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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겉표지
 <촐라체>겉표지
ⓒ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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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책이 있었다. 박범신의 <촐라체>가 그 주인공이다. 한국소설이 나오기도 전에 화제가 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데 <촐라체>는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연재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를 모으기에 충분했다.

출간 이후는 어떠했는가? 여전히 뜨겁다. 인터넷으로 소설을 봤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인터넷으로 소설을 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촐라체>를 궁금해 하기 때문이다.

궁금증은 여러 가지겠지만 '어떤 내용이기에 인터넷에 연재가 가능했던 것인가?'가 대표적이다. 박범신이 이모티콘 등으로 소설을 꾸미지는 않았을 터,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소통을 했는지는 한국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이라도 궁금해 할 법한 내용이다.

<촐라체>는 글을 쓰는 남자를 통해 말하여지는, 살아가려는 형제의 이야기다. 형제는 에베레스트 서남쪽에 있는 촐라체에 오르려 한다. 평범하게 오르는 것이 아니다. 놀라울 정도로 열악한 장비만을 갖고 남들이 가지 않았던 길로 촐라체의 정상으로 향한다.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은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당장이라도 말리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형제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산을 향해 오른다.

목숨을 건 형제의 등정만으로도 긴장감을 고조시키는데 박범신은 그 이상의 것을 준비했다. 이들의 관계를 평범한 형제가 아닌, 아버지가 다른 형제로 설정한 것이다.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른 형제, 이들은 서로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불편할 것이다. <촐라체>에서 그들의 대화를 보고 있으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데, 그것이 <촐라체>의 흡인력을 더해주고 있음을 물론이다.

한국소설이 자기 안에만 갇혀 있다고? 틀렸다

이러한 <촐라체>가 그리고 있는 것은 어느 세대에나 말을 걸 수 있을 법한, 보편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죽을 위기를 거치면서도 믿음의 끈을 놓지 않고 끝내 자신과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인간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위기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은 그렇다. 누구에게나 희망을 줄 수 있는, 누구나 '그리고' 원하는 모습이다. 박범신의 <촐라체>는 그것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인터넷에 연재되는 동안 <촐라체>가 화제를 모았고 또한 사람들이 꾸준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누구나 듣고 싶어 하고, 누구나 원하는 것을 박범신이 그만의 방법으로 표현했기에 연재를 마치고 책으로까지 나오게 됐을 것이다. 숱한 화젯거리가 되면서 말이다.

누군가는 이모티콘을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인기를 얻겠냐고 말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소설도 아닌데 누가 읽겠냐고 말하기도 했었다. 누군가는 한국소설이 괜한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겠냐고 했었다. 하지만 <촐라체>는 그같은 '말'을 뒤로하고 당당하게 서있다. 마치 촐라체에 오른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그 발걸음으로 한 가지 희망을 얻게 됐다. 한국소설의 가능성이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소설가들이 연재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됐다는 것은 물론, 독자층을 더 넓힐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한국소설이 자기 안에만 갇혀 있다고 했던가? 그것이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고 했던가? <촐라체>가 그것이 틀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현재 네이버에서는 황석영의 <개밥바라기 별>이 연재중이다.
http://blog.naver.com/hkilsan/



촐라체

박범신 지음, 푸른숲(2008)


태그:#박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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