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석용 의병장 생가로 고덕산이 내려다 보고 있다.
 이석용 의병장 생가로 고덕산이 내려다 보고 있다.
ⓒ 이명근

관련사진보기


의병 집안 삼대의 아름다운 이야기

이석용 의병장
 이석용 의병장
ⓒ 이명근

관련사진보기


이석용 의병장 생가는 소충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삼봉리 죽전마을로 승용차로 금세 도착했다. 초가집 옛 모습 그대로이기에 지난날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멀리 고덕산이 빤히 보이는 명당으로 소년 이석용은 날마다 고덕산 멧부리를 바라보며 청운의 뜻을 품었으리라.

다시 성수면 노인회관으로 돌아온 뒤 이명근 회장을 모시고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할아버지가 대구 감옥에서 옥살이하실 때, 아버지는 당신이 손수 밥을 지어 올리며 옥바라지를 하셨고, 할아버지가 순국하신 이후부터 돌아가시던 해(1983년)까지 머리를 깎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상투를 한 채 상복 차림으로 평생을 사셨습니다.

1940년 4월, 아버지가 할아버지 유허비를 세우다가 왜놈들에게 밉보여 2년간 감옥 생활을 하고 나온 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일본 놈들이 저희 나라를 건방지게 '해'라고 한즉, '월출(月出)이면 일몰(日沒)'이니, 당신을 영암 월출산 기슭에 묻어주면 4년만에 일본이 망하는 것을 보게 될 거라는 말씀에 따라, 산소를 이장하였더니 놀랍게도 할아버지 말씀대로 일본이 폭싹 망했다더군요."

이석용 의병장 아들 이원영 선생
 이석용 의병장 아들 이원영 선생
ⓒ 박도

관련사진보기


그러면서 당신은 아버지의 효도에 견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부자의 두터운 정을 회고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일본 놈들이 우리 집을 '폭도의 집'이라고 불태워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근근이 살았지요. 창씨개명이 싫어 호적도 하지 않아 학교도 못 다니고 한문도 소학만 겨우 읽은 반거충이지요. 한글도 한문도 모두 익지 못해 취직도 못 했소."

이 회장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다. 면서기가 그렇게 부러웠지만 배운 게 없어 못 했다면서 폭도 수괴 후손으로 살아온 이야기를 어찌 이 자리에서 다 하겠느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슬하에 아들 딸 7남매를 뒀는데, 다행히 자식들이 잘 풀렸으니, 그게 모두 할아버지 음덕이 아니겠느냐고, 지난날 고생 이야기 대신 아들 딸, 손자 손녀 자랑을 더 많이 했다.

"큰 아들도 잘 살고 둘째도 그만그만해요. 손자는 박사라오."

이석용 의병장 손자 이명근 선생
 이석용 의병장 손자 이명근 선생
ⓒ 박도

관련사진보기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비닐봉투를 꺼냈다. 거기에는 할아버지, 아버지 사진과 28 의사의 명단을 적은 편지지가 있었다. 나는 이명근 회장의 모습을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았다.

"선상, 내 사진은 안 찍어도 좋은께 우리 아버지 사진은 신문에 꼭 좀 크게 내주시오. 우리 아버진 효자로 도지사 표창까지 받았소. 그리고 28 의사 명단도 꼭 실어주면 고맙겠소. 모두 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애국자 분이오."

"염려 마세요. 어르신 부탁 제가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 부하까지 챙기는 어르신을 만나니까 제가 무척 기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일은 세상에 그리 흔치 않습니다."

나는 이명근 성수면 노인회장의 손을 꼭 잡아드리고 대기 중인 택시에 올랐다. 이 회장은 굳이 주차장까지 나오셔서 택시 앞문으로 기사에게 봉투를 건넸다.

"택시비는 내가 내야지."

택시는 성수면 노인회관을 벗어나 임실로 달렸다. 묵묵히 지켜보던 기사가 한 마디했다.

"노인이 아주 깨끗하게 늙었구먼요. 의병장 후손은 어딘가 다르게 보이네요."

28 의사 명단
 28 의사 명단
ⓒ 박도

관련사진보기


28 의사 명단

의장(義將)  박만화 최덕일 여주목 

의사(義士)  한사국 이광삼 김사범 허윤조

의졸(義卒) 윤정오 김치삼
                김여집 서성일 정군삼
                한득주 박인완 박달천
                김춘화 박운서 최일권
                양경삼 성경삼 서상열 오병선

의동(義童) 김학도 김동관 박철규 허천석

의승(義僧) 봉수 덕홍

이석용 의병장 행적

이석용(李錫庸) 의병장은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출신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재(靜齋)다. 1905년 을사늑약에 이어 1907년 8월 강제로 군대해산을 당하는 등 날로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이 심해지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 낼 것을 결심하였다.

임실 장수 곡성 진안 남원 함양 순창 등지에서 동지를 모아 1907년 8월 26일 진안 석전리에서 거의(擧義)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이석용 의병부대 진용은 다음과 같다.

의병대장 이석용
총지휘 박갑쇠· 곽자의· 임종문
선봉 박만화· 최덕일· 송판구
연락 홍윤무·박성무· 윤병준
중군 여운서· 김운서· 김성학
도로부장 김사원· 김공실· 김성율
후군 김사범· 윤명선· 김성학
보급 한규정· 박금동· 박문국
참모 전해산· 한사국· 이광삼
운량 오기열· 조영국· 김학문

1907년 9월 영광 수록산에서 기삼연이 호남창의진을 편성하고 대장으로 추대되자, 자신은 김익중(金翼中)· 서석구(徐錫球)· 전수용(全垂鏞, 海山) 등과 같이 종사(從事)로서 활약하였다. 한편 의진 명의로 전국에 격문을 돌려 항일 사상을 고취하고, 일병 1인을 살해하거나 생포하면 일백 냥을 줄 것을 약속하는 현상을 걸어 놓고, 황제께 상소하여 을사오적의 목을 벨 것을 간청하였다. 또한 <대한매일신보>에 투고하여 의병을 일으킨 취지를 밝히고 백성들의 협조를 요청하고 진군을 개시하였다.

