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률이 급격히 떨어지는 2008년 상반기 미국경제"세상이 불 속에서 멸망할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빙하 속에서 멸망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하버드 대학 경제학 교수인 케네스 로고프는 최근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를 인용하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금융 파멸(불)의 위험과 인플레이션(빙하)을 설명했다. 지금은 위기에 처해있는 시기다. 미국은 규제 완화의 한계(사실은 신자유주의의 한계 - 인용자)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얻은 것들을 버리지 않고서는 피할 수 없는 이 변화의 국면을 헤쳐 나가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다.(<파이낸셜 타임즈> 4월 6일자)
최근의 미국 발 신용위기, 정확히 말하면 '금융위기로부터 촉발된 경제위기'를 '불'과 '빙하'에 빗대어 실감나게 표현한 글이다. 이제 서구의 보수적인 경제지와 학자들 속에서 위기(Crisis)라는 용어는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는 90년대 일본의 장기불황과 비교하며 미국 경제의 침체가 장기화될 것이라 예견하기도 한다.
서브프라임 부실 여파가 확산일로에 있던 2007년 말까지만 해도 사실 미국 경제의 침체를 예상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그러나 2008년 3월 14일 미국 5위 투자은행 베어스턴스(Bear Stearns) 파산을 거치면서 미국의 경제 침체는 공식화되었다. 서브프라임 부실이 단순히 주택경기 과열이나 이로 인한 신용 경색으로 끝나지 않고 실물경제를 포함하여 내수와 고용 등 경제 전반의 침체로 확산되고 있는 증거들이 속속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상 미국은 경기가 두 분기 연속, 즉 6개월간 성장률이 마이너스에 빠지면 침체(Recession)로 간주한다. 2007년 1/4분기에 0.6퍼센트 성장에 그친데 이어 올해 1/4분기에 0.1~0.2퍼센트 수준의 성장을 할 것이 확실해지면서 경기침체는 수치상으로도 공식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2008년 경제성장률 전망도 1퍼센트를 넘지 못할 것이 확실해지고 있고, 여기에 더해 2009년에도 올해와 비슷한 수준이 유지될 것으로 보여 경기 침체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IMF는 미국의 경제성장률이 2008년과 2009년에 각각 0.5퍼센트와 0.6퍼센트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 경제 침체, 얼마나 심각하게 오래 갈 것인가?미국 경제에 대한 경제 전문가들의 진단과 전망을 살펴보면 위기의 심각성 정도를 더 실감나게 알 수 있다.
"미국 경제는 이미 경기침체에 빠졌으며 지금 시점에서 이를 부인할 수 있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글로벌 인사이트 나리먼 베라베시 수석 이코노미스트, 2008.3.7)"경제 논쟁은 이제 경기침체가 얼마나 심각하게, 얼마나 오래갈 것인지로 이동하고 있다." ( 모건스탠리 수석 경제 분석가 리처드 버너, 2008.3.13)"동시에 3개의 악순환에 빠져들고 있다. 유동성 악순환(자산 가격이 폭락하여 사람들은 팔기 위해 나서고, 따라서 가격은 더 폭락한다), 케인지언Keynesian 악순환(소득이 줄고, 그래서 소비가 줄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소득도 줄고, 따라서 소비도 줄어든다), 신용경색의 악순환(신용 불안에 의해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고 이것이 다시 금융부실을 발생시키고, 이것은 경제적 손실을 악화시킨다)." (미국 전재무장관 로렌스 서머스, 2008.3.13)"실질적 성장과 가격 안정, 금융 안정을 동시에 이루기 위해 정책 결정자들이 직면한 어려움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어느 때보다도 훨씬 큰 것처럼 보인다." (국제결제은행 수석 경제분석가 윌리엄 화이트, 2008.3.13)"미국 경제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경기침체(recession)에 돌입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 마틴 펠드스타인, 2008.3.14)"경기침체가 대공황 같은 상황으로 가지는 않겠지만 지난 90년대 206개 은행의 도미노 파산을 초래했던 저축대부조합(S&L: Saving and Loan Association) 사태와 2001년 정보기술(IT) 버블 붕괴를 합친 것 보다 더 큰 위기가 될 것으로 본다." (서브프라임에서 시작된 위기가 금융시장과 미 경제 전반을 2010년까지 어렵게 할 것이라고 전망한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학 경제학 교수, 2008.3.17)새롭게 부상하는 글로벌 경제 이슈들이처럼 2000년 IT 버블 붕괴나 그 전후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사 파산 위기, 엔론 사태는 물론이고, 91년 저축대부조합 부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이번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과 이로 인한 '미국 발 금융위기'는 오늘날 지구촌에 어떤 구조 변동을 초래할까. 또 미국 의존도가 매우 높은 한국사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가히 30년 역사의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새로운 국면에 돌입하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변화의 핵심 지점은 무엇이며 그 특징과 성격은 무엇일까.
이미 2008년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일명 다보스 포럼)은 글로벌 경제의 우울한 미래를 예견하면서 4대 글로벌 리스크를 제시한 바 있다. 구조적 금융 위기(Systemic financial risk), 식량 안보(Food security), 초국가 공급사슬(Hyper optimization of supply chain) 그리고 에너지 위기(Global energy risk)가 그것인데, 특히 자산가치의 하락과 경제활동 급락을 동반하는 금융구조 전반의 위기를 의미하는 '구조적 금융 위기'를 가장 중요한 이슈로 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가운데 가중 중요한 의제인 세계 금융 위기의 심화와 경제 불안을 필두로 다음의 이슈들을 중심으로 문제해결 방향을 잡아 보도록 하자.
