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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특별한 감성의 문을 하나쯤 더 지닌 사람이라고 믿고 있기에 내가  시인들과 시에 대해 지닌 외경심은 거의 환상에 가깝다.

 

시인은 시어 하나를 고르는데도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야 할 테지만, 독자에게로 온 시는 인간의 깊은 내면을 뒤흔드는 감동의 울림으로 고통마저 환희로 바뀌리라는 믿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동자 시인으로 시를 쓴다는 김해자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축제>의 시를 읽으니 축제는커녕 위속의 쓴물이 넘어오는 불쾌함과 고통을 억지로 삼키게 된다.

 

그의 시 속에는 애써 외면하고 싶은 일상들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다. 암으로 다 헐어버린 아랫도리를 피 한 방울 섞지 않은 며느리에게 내어 맡긴 채 시한부 생을 힘겹게 살아가는 시어머니, 노동의 고통 속에 시들어 간 수많은 젊음들.

 

너희들이 그 고통을 알기나 하느냐고 함께 고통을 느껴보라고 사정없이 가슴을 휘젓는다. 하지만 그의 시가 안겨주는 고통 뒤에 알 수 없는 순전한 기쁨이 몽글몽글 솟아오름은 무슨 조화일까?

 

그는 극단의 아픔을 체험한 것은 물론이고 그 자신이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그래서인지 고통을 줄줄 읊어내면서도 냉소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달관한 듯한 관조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이미 정신적으로 유사 죽음을 경험한 그이기에 그가 쏟아낸 신음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는 살로 육화되어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는 도구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시인의 눈에 비친 죽음마저도 또 다른 생명을 준비하기 위한 찬란한 축제로 승화한 것이다.

 

축제

물길 뚫고 전진하는 어린 정어리 떼를 보았는가
고만고만한 것들이 어떻게 말도 없이 서로 알아서
제각각 한 자리를 잡아 어떤 놈은 머리가 되고
어떤 놈은 허리가 되고 꼬리도 되면서 한몸 이루어
물길 헤쳐 나아가는 늠름한 정어리 떼를 보았는가
난바다 물너울 헤치고 인도양 지나 남아프리카까지
가다가 어떤 놈은 가오리 떼 입 속으로 삼켜지고
가다가 어떤 놈은 군함새의 부리에 찢겨지고
가다가 어떤 놈은 거대한 고래 상어의 먹이가 되지만
죽음을 삼키는 마지막 순간까지 벙글벙글 춤추듯
나아가는 수십만 정어리 떼,
끝내는 살아남아 다음 생을 낳고야 마는
푸른 목숨들의 일렁이는 춤사위를 보았는가
수많은 하나가 모여 하나를 이루었다면
하나가 가고 하나가 태어난다면
죽음이란 애당초 없는 것
삶이 저리 찬란한 율동이라면
죽음 또한 축제가 아니겠느냐
영원 또한 저기 있지 않겠는가


축제

김해자 지음, 애지(2007)


태그:#김해자 시집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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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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