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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범으로 몰려 27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한 찰스 알렌 쳇맨(가운데 흑인)이 3일 텍사스 주 댈러스 카운티 법원에서 자신의 무죄를 선고한 존 크루조 판사와 포옹을 하고 있다.
 강간범으로 몰려 27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한 찰스 알렌 쳇맨(가운데 흑인)이 3일 텍사스 주 댈러스 카운티 법원에서 자신의 무죄를 선고한 존 크루조 판사와 포옹을 하고 있다.
ⓒ AP/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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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서 새해로 이어지는 긴 연휴 기간 미국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들떴다. 하지만 찰스 알렌 챗맨(47)에게는 고통의 시간일 뿐이었다. 강간 혐의로 27년 동안 감옥에서 보낸 챗맨. 그는 초조하게 DNA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연휴를 보냈다.

재판 과정에서도 27년 간의 옥살이에서도, 자신은 절대 강간범이 아니라고 그는 주장해 왔다. 그동안 세 번의 특별 사면 기회가 있었지만 챗맨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죄가 없기 때문에 사면 받을 이유도 없다고 믿었다. 2004년까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 줄 DNA 검사를 두 차례 했지만 결과는 '판단 불능.' 챗맨은 3년을 더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강간 피해자의 몸에서 채취한 범인의 정액 샘플은 단 한 번밖에 더 쓸 수 없었다. 챗맨은 마지막 시도를 작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시도했다. 이전보다 적은 양의 샘플로도 더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Y-STR이라는 새 DNA 감식법에 대해 알고 난 직후였다. 

알리바이보다 중요한 백인 여성의 한 마디에 99년형

지난 3일 챗맨은 텍사스 주 댈러스 카운티 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자신이 1981년 99년형을 선고받은 바로 그 장소였다.

당시 20세의 배관공이었던 챗맨의 집 인근에서 20대 백인 여성이 강간을 당했다. 경찰이 보여주는 사진에 피해 여성은 챗맨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경찰은 피해 여성이 간호사여서 범인의 인상착의에 대해 실수를 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범인 검거율을 높이는 데 혈안이 돼 있던 백인 검사 핸리 웨이드에 의해 흑인이었던 챗맨의 기소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사건 발생 시각 집에서 수 마일 떨어진 알링턴 시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는 챗맨의 알리바이는 무시됐다. 검사가 제시한 유일한 물증은 혈흔에 남은 범인의 혈액형과 챗맨의 혈액형이 같다는 것이었다. 12명 중 흑인이 한 명뿐이었던 배심원단은 이의 없이 챗맨의 유죄를 결정했다. 

3일 무죄가 확정되자 챗맨은 "(무죄 선고가) 한 편의 농담 같다"며 "끝까지 나를 믿어준 가족과 신앙이 없었다면 나는 27년 동안 싸우지 못했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소감을 말했다. 하지만 그를 변호했던 테리 무어 변호사는 "그는 자신의 일생 전체를 잃어버렸다"며 "미국 사법체계가 얼마나 허술하고 편파적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잘라 말했다.

챗맨처럼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 DNA 감식법 등의 발달로 누명을 벗은 사례가 미국 전역에서 210건에 달하고 있다. 타국의 자유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전쟁까지 불사하는 '자유의 나라' 미국이 자국 시민들의 자유는 강탈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범인의 목소리를 닮았다"... 12살 소년 증언에 억울한 30년 형

1983년 제임스 더글라스 월러는 12살짜리 백인 소년의 강간범으로 지목됐다. 부모가 일하러 나간 직후인 아침 6시에 집에 들어온 한 흑인 남성에 의해 자신이 강간당했다고 소년은 경찰에 진술했다.

소년은 다음날 자신의 아파트 단지에 살던 유일한 흑인인 월러의 목소리가 범인의 목소리와 닮았다고 증언했다. 월러는 소년이 진술한 인상착의보다 키와 몸집이 더 컸지만, 12살 소년의 증언은 재판에서 중요한 단서로 작용했다. 사건 발생 시각 월러가 소년의 집 쪽으로 걸어갔다는 이웃의 증언은 다른 이웃의 증언과 내용이 엇갈렸다. 그러나 이 또한 중요한 증거로 채택됐다.

반면 범행 현장에서 채집된 범인의 머리카락이 월러의 머리카락과 다르다는 점은 애써 무시됐다. 월러에게는 다른 알리바이도 많았지만 대부분 백인인 배심원단은 46분 만에 월러를 범인으로 인정했다. 월러는 30년 형을 선고 받았다. DNA 검사로 그의 무죄가 입증된 때는 23년이 지난 2006년에 이르러서였다.

허위 자백 강요당한 17세 미성년자, 17년간 옥살이

17세였던 1988년 부모를 살해한 혐의로 2년 뒤 법정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마틴 탱크리프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고 있다.
 17세였던 1988년 부모를 살해한 혐의로 2년 뒤 법정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마틴 탱크리프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고 있다.
ⓒ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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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뉴욕 주 롱아일랜드의 대저택에 살던 백만장자 탱크리프 부부가 자택에서 처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됐다. 이 사건은 당시 17세이던 아들 마틴이 범인이라고 밝혀지면서 미국 전체는 물론 세계적인 화제가 됐다.

하지만 경찰이 제시한 증거물 중 가장 확실한 것은 마틴의 부분적인 자백뿐이었다. 마틴은 경찰의 거짓말에 넘어가 허위 자백했다고 밝혔지만 배심원단은 마틴의 유죄를 결정했다.

