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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매일 조금씩 나눠읽고 있다. 여러 사람의 수많은 곡절들을 담고 있어서 스치는 풍경처럼 건성 읽을 수 없는 이런 책은 가급 여러 차례로 나눠 읽곤 한다. 그래야만 누군가의 속 깊은 이야기에 귀를 좀 더 오롯이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3분의 1 가량을 남겨둔 오늘, 두 번째 날쯤에 읽었던 '선배님, 송영수 살립시다' 편이 생각나 읽었던 부분을 다시 들추어 읽게 되었다.

고문으로 얽힌 선후배, 다시 만나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 겉그림
 <길에서 만난 사람들> 겉그림
ⓒ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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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송영수씨는 1980년대에 이 책의 저자인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을 고문당하게 만든 사람이다.

고문당하면서 "나는 모른다, 그러나 하종강 선배는 알지도 모른다"는 말 한마디로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통닭구이·비녀꽂기 등 며칠 동안 1980년대의 악명 높은 고문을 받는 곤욕을 치"르게 한 그 장본인이다.

이처럼 각별한(?) 선후배 관계. 선배인 저자가 송영수씨를 만나 인터뷰한 시점은, 그러니까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부분은 송영수씨가 신부전증으로 하루 4번씩 혈액투석을 하면서 노동운동을 하던 무렵.(그 후 그는 결국 주차장 바닥에 흥건할 정도의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기직전까지 갔지만, 부인의 간 65%를 이식받아 살고 있다고.)

사무실 한쪽 구석에서 피곤에 지친 얼굴로 비닐봉투 2개를 자신의 몸에 달린 파이프에 연결해놓고 투석작업을 하는 40분 내내 수많은 전화가 오고 가고, 수화기 너머 사람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껄껄 웃기도 하는 그에게 저자는 묻고 있다. "의사들이나 동료들이 신장이식수술을 권고하지 않느냐"고.

송영수 "이식수술을 할 수 있지. 그런데 이식수술을 받으면 그 뒤에는 억수로 조심하면서 살아야 하거든. 밤샘을 못하거든. 활동을 엄청 제한해야 되거든. 활동 좀 더 하다가 이담에 나이 들면 하려고…. 활동 안하면 나는 건강이 더 안 좋아지고 아마 바로 뒤에 죽을 거야."

내가 "혈액투석을 하루에 네 번씩이나 하는 지금은 밤샘을 해도 되는 거냐?"하고 물으니 그는 안하는 게 좋기야 하지만, 대충 할 수는 있다"라고 대답했다. -책 속에서

총선에도 노동절에도 쉬지 못하는 사람들

지난 4월 총선을 앞둔 어느 날 이른 아침, 철야작업을 하고 뒤척이는 잠결에 "투표에 참여하고 싶지만 조금이라도 늦게 가면 잘릴지도 몰라 투표를 하고 갈 수 없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었었다. 어느 방송사의 선거 특집 방송 중 현장 인터뷰였나본데, 비몽사몽간에 들었던 그 말들은 잊혀 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낮은 투표율을 보면서 '먹고 사는 다급함 때문에 투표마저도 뒷전으로 미룰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만큼 당선 확률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어서 빈곤한 우리의 삶은 여전히 빈곤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지금보다 훨씬 많은 노동자들이 먹고 사는 일 걱정 없이-쉽게 말해 잘릴 걱정 없이-투표만이라도 참여한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나아지지 않을까'고 바래보았다. 지나친 추측이요 바람일까?

<길에서 만난 사람(하종강)>은 우리 시대 노동자, 노동운동을 하는 그들의 이야기다. "조금이라도 늦게 가거나 하루 빠지면 그나마 일할 수 있는 직장에서 잘릴지도 몰라 아쉽지만 투표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어느 비정규직자의 먹고 사는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눈시울이 자주 붉어졌다.

