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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판에 "二0M"이라고 쓰고 자신의 이름이라고 소개하는 이영문 씨
▲ 이영문 칠판에 "二0M"이라고 쓰고 자신의 이름이라고 소개하는 이영문 씨
ⓒ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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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문씨는 자신의 이름이라며 칠판에 '二0M'이라고 썼다. 무슨 뜻일까? 한자와 영어는 시험을 보면 빵점이란다. 자신은 한자도 잘 모르고 더더욱 영어를 몰라도 아무 문제없이 잘살고 있는데 영어를 배우라고 강요하는 것이 매우 못마땅하다고 질타한다. 조기유학을 가서 영어를 배웠다고 모두 출세하는 것도 아닌데 무조건 영어 제일주의에 빠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시작부터 범상치 않은 말투성이다. 나는 평상시 누리편지를 자주 주고받던 아는 사람에게서 태평농 정기교육에 가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이영문씨에 대한 얘기를 이미 듣고 그를 꼭 찾아뵈리라 마음먹었기에 흔쾌히 그의 차에 올랐다.

차는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하다 드디어 사천군 서포면 남해 끝자락에 이른다. 아직 자체 교육장이 없어 남의 건물을 빌렸다. 물론 교육장 앞에는 바다 건너 작은 별학섬이 보이고, 그곳엔 이영문 씨의 '고방연구원'이 있단다. 태평농진흥회는 해마다 3월 1박 2일의 신규반 교육을 하며, 7월 중에는 별학섬 고방연구원에서 하기 수련회를 연다.

대담을 하는 이영문 씨. 그와 밤새워 탁배기를 마시며 한수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 이영문 대담을 하는 이영문 씨. 그와 밤새워 탁배기를 마시며 한수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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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문씨에게 '태평농'에 대해서 물었다.

"생산량을 늘리려고 조기 재배하고, 경운기로 땅을 무리하게 파헤치며, 비료와 농약으로 자연생태계를 파괴한 나머지 인간 스스로 목숨을 위협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고 건강한 농산물을 생산하며, 건강한 삶을 살고자 태평농을 제안한 것입니다.

태평농은 자운영 등이 땅심을 키우게 하고 해충은 천적이 없애도록 하며 흙 속의 미생물의 도움으로 작물이 스스로 자랄 수 있도록 사람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자연 위에 있다는 오만함을 버리고 겸허하게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이지요. 그렇게 태평농은 자연의 힘으로 질서를 만드는 먹이사슬 복원을 해낼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길이고, 우리 후손들이 건강하게 삶을 사는 길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런 얘기를 들은 많은 사람은 "그럼 옛날 원시농법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냐?"라고 비아냥거리기 일쑤였단다. 이영문씨는 강조했다.

"전통농법에서 길을 찾자고 하는 것은 무작정 원시 농경사회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선조의 농법에 담긴 슬기로움을 과학적인 기술과 접목해서 땅심도 되찾고 자연도 살리고 사람이 먹을 만한 먹거리를 만들어 내자는 것이 바로 태평농입니다."

나무를 접목이 아닌 삽목으로 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초보농군 태평농을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강연도 했다.
▲ 백병율 나무를 접목이 아닌 삽목으로 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초보농군 태평농을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강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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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농진흥회 김주상 회장이 인사를 하고 있다.
▲ 김주상 태평농진흥회 김주상 회장이 인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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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젊었을 때 농기계 전문가였다. 그런데 당시 조사를 해보니 기계보다 소가 간 논이 더 잘 됐고, 소가 간 논보다 쇠스랑으로 판 논이 더 잘 됐다. 그 까닭을 알고 보니 농사에는 사람의 손이 되도록 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또 일본서 수입한 농기계는 일본처럼 화산재 땅에 맞는 것이어서 우리 땅에는 맞지 않음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20대 중반부터 이런 농법 연구에 미치다시피 했다.

"1992년 드디어 태평농법을 정리하고 1994년에는 태평농이란 이름도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는 풀밭 때문에 욕을 먹곤 했지요. 경상도 어떤 농사꾼 어른은 저보고 '태피가타도 쌀농사는 잘하더라'라는 말도 했습니다. 게으른 것 같아도 쌀농사 결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해준 것입니다."

그동안의 보람과 아쉬움에 대한 것도 물었다.