또 다른 용의자였던 탱크리프 부부의 동업자 스튜만이 범인임을 의심케 하는 많은 정황 증거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사건 장소에 가장 늦게까지 있었고, 사건 직후 별 다른 이유 없이 다른 주로 떠났다는 사실은 재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마틴은 이로 인해 25년형을 선고 받고 17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지난 2일 뉴욕 주 검사인 토마스 스포타는 "마틴 탱크리프에 대한 모든 기소 내용을 철회한다"고 밝혀 그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 비록 마틴은 DNA 검사를 받진 않았지만 그의 변호사 등에 의해 밝혀진 새로운 증언과 증거들은 마틴이 풀려날 수 있도록 했다.

'억울한 옥살이' 60%는 흑인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람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1992년 뉴욕시의 여쉬바대(Yeshiva University) 법학과를 중심으로 공익 법률 시민단체 '무죄 프로젝트(Innocence Project)'가 탄생했다.

이 단체에 따르면 뿌리깊은 인종 차별, 목격담에 의존한 기소, 검증 없이 채택한 위증, 허위 자백, 부실한 감식법 등에 의해 자유를 강탈당한 미국 시민이 10여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미 석방된 210명에 이어 끊임없이 '무고한 기결수'들이 풀려날 것으로 보인다. 15명의 사형수를 포함한 이들 210명은 평균 12년, 총 2569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유죄 판결을 받은 나이는 평균 26세로 이들은 인생의 황금기를 죄도 없이 감옥에서 보냈다. 이 중 126명(60%)은 흑인, 59명(28%)은 유럽계 백인, 19명(9%)은 라틴아메리카계 백인, 1명은 아시안, 기타 5명으로 조사됐다. 유럽계 백인이 60.2%, 흑인이 12.1%로 드러난 2005년 미국 인구조사를 감안할 때, 억울한 옥살이를 한 흑인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파악됐다.


절반 이상 배상 못 받아... 기록 삭제 않아 전과자 취급

이들 210명 중 연방 정부나 주 정부로부터 금전적 배상을 받은 경우는 45%에 불과해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

미국 50개 주 중 28개 주에서는 이들에 대한 배상 제도가 아예 없다. 그나마 배상 제도가 있는 22개 주 중에서도 "무죄 석방자가 허위 자백, 플리바겐(plea-bargain, 형량 협상) 등으로 잘못된 판결에 기여했을 때에는 배상을 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고 있는 주가 많다.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람들이 실질적인 배상을 받기는 상당히 까다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무죄를 인정받았다고 해도 많은 주들이 이들의 전과 기록을 말소하는 데 지체하고 있다. 대부분이 강간 혐의를 받았던 이들은 주거 지역이 제한되고, 당국에 전출입 신고를 해야 하고, 일정한 납부금까지 내야 하는 등의 성범죄 전과자 취급을 받고 있다.

오랜 수형 생활로 포크와 나이프 사용법부터 휴대폰·컴퓨터 사용법 등을 새로 배워야 하는 이들은 정상적인 사회생활로 복귀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직업 기술을 배우는 데 민첩한 젊은 날을 강탈당한 이들은 새 직업을 얻기도 요원한 상태.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대한 치료와 배상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억울한 옥살이에서 풀려난 210명의 주별 분포. 오른쪽 위 숫자 1-5, 6-10 등이 풀려난 사람들의 수를 나타낸다.
 억울한 옥살이에서 풀려난 210명의 주별 분포. 오른쪽 위 숫자 1-5, 6-10 등이 풀려난 사람들의 수를 나타낸다.
ⓒ Innocence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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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옥살이는 미국의 국제적 망신"

'무죄 프로젝트'는 억울한 옥살이를 호소하는 이들의 재심 청구와 함께 이미 석방된 사람들의 권익 향상에 힘쓰고 있다. 또 더 이상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시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예방책 마련에도 고심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무죄 프로젝트'는 미국 사법제도의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피해자의 증언과 목격담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기소 행태, 배심원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재판 진행 등을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 주의 사법부에 형사 사법제도 개혁 위원회 설치 ▲범인의 DNA를 감식할 수 있는 물증의 보존 기한 확대 ▲기결수에 대한 DNA 감식 접근권 확대 ▲부당한 옥살이에 대해 연간 5만 달러로 배상 증액 ▲허위 자백을 막기 위한 모든 수사 절차 전산화 등이 '무죄 프로젝트'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 내용이다.

텍사스 주 상원의원 로드니 엘리스는 지역 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억울한 옥살이는 미국의) 국제적인 망신"이라며 "'무죄 프로젝트'의 노력에 부합해 미국 사법제도를 개혁해 나가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망신을 망신이라고 아는 조직은 진보할 수 있다. 문제는 망신을 망신이라고 알지 못하는 조직이다. 진보당 조봉암 사형, <민족일보> 조용수 사형, 인혁당,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등 수많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망신엔 대책이 없다. 미개한 사형 제도와 권력의 발등을 핥은 사법부로 인해 재심의 희망조차 없이 사라진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는 기결수들의 재심과 미국 사법 제도 개혁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공익 법률 시민단체 '무죄 프로젝트'(Innocence Project) 홈페이지.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는 기결수들의 재심과 미국 사법 제도 개혁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공익 법률 시민단체 '무죄 프로젝트'(Innocence Project) 홈페이지.


태그:#DNA 감식법, #감옥살이, #인종차별, #무죄 프로젝트, #자유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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