① 미국의 부동산 폭락과 금융 위기는 실물경제 침체로 이어졌다. 그 폭과 깊이의 정도를 떠나서 이미 시작된 미국의 경기 침체는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경제 침체의 여파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특히 미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과 같은 나라들은 동반침체의 가능성을 안게 될 것이다.
② 미국 경제 위기를 넘어 세계적 금융 위기 국면이 왔다. 동시에 세계 금융시스템 규제가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 발 금융 위기는 신자유주의가 최근 20여 년 동안 구축한 첨단 금융 메커니즘을 통해 전 세계 신용 경색과 금융 불안을 야기했다. 그리고 이는 규제 풀린 최신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를 촉발할 것이며 '시장(market)이 결정하면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시장지상주의자들보다는 '더 이상 시장의 치유력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임을 뜻한다.
현재 다양한 수준에서 금융 규제를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으며 심지어는 단기적인 투기행태를 제어하기 위해 세계 금융거래에 대해 일종의 토빈세인 '금융 거래세'를 신설하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확실한 것은 이번 금융 위기 이후의 세계 금융시스템은 마치 물과 공기 같은 자유재(free goods)를 동원하듯 거침없이 유동성을 투입하는, 무제한적인 자유가 보장되는 모험적(?)인 시스템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③ 금융 위기가 촉발한 경제 침체 국면은 현재 원유, 곡물, 원자재가격 폭등이 주도하는 글로벌 인플레이션과 함께 오고 있다. 70년대 이후 30년 만에 물가상승과 경기 침체가 동시에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 공포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곡물가격 폭등과 세계 식량 위기의 새로운 국면은 전에 겪어보지 못한 중대한 국제질서의 지형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식량주권 이슈가 첨단 이슈로 등장할 개연성이 매우 높아진 것이다.
④ 과거에 선진국이 경제 위기에 몰리면 일방적으로 이에 휘말리던 제3세게 국가들이 이제는 국가경제의 특성에 따라 차별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21세기 세계 경제 위기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심지어 선진국의 경기 침체 국면에서 고성장하는 국가들도 생기고 있다. 이른바 탈동조화(decoupling) 논쟁이 나오게 배경이다.
신자유주의 성립 이래 최대 위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미국 경제의 침체, 글로벌 금융 위기, 글로벌 인플레이션과 스태그플레이션, 그리고 식량문제의 부상, 세계 경제의 탈동조화 가능성 등은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가 자기 모습대로 글로벌화 시킨 세계 경제의 산물이며 자연스런 귀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세계 경제의 급격한 변동 속에서 새로운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는 최근의 상황은 신자유주의를 넘어 대안 사회를 모색하는 진보적 생활인들이 긴장감을 가지고 추이를 파악하는 가운데 그 원인과 특징을 분석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최대 위기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이 과거와 같은 강한 흡인력을 갖지 못하고 시들해지는 추세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그 결과 2008년에도 남미의 파라과이와 아시아 네팔 등지에서 신자유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정치세력이 집권했으며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의 경제 발전을 도모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이러한 시도들 역시 미래의 세계 질서를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2008년 대한민국은 어떤 역사적 선택을 해야 하는가. 우리 국민은 어떤 시사점을 얻어 어떠한 비전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신자유주의는 쇠퇴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일단 이명박 정부는 80년대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 정부를 방불케 하는 규제 완화, 감세, 민영화를 앞세워 정통 신자유주의의 가속화를 선언하고 이를 빠른 템포로 추진해가고 있다. 90년대 워싱턴 컨센서스를 줄줄이 받아들여 민영화와 정부 기능 축소를 추진했던 남미 정권들이 연상되기도 한다.
아울러 이명박 정부는 한미FTA도 서두르고 있다. 신자유주의 최대 위기 국면에서 오히려 신자유주의 가속 페달을 밟은 상황이 된 셈인데, 이것이 미래지향적인 ‘실용적 선택’이 될지, 아니면 우리 경제를 30년 전 영국과 미국이나 20년 전 남미 버전으로 역진시키는 결과를 낳을지에 따라 4800만 국민의 삶의 향방이 갈릴 것이다.
물론, 수백 년 역사를 지닌 자본주의는 끊이지 않고 심각한 위기 국면을 만들어냈고, 그때마다 그 시스템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면서도 특유의 생존력과 적응력을 보이면서 변화를 거듭해왔다. 자본주의의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이번에도 금융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탄력을 받아 성장가도로 진입할 것을 굳게 믿고 있다. 반복적인 경기순환 과정의 한 국면으로 지금의 위기를 보는 것이다. 과연 신자유주의는 더 큰 활력을 갖고 회생할 수 있을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자본주의는 절대 스스로 소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 시스템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고 견디는 한, 그리고 그 시스템을 바꾸려는 결심을 하지 않는 한은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김병권 기자는 새사연 연구센터장입니다. 이 기사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사이트 '이스트플랫폼(http://epl.or.kr)'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