"농학박사는 많은데 종자는 우리 토종이 없어지고 외국에서 역수입하여 쓰는데 이로써 우리 농사꾼은 빚만 남았고, 몸에 맞지 않는 농산물을 먹게 되었습니다. 저도 우리 토종 씨앗을 찾아 6백여 종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관리비용 때문에 1백여 종만 남아 그것이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묵묵히 토종 씨앗으로 농산물을 재배해왔는데 이를 서로 사가려고 하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제주도가 원산지인 소귀나무라는 과일나무는 우리나라에선 이미 멸종되었지만 중국에는 '양매'라는 이름으로 남아있고 일본에도 있습니다. 저는 이를 복원하였으며 증식하여 새로운 농사자원으로 농가에 나눠주고 있습니다."

"태평농진흥회 정기교육"에서 태평농에 대해 강의하는 이영문 씨
▲ 이영문 "태평농진흥회 정기교육"에서 태평농에 대해 강의하는 이영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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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문 씨가 "고방연구원"을 세우고 토종 씨앗을 연구를  하는 하동 바닷가의 별학섬. 연구원을 육지에 두자 씨앗을 훔쳐가는 사람이 많아 부득이 섬으로 옮겼다는 뒷얘기다.
▲ 별학섬 이영문 씨가 "고방연구원"을 세우고 토종 씨앗을 연구를 하는 하동 바닷가의 별학섬. 연구원을 육지에 두자 씨앗을 훔쳐가는 사람이 많아 부득이 섬으로 옮겼다는 뒷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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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농을 배우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그동안 배웠던 지식으로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기존 지식은 자신 안에서 다 비워야 합니다. 기차 소리가 '칙칙폭폭'이란 소리를 낸다고 믿으면 다른 소리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지요. 한겨울에도 땅속에서는 미생물들이 활발한 움직임으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이어서 태평농을 배워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많은지 물었다.

"35년 가량 교육과 보급을 해왔지만 꾸준히 태평농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부 사람들이 자신의 욕심을 제어하지 못해 태평농법이 아닌 농약과 비료를 뿌리는 관행농법으로 농사를 지어 태평농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내기도 해서 인연을 끊었던 사람이 꽤 있습니다."

그는 할 말이 무척 많은 듯했다. 강의 중 '하동김'을 아느냐고 물었다. 청중들은 완도김, 광천김 따위는 알지만 하동김은 처음 들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영문씨는 원래 하동김이 있었지만 섬진강댐이 생긴 뒤 생태계가 파괴된 탓으로 하동김은 자취를 감추었다고 말한다.

전 서울대 철학과 교수였던 노학자가 이영문 씨에 대해 말하고 있다.
▲ 노학자 전 서울대 철학과 교수였던 노학자가 이영문 씨에 대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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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소의 아버지는 수소가 아닌 인공수정을 한 수의사라는 얘기도 한다. 거기에 초식동물인 소가 풀이 아닌 사료를 먹는데 사람이 소고기를 먹을 수 있느냐는 얘기도 했다. 겨울 딸기를 먹고 배가 따뜻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리고 제철 농산물이 아니면 그 농산물은 철이 없는 것이라나?

"얼마 전 국제 밀가루 값이 오르자 라면값이 올랐고 그에 대비에 많은 이들이 라면 사재기를 했습니다. 라면 한 개 값이면 두 식구가 하루 먹을 쌀을 살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쌀 자급률이 29%라는데 쌀이 남아돈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지 헷갈리지 않나요?

농사 경쟁력은 농작물에 간섭을 적게 하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적은 원가를 들이고 좋은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다면 이는 우리가 꼭 해야 할 농사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정말 태평농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 세태가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태평농을 배우러 제주도, 강원도처럼 먼 곳에서 몰려오는 분들을 보면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태평농을 알리는 누리집(www.taepyeong.co.kr)
▲ 태평농 누리집 태평농을 알리는 누리집(www.taepyeo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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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밤새워 탁배기를 들며 한 수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아니 스승으로 삼고 싶었다. 교육을 받던 노철학자(전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예수도 석가도 박사도 아니었고 학벌이 없었다. 하지만, 인류에게 구원을 안겨준 위대한 인물이었다. 이영문 선생도 역시 이처럼 박사는 아니지만 위대한 인물이다"라고 말한다.

아직 그 짧은 만남으로 나는 태평농도 농사도 모른다. 하지만, 이영문 그의 내공의 깊이는 짐작할 수 없다는 생각 하나는 건졌다. 그저 깊은 밤에야 집에 돌아온 나는 35년 쌓은 그의 내공, 그 작은 단면을 흐뭇하게 엿보았다는 황홀감에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또 언제 별학섬에 가서 그의 끈끈한 그리고 '황토'스러운 땀내를 맡아볼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태평농, #이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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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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