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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의식이나 전통이라기보단 멕시코에선 아이들이 장난으로 전깃줄에 신발을 던진다고 한다. 북부 지역 도시에 가면 종종 볼 수 있다.
▲ 신발을 왜? 특별한 의식이나 전통이라기보단 멕시코에선 아이들이 장난으로 전깃줄에 신발을 던진다고 한다. 북부 지역 도시에 가면 종종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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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모시요에서 북부 산악 지역 치와와에 가기로 했다. 다름 아닌 태평양 철도를 타기 위해서다. 이 철도로 남쪽 로스 모치스까지 갔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에르모시요로 올 계획을 세웠다. 한국에 있는 자전거 여행 동호회 회원에게 DHL로 새 사진기를 구입해 보내달라고 부탁해 놓았는데 사진기가 날아올 며칠 간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저녁 8시. 터미널에서 차를 탔다. 자전거가 없이 캐리어를 가지고 가니 그 기분도 과히 나쁘지만은 않다. 멕시코 시외버스들은 우등 차량들이 많다. 그래서 가격도 만만치 않다. 800km정도 되는 거리가 530페소. 멕시코 물가를 감안하면 결코 싸지 않은 가격이다. 멕시코에서는 버스든 기차든 제 시간대로 움직이는 걸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인도만큼은 아니겠지만 이곳에서 몇 분 정도의 어긋남은 애교에 속한다. 그래서 미리 시간의 여유를 두고 움직이는 것이 좋다.

터미널의 모든 사람들이 협잡꾼처럼 보인다. 강도 사건 이후 불신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껄렁해 보여도 시선을 피한다. 밤늦은 시각에 탑승하는 유일한 동양인이라 그런지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악의 없는 관심이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들의 눈매가 부담스럽기만 하다.

출발 시간을 30분 넘겨서야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원래 어두운 뒷자리를 좋아하지만 앞자리가 안전할 거란 조언에 혼자서 앞에서 두 번째 좌석에 앉았다. 그런데 안전벨트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 다녀와서 손을 깨끗이 씻는 것과 버스를 타면 꼭 안전벨트를 매는 두 가지 습관에 철저히 교육된 나다. 물론 그 외에 다른 습관은 별로 지키지 않는다. 다만 그 두 가지만 유난히 기억 속에 박혀 있는 것이다.

차가 도로 위를 미끄러지자 이내 승객들은 잠에 곯아떨어진다. 삶의 무게가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 노곤한 얼굴들이다. 통로를 마주하고 내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의 품에 한 두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있다. 아이는 나를 보더니 신기한 듯 쳐다본다.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 안녕. 손을 흔들었더니 웃는 건 아이가 아니라 할머니다. 아이는 어색한 분위기가 싫었던지 다시 할머니 품으로 파고든다. 이어폰을 꽂은 나도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달빛에 반사된 풍경은 삭막함만 보여주고 있다. 치와와가 산악에 있다보니 버스는 완만한 경사를 타고 계속 올라간다. 설풋 잠이 들었다.

고속버스 주행 중간에 내린 다음 길에서 봤던 성모 마리아. 길 가에 이런 모형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크기는 다양하지만 대개 기도하는 예배처로 쓰인다.
▲ 성모 마리아 고속버스 주행 중간에 내린 다음 길에서 봤던 성모 마리아. 길 가에 이런 모형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크기는 다양하지만 대개 기도하는 예배처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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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다. 야밤에 분위기 파악 못하는 젊은 친구 두 명이 '카멜롯의 전설'을 보며 낄낄대고 있는 것이다. 출발 전에 이미 앞자리 녀석에게 좌석을 뒤로 젖히는 문제 때문에 주의를 준 적이 있어서 한 번 더 주의를 줄까하다 이왕 잠 깬 김에 감자칩을 오물거리며 나도 따라 보기로 했다. 스페인어 더빙으로 나오는 게 어색하긴 했지만 이미 본 영화라서 전체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영화가 끝나고 다시 어둠이 밀려왔다. 좌석을 완전히 젖힐 수 없어 불편하게 잠을 청했다. 얼마 후 버스가 멈추고 불이 켜졌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군인이 들어오더니 검사 때문에 그러니 다들 나오란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승객들이 모두 내리기 시작했다. 팍팍 느껴지는 군인들의 권위의식! 군인들은 자신들의 절대권력 앞에 승객들이 따라와 주니 표정도 자신만만했다. 도로를 이용한 범죄가 기승을 부리니 어쩔 수 없는 조치인 건 알지만 도로 한가운데 차를 세워놓고 20분 정도나 새벽바람을 쐬이는 게 과연 효율적이고 배려가 있는 부분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개코를 동원하고 몇 개의 짐을 샘플로 풀어본 다음 이상 없음이 확인되자 승객들은 지시에 따라 다시 차에 오른다. 그리고 또 잠이 든다. 들어다 깼다 반복한다. 차가 직행이 아닌 까닭에 멈췄다 섰다를 반복해서다. 그렇게 지리멸렬한 버스는 출발 13시간 만인 다음 날 아침 드디어 치와와에 도착했다.

