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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일이 없으면, 한 달에 한 번 꼴로 쿠하와 저는 전라도 광주에 있는 시댁으로 짧은 여행을 떠납니다.

 

일년에 60일 가량 광주에서 머무는 저에게 주변 친구들은 멀리 있는 시댁에 무에 그리 자주 다니냐고, 임신 8개월에 힘들지도 않느냐고 대신 걱정들을 해 줍니다만, 제가 부모님께 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하면서도 가장 큰 선물은 쿠하의 재롱을 보여드리는 것 뿐이라, 아이가 어렸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다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몸이 힘들지 않은 건 아닙니다. 아이를 데리고 고속버스로 4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어서, 대개 춘천에서 서울에 있는 친정을 거쳐, 하룻밤 쉬었다가 가장 빠른 기차로 움직입니다.

 

쉬어가는 정거장 숫자를 세서 5분이라도 덜 탈 수 있는 기차를 타되, 표 사는 곳에서 손님이 많지 않은 맨 끝 객차 '자유석'으로 달라고 합니다. 운임도 할인되고, 아이가 소란스럽게 해서 남들 괴롭게 하는 걸 최소화 할 수 있어서 그렇게 합니다만, '역방향'보다 '자유석'이 더 좋은 건 대부분 비어있는 평일의 '동반석' 때문입니다. 

 

한 사람 값으로 넓은 자리를 차지하는 게 살짝 미안하기도 하지만, 아이와 마주보고 앉아서 간식도 먹고, 그림도 그리면서 놀며 가기 좋은 자리입니다. 광주는 주변에 둘러볼 곳이 많아서 집안에 콕 박혀있게 되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쿠하, 저와 태중의 아기 까이유(태명)까지 삼대 네 사람은 담양, 장성, 강진, 장흥, 보성, 함평 등 전라도 곳곳을 누빕니다. 어머니 말씀대로 '서울 촌년'인 저는 결혼을 한 뒤로 바다가 보이는 강진 백련사며 보성 녹차밭에도 가보고, 해마다 오월이면 담양 대숲으로 댓바람을 쐬러 갑니다.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의미를 지닌 소쇄원 제월당(주인장이 독서하던 곳이라는데 정말 너무나 탐나고 욕심 나는 집) 툇마루에 앉아 떨어지는 꽃잎을 보는 것도 좋고, 문을 들어올리면 사방이 확 트이는 광풍각에 누워 대나무 잎이 불어주는 봄바람을 맞아도 좋을 그런 봄날.

 

장인되는 임억령을 위해 서하당 김성원이 지은 식영정과 송강 정철이 '사미인곡'을 쓴 송강정(죽녹정)을 미뤄두고 그동안 가보지 못한 명옥헌 원림과 환벽당 그리고 광주호 버드나무들을 보러 갑니다.

 

식영정에 가면 먼 훗날 쿠하 남편될 이가 장모인 저를 위해 이런 정자 하나 지어주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도 가져봅니다. 문화재에 그러면 '절대로' 안 되겠지만, 어머님은 식영정 소나무에 수목장을 하고 싶다며 밤에 몰래 와서 묻어달라고, 며느리된 저에게 살짝 부탁하신 일이 떠오릅니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시간이 평소보다 길었던 이번 소풍에는 담양 대나무숲 테마파크와 죽녹원, 죽물박물관 등 아무리 바빠도 셋 중 하나는 꼭 들러서 보고 오던 대나무 삼총사조차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명옥헌으로 들어가는 마을 왼쪽에는 '인조대왕 계마행(仁祖大王 繫馬行)'이라는 별명이 붙은 후산리 은행나무가 서 있습니다. 조선시대 인조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전국을 돌아보다가 명옥헌 주인장 오희도에게 들렀을 때, 인조대왕이 말을 매어둔 나무였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하는데, 수령이 300년도 넘은 거목입니다.

 

말 맨 나무는 차 안에서 슬쩍 구경하고 명옥헌 너른 뜨락에서 반듯하게 잘 지어진 정자와 해마다 피고지는 들꽃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오후를 보냈습니다.