1907년 9월 12일 밤 진안의 일본 병참(兵站)을 습격하여 전투장비 수천 건을 탈취 소각하였다. 한편 용담(龍潭)의 심원사(深源寺)에서 김동신(金東臣) 의진과 합세하여 의병 삼백여 명을 거느리고 산에서 내려오는 왜병과 접전하여 적 수십 명을 격살시켰다.

1908년 1월 2일 기삼연 의병장이 순창에서 적에게 체포당하여 광주의 서천 백사장에서 순국하자 의진은 다시 분진(分陣)하게 되었다. 이에 이석용은 다시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남원으로 진출하여 적의 장교 3명과 졸병 다수를 격살하였다.

이어서 '왜죄 10조(倭罪十條)'를 크게 써서 거리마다 붙여 놓고 황제께 상소하여 기왕의 모든 불평등조약을 폐기할 것과 다시 매국노 을사오적의 목을 벨 것을 간청하였다. 그 뒤 남원· 전주 등지를 중심으로 왜적과 수차례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1908년 9월 임실 전투에서 적에게 크게 패한 뒤 의진을 해산하고 잠행 유랑하다가, 1913년 겨울 임실에서 한인 형사 김아무개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이른바 살인· 방화· 강도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어 1914년 1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을 받았다.

다음은 재판장과 이석용 의병장간의 1문 1답의 대략이다.

(문) 한문을 많이 읽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답) 사서오경과 제가백가서도 모두 읽었다.
(문) 재산이 있는가?
(답) 가난한 선비가 무슨 재산이 있겠는가.

(문) 무슨 목적으로 폭도가 되었는가?
(답) 너희 일인을 배척하기 위해서이다.
(문) 통솔한 부하가 삼백 명이라고 하는데 정말인가?
(답) 그렇다.
(문) 조선이 일본과 합병 이래 천황폐하의 은덕이 망극하여 일반 신민이 환희하니 너도 충실한 신민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가?
(답) (크게 웃으며) 차라리 대한의 개와 닭이 될지언정 너희 나라 신민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문) 의병이라고 자칭하면서 인명을 살해하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공금을 강탈했으니 이 무슨 불법 행동이냐?
(답) 대한(大韓)을 배반하고, 부일(附日 일본에 아부함)하는 자는 죽일 것이요. 공금(公金)은 대한의 국세(國稅) 인즉 국왕이 잃어버린 돈을 신하가 찾아 쓰고, 아비가 잃어버린 돈을 자식이 찾아 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무슨 불법이란 말인가?
(문) 그러면 왜 군사를 해산하고 숨어서 다녔는가?
(답) 시세가 불리함으로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문) 스스로 의사(義士)요, 충신(忠臣)이라 하면서 일이 되지 않을 줄 알면 죽을 뿐인데, 왜 구구히 살아서 이런 욕을 보는가?
(답) 네 놈들이 어찌 내가 죽지 않는 까닭을 알겠느냐? 옛날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여섯 차례나 기산으로 나아가 싸웠고, 강유(姜維)가 아홉 차례 중원을 친 것도 모두 성공 못할 줄 알면서도 강행한 것이다. 비록 성공 못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노력하여 죽은 뒤에야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당당한 국사(國士)로 후일 광복을 꾀하지 않고, 어찌 스스로 죽을 수 있겠느냐?

(문) ‘창의록(倡義錄)’을 장황하게 저술한 것은 무슨 소용이 있어 그랬으며, ‘불망록(不忘錄)’은 무슨 의미가 있어 그렇게 수다하게 적었는가?
(답) 창의록은 충분(忠憤 충의로 생긴 분한 마음)을 못 이겨 그렇게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그것을 너희 정부에 전달하려 했던 것이요, 불망록은 내가 거사한 지 오륙년에 친구들에게 많은 보조를 받았으므로 후일 갚고자 기록했던 것이다.

(문) 사실 심문은 끝났으니 최후로 자기에게 이익이 될 말이 있으면 진술하라.
(답) 내가 이제 포로가 되었으니 빨리 죽여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무슨 자신을 유리하게 할 말이 있겠느냐? 다만 한이 되는 바는 이등박문이 안중근(安重根)의 손에 죽었는데 나는 사내(寺內正毅 데라우치)를 못 죽인 것과 우리나라의 오적(五賊)과 칠적(七賊)을 못 죽이고 또 동경(東京)과 대판(大阪)에 불을 지르지 못한 것뿐이다.
(재판장) 선고를 내릴 터이니 기립하라.
(이석용) 기립은 경의를 표하는 것인데, 나는 원수에 대해 경의를 표할 수 없다.

이때 강제로 일으켜 세우니 이석용은 크게 노하며 "나의 마음은 불기(不起 일어나지 않음)다"고 하자 재판장은 그대로 사형을 선고하고 나갔다.

이석용은 이에 불복 공소(公訴) 하였으나 공소가 기각되어 1914년 4월 4일 37세의 혈혈 청년으로 대구형무소에서 교수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할아버지 무덤을 지키는 손자 이명근 선생
 할아버지 무덤을 지키는 손자 이명근 선생
ⓒ 박도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국가보훈처의 공훈록과 정재 이석용 선생 기념사업회 발간 ‘정제 이석용 선생’ 이태룡 지음 <의병 찾아가는 길 2> 등을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태그:#호남의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