치와와 소깔로에 있는 대성당.
▲ 성당 치와와 소깔로에 있는 대성당.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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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시(Taxi) 이용하슈."

터미널 택시 기사들이 말을 걸어왔지만 철저히 함구하며 무시했다. 어눌한 동양청년에게 사기를 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버스를 탔다. 4.5 페소로 아주 저렴하다.

시내로 들어오자마자 숙소를 구했다. 호텔이란 명칭이 무색하게 100페소. 대신 허름하다. 샤워시설과 침대와 보지 않을 것이긴 하지만 TV가 있는 방이다. 아침을 굶었기에 방을 잡자마자 바로 타코를 먹으러 나왔다. 그런데 이곳의 타코는 고기 대신 야채와 치즈가루가 들어간다. 대신 가격은 하나에 3페소.

무료한 오후 시간을 보내기 위해 소깔로 성당 주변을 배회했다. 수많은 비둘기들이 아이들이 조막만한 손으로 던져주는 모이를 받아먹는다. 언제가 이런 적이 있었단다. 누군가 성당 주변 여기저기 불결하게 배설되어 있는 비둘기 똥에 대해 격분한 나머지 독극물이 첨가된 모이를 주었나 보다. 그래서 비둘기가 떼죽음을 당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자비와 긍휼을 미덕으로 여기는 성당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 후 관리감독을 철저히 한 덕에 지금은 멕시코 어느 성당을 가더라도 비둘기 천국이 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런 연유로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떼가 성당과 어울려 있는 모습은 잘 짜여진 한 편의 꽁트 같다는 생각이다.

신자들는 기도하러 관광객들은 구경하러 들른다.
▲ 성당 내부 신자들는 기도하러 관광객들은 구경하러 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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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어느 성당을 가든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떼를 쉽게 볼 수 있다.
▲ 비둘기 멕시코 어느 성당을 가든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떼를 쉽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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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애완동물 강아지 치와와의 실제 원산지인 치와와는 북부산악지대 중심도시지만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뒷짐지고 양반걸음으로 걸어도 넉넉잡아 두 시간이면 시내 구경을 구석구석 다 마칠 수 있다. 거리 곳곳에는 전통 복장을 한 인디오들이 아무렇게나 자리잡고 어둠을 맞이하고 있다. 산악지역이라 날씨가 금방 쌀쌀해 진다. 코를 훌쩍거리는 아이가 걱정이다. 다 해진 장난감과 길에서 먹는 음식만으로 마냥 행복할 수 있다니…. 길 한 가운데서 그렇게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도 안타깝지만 무엇보다 자신들의 오랜 생활환경을 버리고 왔을텐데 도무지 대책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몇몇 옷을 만드는 아낙네들이 있고, 생각해 보니 아버지들이 없는 것 같다. 가장의 부재가 이들을 혹독한 겨울을 나는 중요한 원인이 되는 듯하다.

밤에 벤치에 앉아 바라본 치와와 대성당.
▲ 성당 밤에 벤치에 앉아 바라본 치와와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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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저물었다. 호텔로 돌아가기 전 센트로에 위치한 대성당을 구경하기 위해 벤치에 앉았다.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고 비둘기들도 어느 새 자취를 감추었다. 조금씩 적막해진 도시는 여덟 시가 되자 조용한 호흡만 내뿜는다.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잔잔하면서도 감성을 촉촉이 자극하는 리베라 소년 합창단의 울림이 가슴에 파고들었다.

차고 깨끗한 밤거리, 고즈넉한 성당, 정신없이 달려왔다가 멈추는 순간의 이 여유. 트랙이 돌고 'Sanctus'가 흐른다. 눈을 감았다.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대로 잠에 빠질만큼 영혼은 너무 평안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경험해야 하는가에 대한 보이지 않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멕시코 어느 도시 벤치에 앉아 천상의 소리를 지상에서 듣는다는 것. 그것은 너무나 황홀한 감격이었다. 낯선 곳에서의 혼자만의 사치스런 감정에 시선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몰두한다는 것이 여행자에겐 얼마나 특별한 특권인지.

아발론(Avalon) 음악까지 깊게 취한 다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낯선 거리가 호기심을 자극해 처음 나왔던 길의 반대편으로 숙소까지 돌아가기로 했다. 어둑어둑한 골목길에서는 불을 피워놓고 잡담을 나누는 여인네들이 보이고, 대학생들로 보이는 젊은 친구들은 여럿이 어울려 떠들썩하게 그들만의 분위기에 취한다.