 

 

송이 채 뚝뚝 떨어진 동백꽃이 배롱나무가 에워 싼 연못가에 빨간 점처럼 흩어져 있습니다. 보리출판사에서 나온 세밀화 시리즈에서 익히 보아서 이름을 아는 동백꽃이 반가웠던지 쿠하는 덜 마른 꽃송이 하나를 덥석 주워서 내밉니다. 아이가 꽃이름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게 된 어머님은 갑자기 '쿠하할머니'에서 '숲해설사'로 변신합니다. 
 
홀씨를 달고 버티는 민들레를 후~ 불게 해 날개달린 작은 씨앗을 멀리 날아가게 하고, 어린 순은 나물도 해먹는 자운영이며 꽃이 작아서 카메라에 담기도 힘든 개구리발톱, 무리지어 보랏빛을 내뿜는 작은 금창초와 애기똥풀까지. 쿠하 눈에 보이는 작은 풀꽃들이 하나둘 제 이름을 찾아갑니다.
 
쿠하가 소화하기 어려워 보이는 생소한 이름과 꽃이 발아래 나타날 때마다 반복해서 가르쳐 주시는 바람에 저까지 옆에서 따라 외우게 됐습니다. 애기똥풀 잎을 꺾으면 노오란 아기 똥 같은 수액이 나와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설명하며 점점 황갈색으로 변하는 수액을 보여주시니 외우지 않을래도 자연스레 외워지더군요.  
 
여름이면 분홍빛으로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백일홍이 만발하는 배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한여름에 명옥헌 원림에 오면 눈도 마음도 배부를 것 같습니다. 소쇄원에 이어 마음에 드는 정자 2위에 링크된 명옥헌을 뒤로 하고 근처 명지미술관, 명지원으로 향합니다.
 

사진작가인 남편과 음악을 전공한 아내의 숨결이 곳곳에 닿아 있는 명지미술관은 대나무 고장에 있는 공간답게 미술관 뒤로 얕은 대나무 숲을 두르고 있습니다. 너른 잔디밭에 어른들은 들어갈 수 없지만, 아이들에게는 열려 있습니다. 조각 작품이 여럿 서 있는 잔디밭에서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 놉니다. 손으로 작품을 만지는 아이가 있어도 딱히 제지하는 이가 없습니다. 엄격하게 통제하는 미술관 나들이가 싫은 엄마들에게 소개해 주면 좋을 그런 편안한 집입니다. 

 

좋은 길을 두고도 쿠하는 경계선을 넘나들며 걸어갑니다. 엄마가 눈에 힘주면서 말하면 무서운 줄도 알고, 평소에는 꽤 말을 잘 듣는 쿠하가 아무리 만류해도 소용 없는 때가 이런 길 앞에서 입니다. 다행히 아이들에게는 허용된 잔디밭이라 더는 잔소리 하지 않습니다.

 

미술관 밖에서부터 유키 구라모토의 'Lake Louise'가 흐릅니다. 캐나다에 있는 루이스 호수의 아름다움을 그린 편안한 피아노 곡이 조용한 농촌 마을을 덮습니다. 기와가 얹어진 나무대문으로 들어오자마자 쿠하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조그만 바위처럼 생긴 야외 스피커에서 나오는 피아노 소리가 귀에 따갑지도 않은지 쪼그려 앉은 채로 한참 동안 귀를 기울입니다. 

 

실내 연주가 가능한 무대 외에도 명지미술관에는 야외 음악당이 마련돼 있습니다. 미술관이 주최하는 각종 음악회를 위한 무대는 평소에는 아이들이 뛰어 놀 수 있는 열린 공간인데, 근사한 무대 조명이 설치돼 있어 기회가 된다면 저녁 음악회도 구경하고 싶어집니다.

 

식당으로 쓰이는 건물 한 쪽에 마련된 실내 무대에는 쿠하보다 큰 스피커와 그랜드 피아노가 있어 아이를 흥분하게 합니다. 말릴 겨를도 없이 피아노 앞으로 달려가 의자에 걸터앉아 뚜껑을 열어달라고 조릅니다. 다른 손님들에게 방해될까 얼른 끌어내리지만, 아이는 내내 아쉬워합니다.
 