철도노조의 민주화와 회사의 부당징계에 대한 항의로 '30미터 높이의 철탑에 올라가 40일 동안 농성을 하였던 이종선씨, 노동자의 건강을 위해 젊음을 바친 김은희 조태상 부부, 동일 방직 똥물 사건의 주역으로 지금은 지방에서 농민운동을 하고 있는 농사꾼 안순애씨, 전교조의 선봉에 있었다가 교사로써의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관광버스 운전사를 선택한 이병식씨 등의 이야기다. 대략 50여명의 이야기들이다.

이병식씨가 교사라는 직분을 버리고 관광버스 운전을 택한 이유는 "최소한 사기칠 일 없잖아?"란다. 용산역 고공농성의 주인공 이종선씨, 화재로 24살 딸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도 속절없이 보내야만 했던 풀꽃세상 대표 정상명씨는 노동자로서 이렇게 말한다.

이종선 "철탑 위에서 밤새도록 불 밝히고 소리를 내며 차량을 고치고 있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노동자가 사회의 기둥이고 생산의 주역이다'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정말 실감났어요. 깊은 밤에 환하게 불 밝히고 있는 공작창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맞아, 우리가 저렇게 밤새 일하면서 세상을 이끌어가는 거야'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정상명 "꿈꾸는 사람들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는 거예요. 이다음에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이 되어야지요.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모르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에요."

'나는 어떤 길을 살아왔는가. 어떻게, 어떤 계기로 노동자가 되었으며, 노동 운동의 길에 서게 되었는가', '그는 어떤 노동자이며 어떤 사람인가. 그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지난 30년간 같은 길을 가고자하는 동지로, 선후배, 혹은 형 아우로 노동 현장에 함께 있었던 연대감으로 주인공들은 아무에게나 쉽게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쉽게 털어놓고, 누구보다 그들을 잘 아는 저자는 그만큼 생생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책에 쏟아놓고 있다.

이제 그들을 만나야겠다

송영수씨 편을 다시 읽고 싶었던 이유는 어제가 노동절이요, 노동절에도 일을 해야만 했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840만 중 450만 가량이라는 저녁 9시 뉴스를 보면서였다. 송영수씨의 손을 거친 노조만 100군데, 87년 6월 항쟁부터 부산지역 거의 모든 노동집회의 판을 짠 장본인으로 노동운동 때문에 수술도 뒷전인 이야기가 유독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씨나 <작은 책> 발행인 안건모씨 외에는 내겐 모두 낯선 이름들이었다. 하지만 책을 통해 만난 그들의 이름과 이야기들은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고 목차를 통해 만났던 그들을 만나야겠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야겠다. 그리하여 우리의 2008년 노동 현장을 들여다보아야겠다.

▲운전기사 뽑는 줄 알고 민주노총 들어와 천만 노동자와 결혼한 민주노총 조직부장 한혁씨의 "민주노총에서 대부업을 한다고?" ▲회사의 일방적 폭행과 협박에 적응 장애 진단까지 받은 청구성심병원 노조 권기한씨의 "나는 왜 정신병에 걸렸나" ▲청계천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청계천 르뽀 작가 김순천씨▲비상식적인 기존 정치에 '상식적인 도전'을 한 서울시의회 심재옥 의원▲대우 해고 노동자 폭력 진압 사건을 다룬 '빗방울 전주곡' 최헌규 감독의 "내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노동자"▲방방곡곡 전화국 계약직 노동자들을 조직해 역사상 가장 길고도 강고하게 싸운 홍준표씨▲공무원 노동조합 국보 제1호 정용천씨▲노동대학에서 하종강씨를 기죽였다는 조태욱씨의 "노동자들이여, 공부합시다" 등이 실려 있다.

덧붙이는 글 | <길에서 만난 사람들>(저자:하종강/후마니타스 펴냄/2007년 7월/12000원)



길에서 만난 사람들 - 하종강이 만난 진짜 노동자

하종강 지음, 후마니타스(2007)


태그:#노동자, #노동운동, #민주노총, #비정규직, #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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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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