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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유명 작품을 번안해 공연하는 화려한 수입 뮤지컬에 식상한 관객이라면, 이제 소박하고 담백하게 우리네 사는 이야기를 그린 창작 뮤지컬 <빨래>를 보자.

 

진지하되 결코 무겁지 않은 경쾌한 가사와 음악으로 <빨래>는 현실을 정밀묘사하듯 그리면서도, 현실에 매몰되지 않은 인생 이야기다.  

 

뉴타운과 재개발로 점점 골목과 이웃이 사라져가는 2008년의 서울. 그래도 여전히 서민들을 품어주는 반지하 월세방과 옥탑방, 덜컹이는 마을버스는 건재하다.

 

그 안에서 걍팍한 서울살이에 지친 우리 이웃들이 부르는 희망노래, 뮤지컬 <빨래>는 배우의 애드립이 거의 없을 정도로 탄탄한 대사와 두어 번 들으면 흥얼거리게 되는 음악, 연극판에서 다져진 실력파 배우들의 진지한 연기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젊은 연출가 추민주가 직접 극본과 가사를 쓴 <빨래>는 '오륙도' 아버지와 '이태백' 아들이, 이십대 딸과 사십대 어머니가 나란히 마음을 맞추며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뮤지컬이다. 서울살이 45년, 마흔이 다 된 딸의 기저귀를 빠는 주인할머니와 서울살이 6년, 쉬는 날 시간이 날 때 스타킹 아홉 켤레를 몰아서 빠는 주인공 '나영'이의 노래가 여러 세대를 아우르며 공감하게 한다.

 

여자주인공 나영은 서점에서 일하는 스물일곱의 비정규직. 강원도에서 올라와 서울 변두리의 반지하 월세방에 산다. 남자주인공의 이름은 솔롱고. 받은 월급보다 밀린 월급이 더 많은 이주노동자다. 무지개같은 희망을 품고 몽골에서 온 순수 청년 솔롱고는 서울살이 육년만에 나영을 만나 '사랑해요'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전까지 그가 들은 한국어는 "병신새끼, 돈 없다, 빨리해라." 그가 배운 말은 "아파요, 돈 줘요, 때리지 마세요."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눈물나는 이야기

 

마흔이 다 되도록 기저귀 신세를 져야 하는 장애인 딸을 둔 주인할머니 역을 맡은 배우 이정은의 연기는 연기라는 걸 알고 봐도 그저 짠하기만 하다. 장애인 딸보다 먼저 죽을까 염려하는 늙은 엄마의 노래는 장애인 재등록기간을 알리는 무덤덤한 공익근무요원과의 다툼으로 삐져나온다. 극 중 자신의 집에 세 든 사람들에게조차 딸의 존재를 숨겨온 할머니의 설움은 똥기저귀 빨래야말로 딸이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말하면서 빨래처럼 씻긴다.

 

서울 살이 여러 해, 당신의 꿈 아직 그대론가요?

나의 꿈 닳아서 지워진지 오래

잃어버린 꿈 어디 어느 방에 두고 왔나요?

 

빨래처럼 흔들리다 떨어질

우리의 일상이지만

당신의 젖은 마음

빨랫줄에 널어요

바람이 우릴 말려 줄 거예요.

 

당신의 아픈 마음

꾹 짜서 널어요

바람이 우릴 말려 줄 거예요

 

당신의 아픈 마음

털털 털어서 널어요

우리가 말려 줄게요.

 

- <서울살이 몇 핸가요? 2> (추민주 작사, 민찬홍 작곡)

 

 

직원들을 쥐어짜고, 거래처를 골탕먹인 덕택에 주식시장에 상장할 정도로 서점을 키워낸  '빵'의 뽕기 섞인 노래와 유쾌한 서점 직원들의 노랫말, 동평화 시장 3층(실제로 거기에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극 중 '희정엄마'의 역할을 맡은 배우가 얼마나 완벽하게 그곳 분위기를 잘 응축했는지 놀라게 될 것이다)에서 란제리 가게를 하는 '희정엄마'의 푼수끼 넘치는 연기 외에는 특별히 웃을 대목은 없다.