"엄마, 으음~ 맛있는 걸~"
 
명지원 찻집은 대청마루에 방이 셋 딸린 남도의 전형적인 일자형 집입니다. 문을 닫으면 각방이 닫힌 공간으로 조용히 차를 마실 수 있고, 답답한 느낌이 싫으면 방문을 열고 전체 공간이 탁 트이게 할 수 있어 좋습니다.

 

툇마루는 윤이 반질반질해서 쿠하가 양말을 벗고 다녔는데, 이 방 저 방 탐색하러 돌아다니느라 딸기주스도 뒷전입니다.

 

쿠하와 키가 비슷한 오래된 가구를 만지기도 하고, 깨뜨릴까봐 조마조마한 도자기들을 들여다보기도 해서 엄마는 두 번째 우려낸 맛있는 녹차를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얼른 원샷에 마셔야 했습니다.

 

할머니와 엄마가 마시는 녹차를 마시고 싶었는지 찻잔을 들고 조릅니다. 소꿉놀이 하듯 제법 차맛을 음미하더니, "으음~맛있는 걸" 하고 말해서 어른들을 배꼽 잡게 만듭니다.

 

미술관 곳곳을 둘러보고 서둘러 환벽당으로 향합니다. 송강 정철이 낚시를 했다는 조대 위, 벽오동이 둘러쳐진 환벽당에서 문신 김윤제는 정철과 김성원 등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물소리 바람소리 흐르는 정자에 앉아 글 읽었을 노스승과 젊은 제자들의 모습을 상상하려는데 개 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종자를 알 수 없는 강아지 세 마리가 쌍둥이처럼 닮은 모습으로 반갑게 꼬리를 흔듭니다. 쿠하는 기겁을 하고 엄마 뒤로 숨고, 멍멍이들은 환벽당 계단 중턱까지 배웅을 나옵니다. 관광객에게 익숙해서 그런지, 아니면 홈 그라운드여서 그런지 강아지들이 여유만만 유유자적, 제대로 환벽당 풍경을 누립니다.

 

 

 

 

누군가 애써 알려주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만큼 소박한 임진왜란 의병장 김덕령 장군의 생가 앞에는 광주호 생태공원이 있습니다. 아이들 데리고 현장학습 오기에 딱 좋을 곳이지만, 쿠하에게는 아직 이른 것 같아 버드나무만 구경하고 왔습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큰 버드나무는 처음 봅니다.

 

'일송·일매·오류(一松·一梅·五柳)'라 하여 마을을 상징하던 소나무 1그루, 버드나무 1그루, 왕버들 5그루가 있었으나 현재는 왕버들 3그루만 남아있습니다. 쿠하아빠가 쿠하만큼 어렸을 때 어머니가 데리고 와서 사진을 찍어주셨다는 자리에서 저도 기념사진을 찍어줬습니다. 붕어빵 부녀에게 같은 배경을 허락한 400년도 넘게 살아온 왕버들님들께 고맙다는 마음 인사를 전하는데, 쿠하가 보이질 않습니다.    

 

언제 달려갔는지 버드나무 뒤 도로 쪽 난전에 앉아 더덕 껍질을 까는 아주머니를 괴롭힙니다. 아주머니는 장사할 생각은 않고 아이의 물음에 성의껏 대답해 줍니다. 이것 저것 곡식과 산나물 이름이 궁금했던 쿠하에게 팥과 녹두, 더덕과 두릅을 가르쳐주시며 몇 살이냐, 어디서 왔냐 물으시더니 어느새 당신 손녀딸 이야기로 옮겨갑니다.

 

할머니들은 손주 이야기가 나오면 주름살 풍경이 달라집니다.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의 할머니도 새로 태어난 외손녀 자랑을 하시느라 물건 파는 건 뒷전입니다. 할머니와 보낸 한나절, 쿠하는 꽃이름과 산나물 이름 몇 개를 중얼거리다 엄마 젖에 오른손을 찔러 넣은 채로 해거름에 늦은 낮잠에 빠집니다.


태그:#담양 명옥헌, #명지 미술관, #광주, #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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