귀여운 애완견의 대표주자인 치와와의 원산지는 멕시코 치와와이다.
▲ 치와와 귀여운 애완견의 대표주자인 치와와의 원산지는 멕시코 치와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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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볼 일 없는 모퉁이 길을 돌아 호텔로 향하는 골목에서였다. 허름하기 그지없는 망토를 걸친 노파와 아들로 보이는 남자가 불도 켜지지 않는 창문 앞에서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이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벽에는 단지 쇠창살로 방범장치를 해 놓은 굳게 닫힌 창문만이 있을 뿐 시선을 잡아끌만한 무엇도 없었다. 두 사람은 우중충하고 불빛도 스며들지 않는 으스스한 골목 한 가운데에서 무엇 때문에 걸음을 멈춘 것일까. 빠른 걸음을 걷던 나는 슬쩍 속도를 낮추고 그들을 훔쳐봤다.

조금 뒤 회색빛 차가운 창문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그들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간다. 여전히 창문에 불빛이 들어오지 않은 채로 말이다. 걸음을 멈추고 보면 의심을 살 수 있어 계속 느린 보폭으로 그들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들은 창문 속 누군가에게 사정을 하는 듯 보였고, 창문 속의 보이지 않는 누구는 흥정을 원하는 것 같았다. '혹시 마리화나?' 머리에 스치는 생각. 하지만 단언할 수는 없었다. 함부로 의심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대로 모른 채 그들을 지나쳤다.

단촐하면서도 왁자지껄한 치와와의 시장.
▲ 시장 풍경 단촐하면서도 왁자지껄한 치와와의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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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도착 두 블록 전. 이번엔 길 모퉁이에서 진한 화장으로 얼굴을 변장하고 허벅지를 훤히 드러내 보이는 여인네들이 나를 노려본다. 내 허리 사이즈는 되어 보이는 부담스러운 허벅지에 패왕별희 뺨치는 거북한 얼굴의 그네들은 유혹이랄 것도 없이 무덤덤하게 뭐라뭐라 빠르고 덤덤한 목소리로 내게 물어온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딱 보니 한 마디로 매춘제의다. 들을 가치도 없는 소리에 냉연히 지나쳤다. 불안한 호기심 때문에 불편한 인생을 살고 싶진 않으니까.

"모가지를 드리우고 / 꼭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암울하고 어둔 현실에서 숭고한 희생을 의연하게 고백하는 내가 닮고 싶은 자의식의 윤동주의 <십자가>. 하지만 성당 뒤쪽에서 물건 매매하듯 이뤄지는 타락행렬. 그들의 십자가는 그저 하나의 문화아이콘으로 장식한 것 뿐일까. 십자가 꼭대기에 걸린 건 쫓아오던 햇빛이 아닌 요염하게 농익은 달이다. 어쩌면 그네들이 저 첨탑 위 높은 십자가에 은밀히 못 박은 건 자신들의 양심이 아닐런지….

마지막 숙소 바로 옆 길을 건널 때 맞은 편에는 '우리 집에 왜 왔니' 대열로 다니는 무서운 10대들이 떼거지로 몰려왔다. 길 전체를 장악하고 있어서 똑바로 마주칠 엄두를 못 낸다. 하지만 나도 강해 보여야 했다. 말총 스타일로 머릴 묶고, 껌을 짝짝 씹으면서 건들건들하게 다닌다. 그러다 괜히 벽에 주먹질을 해대다 세상 참 거칠게 살아왔다는 듯한 초점 맞춘 표정으로 흘겨본다. 좀 싸가지 없게 보이면 어련히 알아서 피할까 싶어서다.

하지만 야밤에 방황하는 열 명이 넘는 10대 무리들에게 괜히 책 잡혀 집단 구타만 아니면 다행. 그들과의 간격이 좁혀지자 폼이란 폼은 다 잡아 놓고 급하게 마찰없는 턴으로 방향을 바꾼 다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걸음 속도를 빨리 옮긴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인상을 쓰면서 괜히 '아이 씨'를 연발하며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 몇 걸음 차이로 나는 호텔로 들어오고 그들은 그대로 지나친다. 애시당초 날 별로 인식하지 않은 듯하다.

전통 복장을 한 채 길 가에 앉아 옷감을 짜고 있다.
▲ 인디오 전통 복장을 한 채 길 가에 앉아 옷감을 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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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 한 복판에 앉아 가족들이 모여 밤을 보내고 있다. 이 거리에 나무 한 그루마다 한 가족이 이런 모습으로 있다.
▲ 인디오 가족들 대로 한 복판에 앉아 가족들이 모여 밤을 보내고 있다. 이 거리에 나무 한 그루마다 한 가족이 이런 모습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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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들리지도 않는 멕시코 뉴스를 틀었다. 눈은 화면을 주시했지만 머리로는 이제 태평양 횡단 열차를 타고 협곡을 지나 쿠퍼 캐년을 본다는 생각에 조금 설렜다. 강도 사건이 아니었으면 어쩌면 이런 기회도 없을텐데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꼭 필요한 것들로만 인생사를 만드는 것 같다. 그런 이치라면 지금 내게 당장 급하게 필요한 피자 한 판이 뚝딱 떨어지면 좋을텐데….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태그:#세계일주, #자전거, #문종성, #비전노마드, #멕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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