술궂게 생긴 나한, 장난스런 표정을 짓는 나한. 저마다 표정은 다르지만, 그 천진무구한 모습이 나를 미소짓게 한다.

 

영산전 뒤로 조금만 올라가면 성냥갑만 한 산신각이 있다. 지붕에 비가 새는지 천막을 뒤집어쓰고 있다.

 

민중의 몫으로 남겨둔 미완의 전설

 

 

다시 영산전 앞으로 내려와 좌측 자연 암벽에 돋을새김한 마애여래좌상을 바라본다. 마멸이 심해 윤곽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마애불의 양 어깨는 거의 수평이다. 양 발을 무릎 위에 올리고 앉았는데 발바닥은 하늘을 향해 있다. 불상의 앞부분과 머리 위쪽에 홈이 파여 있다. 아마도 마멸 방지를 위해 보호각을 설치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이 마애불에는 설화가 있다. 옛날에 백학 한 쌍이 하늘에서 내려와 맑고 깨끗한 곳에 불상을 조성하고자 하여 두루 살핀 끝에 성불사의 암벽에 내려와 입으로 바위를 쪼아 불상을 새겼다. 성불사는 반대편 산기슭에 있는 절이다. 그러나 사람의 기척에 놀라 불상을 다 새기지 못하고 날아갔다.

 

잠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서 숨을 고르던 백학은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성불사로 가지 않고 만일사로 내려와 바위에다 불상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져서 조각을 다 끝내지 못한 채 날아가 버렸다. 그리하여 절 이름을 날이 저물었다 해서 만일사(晩日寺)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애불을 끝내 다 새기지 못했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새기다 보니, 돌의 재질이 조각에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는 게 아닐는지. 또 새기다 보니 날이 저물었다는 건 그 옛날 만일사가 민가로부터 떨어져 얼마나 깊은 산 속에 자리를 잡았는가를 말해주는 것인지 모른다.

 

어찌되었건 간에 원래 이름이라는 일만 만(萬) 자 만일사보다는 저물 만(晩) 자 만일사가 훨씬 그럴 듯하다. 역시 미완성은 아름답다. 그리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민중의 몫으로 전설을 남겨둘 줄 아는 옛 사람들의 센스 역시 아름답다.

 

소박한 암자가 중생의 마음에 울림을 안겨준다

 

요사 근처로 내려오자 보살들이 자꾸 "공양을 들고 가라"고 권유한다. 이 절집은 인심이 좋다. 지금 직지사 주지이신 성웅 스님께서 남장사에 계실 때도 이렇게 인심이 좋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공양 드셨어요?"라고 인사를 건네곤 했다. 만일사는 얼마 전까지 비구니 사찰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두 분의 비구 스님이 주석하고 계신다고 한다. 절 인심이란 바로 스님의 인심이 아닐까 싶다.

 

불교에는 5대 명절이 있다. 부처님 오신날·출가절·성도절·열반절·우란분절(백중)이 그것이다. 삼월 삼짇날 불공·단오·칠석 등 각종 민속 절기에도 불공과 기도를 올린다. 오늘은 마침 단옷날이라서 공양 올릴 음식을 많이 장만했나 보다. 나도 한 자리 차고 앉아 공양을 든다.  

 

오랜만에 근사한 공양을 들고나서 배가 불러 잠시 나한전 뒤 바위에 걸터앉았다. 공양이란 말의 어원을 생각한다. 공양이란 본디 푸자나(pujana)라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온 말이다. 소가 되새김질하듯 '푸자나'라는 말을 중얼거린다. "푸자나, 푸자나" 중얼거리다가 나중엔 슬쩍 "헤프잖아, 헤프잖아"로 바꿔 발음해본다. '푸지다'라는 우리말이 혹 '푸자나'에서 온 게 아닐까.

 

절집에 찾아와서 이렇게 포만감을 느껴본 게 얼마 만인가. 요즘엔 절집마다 줄을 잇는 대형 불사 때문에 절집을 찾아가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서 늘 사람의 마음을 억누르지 않는 잔잔함, 꾸밈없는 울림이 있는 절집이 그리웠다. 큰 것은 결코 사람의 마음을 채울 수 없다. 작고 소박한 것만이 사람의 마음을 채울 수 있다. 내 작은 마음 안에 담아가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을 만큼 만일사는 작고 소박하다.

 

조선 중종-명종 연간의 문인인 신광한(1484~1555)은 <기재집>이란 문집에서 만일암을 돌아본 감회를 이렇게 읊고 있다. 

 

峯回峽急洞天深(봉회협급동천심) 봉우리를 돌아 가파른 골짜기에 洞天이 깊으니

忽聽風泉已洗心(홀청풍천이세심) 홀연히 바람과 샘물소리에 마음이 깨끗해지네

聞說聖居遺跡비(문설성거산유적비) 성거산 유적의 비밀을 전해 듣노라니

小庵孤絶寄雲岑(소암고절기운잠) 작은암자 외로이 끊어져 구름봉우리에 얹혀 있어라

 

- 신광한 시 '유성거산만일암(遊聖居山萬日庵)'

 

아마도 그때까지는 일만 만자 만일암이었나 보다. "구름봉우리에 얹힌" 아름다운 절 만일사를 떠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게 되는 순간적인 가정이나 맹세가 얼마나 부질없는 줄 안다. 그러나 이곳 만일사에선 한 번 쯤 헛된 가정을 하고 싶다. '내년 초파일에 반드시 이곳에 오리라'고.


태그:#천안 , #성거산, #만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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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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