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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한 귀퉁이의 공민왕 신당
 종묘 한 귀퉁이의 공민왕 신당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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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공주! 요즘 내 꿈자리가 너무 불편하구려?”
“폐하! 무슨 말씀이온지. 이씨 왕들 사이에 끼어 지낸 지가 얼마나 오랜 세월인데 왜  오늘 따라 새삼스럽게 그런 말씀을….”

근심스럽다는 듯 노국대장공주의 목소리가 말끝을 맺지 못한다. 오백년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종묘 향대청 한쪽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칸짜리 작은 신당 안에서다.

“그러게 말이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우리들이 쉴 자리를 이곳에 마련해 주어 항상 껄끄럽고 편한 마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잘 지내왔는데 요즘 웬일인지 나도 모르겠소?”
“혹시 곧 밀려들어온다는 미국산 쇠고기 때문은 아니시온지? 아니면 엊그제 북경 올림픽 성화봉송인가 뭔가 한다고 중국 유학생 아이들이 시뻘건 홍기 흔들며 난동을 부린 때문인지요?”
공민왕은 그렇잖아도 마음을 언짢케했던 일들을 노국공주가 바로 짚어내자 고개를 끄덕인다.

공민왕이 그렸다는 신당안의 준마도
 공민왕이 그렸다는 신당안의 준마도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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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공주의 친정나라 원나라가 세력이 약해졌다고는 해도 얼마나 대단하던 시절이었소? 내 그 시절에도 원나라와 당당히 맞서 싸웠거늘. 요즘 이 나라는 미국에 너무 저자세 외교를 하는 것 같지 않소?”

“그러게 말입니다. 안심할 수 없는 쇠고기를 마구 들여와 백성들이 먹게 하다니, 또 축산 농가들은 어떻게 살아가라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윽한 눈길로 공민왕을 바라보는 노국공주의 눈가에 근심의 그림자가 스쳐지나간다.

“요즘 나라꼴이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소? 우리 시대의 왕조도 아니거늘, 청와대와 정부의 장관들은 부자들로만 채워지고, 이래가지고서야 어렵고 서러운 백성들의 삶을 누가 보살피기는커녕 어떻게 헤아리기라도 할 수 있으려는지 원!”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나 교육이나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줘야 할 터인데 과연 그런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 어떤지 짐작이 가지 않으니 이렇게 마음만 답답한 것 아니겠소? 더구나 경제는 자꾸 백성들의 기대에서 멀어져만 가는 것 같고...”

“그렇사옵니다,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할 지배계층이 너무 부유하면 가난한 백성들 생각하기가 쉽지 않을 터이니 말입니다. 폐하! 이제 그만 들어가시지요. 저 앞쪽에서 오고 있는 노인들 모습이 바로 폐하가 염려하시는 그들의 모습인 것 같사옵니다.”

노국공주가 공민왕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간다. 때마침 종묘 정문을 들어선 초라한 노인들 몇이 연못을 돌아 공민왕 신당이 있는 향대청 지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민들레 잔디밭의 여심
 민들레 잔디밭의 여심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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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를 뒤엎고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종묘를 세울 때 함께 들어선 것이 공민왕의 신당이라고 한다. 조선 건국초기 고려부흥 운동을 막기 위해 고려왕조를 철저하게 배격했던 조선왕조이고 보면 참으로 아리송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왕조의 탄압과 죽음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려왕조의 왕씨들은 전(全,田)씨나 옥(玉)씨로 성까지 바꿔 살았었다. 그런데 어떻게 전 왕조의 왕인 공민왕의 신당이 조선왕조의 종묘에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

역사기록의 그 어느 곳에도 시원한 해답은 없다고 한다. 다만 당시 막강한 원나라의 볼모로 잡혀 있을 때 원나라의 공주와 결혼까지 했던 공민왕이다. 그런 공민왕이 귀국하여 왕이 된 후에는 원나라를 배척하고 당당하게 주권과 국토를 회복했다.

흔들리던 고려왕실을 바로 세웠던 공민왕이었지만 출산 중에 죽은 노국공주를 잊지 못해 방황하기도 했던 공민왕의 사랑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그 공민왕의 자주정신을 높이 산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실의 종묘를 세울 때 비록 작고 초라하지만 공민왕의 신당도 함께 세웠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다.

봄볕이 따사로운 오늘(28일) 낮 종묘를 찾았을 때 공민왕의 신당은 찾는 사람도 별로 없이 조용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마침 한낮의 햇살이 비쳐드는 작은 신당 안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그려진 그림이 중앙에 배치되어 있고, 옆면 벽 쪽에는 공민왕이 그렸다는 준마도가 조금 희미한 모습이었다.

신당이 있는 향대청 지역은 종묘 제례에 바칠 향과 축문, 폐백을 보관하고 제례를 주관하는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이다. 향대청 건물들은 종묘의 정전이나 영녕전에 비하면 작고 초라한 건물들이다. 그러나 공민왕의 신당에 비하면 훨씬 큰 건물들이어서 공민왕의 신당은 상대적으로 더욱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왕조가 다른, 더구나 자신의 왕조를 뒤엎고 들어선 후계 왕조의 종묘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공민왕의 신당은 아무래도 어색한 모습이다. 뭐랄까, 크기나 피부색깔이 다른 종족들 사이에 홀로 서 있는 이방인처럼 말이다.

그러나 당시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막강한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던 원나라를 상대로 고려의 주권과 영토를 지켜낸 공민왕은 후계왕조에서까지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 공민왕이 오늘 이 시점의 이 나라를 바라본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햇살 따사로운 봄날의 짧은 꿈으로 그려보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종묘, #공민왕, #노국공주, #조선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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