 

오히려 노랫말마다 목이 메는 가사가 한 시간 넘게 이어지는 이 뮤지컬답지 않은 뮤지컬을 칭찬하고 싶은 이유는, 서울이라는 무대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우리네 이야기를 냉정할 만큼 솔직하면서도 희망적으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희망가를 부르자

 

이렇다 할 희망을 품을 여력도, 계기도, 근거도 보이지 않는다는 이웃들, 서울살이에 몸도 마음도 지친 사람들. 주인공 솔롱고처럼 코리안 드림을 품고 온 이주노동자들에게 뮤지컬 <빨래>를 권하고 싶다. 쇼케이스에 이어 연습실을 찾아 두 번 들었더니 열흘이 넘도록 흥얼거리게 되는 희망노래에 더 많은 사람들이 전염되길 바란다. 세상살이, 서울살이, 일상에 지친 이웃들과 함께 '얼룩 같은 슬픔은 빨아서 헹궈버리고, 먼지 같은 걱정은 털어내고' 다시 희망가를 부르자.

 

슬픔도 억울함도

같이 녹여서 빠는 거야.

손으로 문지르고 발로 밟다보면 힘이 생기지.

깨끗해지고 잘 말라서 기분 좋은 나를 걸치고

하고 싶은 말 다시 한 번 하는 거야...

 

뭘 해야 할지 모를 만큼 슬플 땐 난 빨래를 해

둘이 기저귀 빨 때/ 구씨 양말 빨 때

내 인생이 요것밖에 안 되나 싶지만

사랑이 남아 있는 나를 돌아보지.

살아갈 힘이 남아있는 우릴 돌아보지...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깨끗해지고 잘 말라서 기분좋은 나를 걸치고

하고 싶은 일 하는 거야.

 

- <슬플 땐 빨래를 해> (추민주 작사, 민찬홍 작곡)

 

"서울은 힘든 도시, 그러나 소통하면 희망은 있다"

[미니인터뷰] <빨래> 연출가 추민주

- 비정규직이나 이주노동자처럼 뮤지컬에서 만나기 힘든 캐릭터를 선택한 이유는?

"이웃이라는 개념을 가족들과 함께 살 때는 잘 몰랐다. 서울생활을 시작하면서 이웃이라는 걸 생각해 보게 됐는데, 월세를 내면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이웃들이 저런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

 

- 이주노동자 솔롱고의 대사나 표현이 꽤 사실적이다. 실제로 이주노동자를 취재해서 썼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다닐 때 박노자의 책이나 '말해요, 찬드라' 같은 책을 보면서 알게 된 것, 그리고 명동성당과 성공회 성당에서 이주노동자 강제추방반대집회에 참가하면서 알게 된 사실에 바탕했다. 특히 몽고인 친구 아모라를 통해 이주노동자의 생활과 고민, 희망을 듣게 됐다."

 

- 서민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런 내용을 뮤지컬로 만들게 된 계기는?

"아무리 힘들어도 늘 울고 살 수만은 없지 않겠나. 웃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힘을 나타내기에는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정작 추 대표에게 서울살이는 어떤가, 서울은 어떤 이미지인가?

"올해로 서울살이 10년째다. 고향은 아니지만, 완전히 익숙해진 생활 공간이다. 각박하고 못 사는 사람들에게 더 힘든 도시임에는 틀림없지만 서로 소통하게 되면 희망이 있다고 본다. 오늘을 살아갈 만큼의 힘이 있고, 서로를 발견할 때 힘이 두 배가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사람 사이에 희망이 있는 것 아니겠나."

덧붙이는 글 | 낯설었던 이웃들이 빨래를 통해 살가워지는 이야기 <빨래>는 가슴에 남는 노랫말과 대사로 2005년 제 11회 한국뮤지컬대상 작사, 극본상을 수상했다. 2005년 초연을 시작으로 2006년에 이어 세번째 무대에 오르면서 노래가 두 배로 늘었고, 조연들의 이야기에도 살이 붙었다. 3월15일부터 8월 17일까지 대학로 원더스페이스 네모극장 (구 사다리아트센터)에서 라이브 밴드의 반주에 맞춰 장기 공연된다.


태그:#빨래, #뮤지컬 , #이주노동자 ,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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