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항일역사팩션 <제국과 인간>의 제1편 ‘상해의 영혼들’이 끝을 맺었다. 5개월 동안 1500장 분량의 원고를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오늘부터 제2편 ‘중경에서 오는 편지’가 연재된다.

을사늑약부터 임시정부 수립까지 일제의 정치적 침략상을 주로 다룬 제1편과 달리, 제2편은 3·1운동이후부터 중일전쟁 직후까지를 다루면서 일제의 문화적 침략상에 치중할 것이다. 일제의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것이 당대 지식인을 어떻게 오염시켰으며 그것이 오늘날까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를 말하려 한다.

따라서 근거 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일본과 서양을 추종했던 세력들, 즉 독립협회를 비롯한 개화· 계몽주의 대한 신랄한 비판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려운 시대에도 우리 것의 가치를 알고 우리의 전통을 신뢰하면서 식민지 현실을 타개해 보려고 노력했던 매혹적인 인물들을 부각시키는 데에 있다.

사실과 허구, 과거와 미래를 무시로 오가는 서술전략은 전통소설의 관습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당혹스럽게 받아들여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히 연결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서술 방법을 선택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지난 한 달 남짓 한국을 뜨겁게 달군 ‘촛불’에 치여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줄어든 것 같다. 게다가 내 소설은 아예 처음부터 독자들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다시 말해 독자들이 내 소설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소외시키고 있는 것이다.

내 소설을 소외시키고 있는 독자들을 향해 무모하게도 나는 제2편을 내놓기로 한다. 내 소설이 소외되고 있다는 점이 왠지 모르게 나로 하여금 더 소설에 매달리게 하는 의미와 의욕을 부여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내 소설에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는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항일의 열기는 촛불보다 더 뜨거웠다오.” 

항일역사팩션 <제국과 인간> 제2편 중경에서 오는 편지

괴물이 나타났다.
그 괴물이 어마어마하게 넓은 그림자를 지상에 드리우며 낮은 하늘을 지나간 다음, 갑자기 검붉은 비가 내렸다고 했다. 영국의 과학자들이 붉은 비의 샘플을 조사하고 있을 때, 하늘  멀리서 천둥소리 같은 것이 희미하게 들리더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벌레들이 비 내리듯 쏟아져 내렸다.

식민지 조선에서 생긴 일이 아니었다. 인도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인도도 식민지란 점은 조선과 같았다. 오히려 인도는 식민의 역사가 조선보다 더 깊었다. 땅덩어리로 보아도 인도는 20세기 가장 넓은 식민지이기도 했다.

동아일보 사설에 담긴 것

김영세는 동아일보에 실린 <믿든지 말든지> 기사를 읽고 있다가 사설로 눈을 돌렸다. 사설의 앞부분을 무심코 읽어 나가던 그는 두 손으로 와락 신문을 잡아 안았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뜬 그는 나머지 글을 읽어 내려갔다. 신문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방바닥에 신문을 놓더니 대청으로 나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 연기 너머로 마당과 평상과 장독대와 열린 대문이 있었다. 그는 차분히 마음을 진정하고 시야에 잡히는 사물들을 하나하나 식별해 보았다. 마당 가장자리는 아직 눈이 녹지 않았고 대부분의 장독 뚜껑에는 수북이 눈이 덮여 있었다.

“삼촌,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서점에 다녀오겠다는 조카의 인사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조카 문수는 섬돌로 내려가 신발을 신더니 대청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삼촌을 쳐다보았다. 문수는 삼촌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삼촌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게 되면 다른 것을 거의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문수는 가볍게 목례만 하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는 막 대문을 나가다가 등 뒤에서 들리는 삼촌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래, 문수야! 잘 갔다 오너라.”

김영세가 신문에서 읽은 것은 ‘민족적 경륜’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그는 2년 전에 잡지 <개벽>에서 이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른바 ‘민족 개조론’으로 더 알려진 그 글은 <개벽>에 발표되었을 때만 해도 일부 지식인이나 알았을 뿐이었다. 김영세는 그 때에도 심기가 아주 불편했었다. 그런데 2년 뒤에 전국 일간지인 동아일보에 그 글이 다시 게재되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논설은 4회에 걸쳐 더 실릴 예정이라고 되어 있었다.

춘원 이광수라는 소설가의 정체

소설가이자 동아일보 편집국장인 이광수는 아주 요상한 방법으로 조선 지식인의 자존심을 긁고 있었다. 김영세는 이광수의 논조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전국적인 인기를 모았던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읽었을 때에도 그는 아주 불쾌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무정>에서 선각자라고 제시되는 인물 이형식은, 김영세가 보기에는 위선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데다 자아도취까지 심한 위인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형식의 애인 김선형은 유치한 의식을 가진 예수교 장로의 딸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마치 조선의 신지식인이라도 되는 양 표현되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광수는 소설의 말미에서 식민지 조선을 난데없이 미화하기도 했다. 김영세는 그런 소설이 영향력 있게 읽히는 조선인의 정신 수준이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광수는 이제 민족을 개조해야 한다는 주장을 그럴 듯한 외국 사상가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개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조선이 망한 것은 낮은 민족 수준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선 민족은 성격적 결함이 있고 인종적으로 열악하므로 스스로 독립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희생자만 내는 민족 해방 투쟁은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광수의 영향력이 아주 크다는 데에 있었다.

김영세는 이광수의 글쓰기 심리를 분석해 보았다. 이광수가 빌려다 쓴 프랑스의 사상가 르몽도 직접 빌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김영세는 알고 있었다. ‘민족개조론’은 이미 학계에서 왕성하게 논의된 적이 있는 이론이었다.

선의의 민족개조론은 크게 두 방향이 있었다. 하나는 고유한 문화와 정신을 바탕으로 민족 성장을 도모하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구 문화의 보편성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민족의 발전을 이룩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양 심리학의 민족진화론을 차용했는데, 이광수는 남이 차용한 것을 재차용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은 해외 동포의 것인데 자기의 것과 일치하여 발표한다고 말했다. 국내 학자의 것을 베끼면서 해외 동포의 것이라고 말하는 이광수의 심리를 김영세는 알고 있었다. (계속)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태그:#민족개조론, #이광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