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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타니 겐지로 님 책이 이번에 새로 나왔습니다.
▲ 겉그림 하이타니 겐지로 님 책이 이번에 새로 나왔습니다.
ⓒ 양철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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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우리와 안녕하려면
- 글 : 하이타니 겐지로
- 그림 : 츠보야 레이코
- 옮긴이 : 햇살과나무꾼
- 펴낸곳 : 양철북(2007.12.14.)
- 책값 : 9800원

(1)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

지난주 토요일, 도서관에 놀러 온 동네 아이들이 보드게임을 한창 하다가 저희끼리 속닥속닥 하더니 책상 서랍을 몰래 뒤지며 키득키득 합니다. 살며시 웃음을 띠면서 “이것 주웠어요. 땅에 떨어져 있었어요” 하고 말하며 ‘타 먹는 커피봉지’를 흔듭니다. 그러고는 그 커피를 타서 마시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은 저희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모르리라 생각했을까요. “그게 왜 땅에 떨어져 있는데?” 하고 묻지만, 아이들은 능구렁이처럼 모르쇠로 밀어붙입니다.

… “공부할 수 있는 놈한테는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지만, 슬픈 일이 하도 많아서 공부 따위가 손에 잡히지 않는 놈한테는 슬픈 일을 같이 걱정해 주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잖아. 우리 학교에 그런 선생님이 있나?” ‘돼지’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선생님은 하나도 없었다. … (14쪽)

이튿날, 동네 아이들이 컵라면을 들고 옵니다. 도서관에 놀러 오면서 책 읽을 생각은 조금도 안 하는 아이들. 컵라면에 물을 받더니 책으로 뚜껑을 받칩니다. “책은 종이로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하면 책이 다치잖아요” 하고 말해도 못 들은 척. 그러면서 나보고 “나무젓가락 주세요” 하고 말합니다. “내가 나무젓가락을 왜 줘야 하는데? 그리고 나무젓가락을 왜 써야 하는데? 한 번 쓰고 버려지는 나무젓가락을 왜 써야 하는데?” 하고 말하지만, “더럽잖아요!” 하고 말하기만 합니다.

얼마 뒤, 바깥나들이를 다녀온 옆지기가 아이들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서 따끔하게 나무랍니다. “여러분은 친구네 집에 가서도 이렇게 해요? 친구네 집에 가서도 냉장고를 뒤져서 마음대로 먹을 것을 다 꺼내먹고 서랍을 뒤져서 자기 것으로 가지고 해요? 도서관이 뭐 하는 곳이에요? 책도 안 읽으면서 그렇게 놀러만 오는 곳이에요? 지난번에 어질러 놓은 것도 하나도 안 치우고 가고. 그렇게 하려면 앞으로 도서관에 오지 마세요!”

… “어느 나라 사람이든 하면 할 수 있어. 일본인을 이기는 조선인이 나타났지. 더러는 좋은 일본인도 있었지만, 못된 일본인이 더 많았어. 일본인을 이겼다고 몹시 구박을 하더군. 나는 고집이 셌기 때문에 아무리 구박해도 꿋꿋이 연습해서 시합에 나갔지. 그리고 조금씩 이름이 알려졌지.”

다들 남자의 억센 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독일 선수가 왔을 때 최초로 국제 시합에 나갔지. 기뻤지. 열심히 해서 결승전에서 3등으로 들어왔어. 일본, 독일, 조선의 순서였지. 일본 국기가 올라갔고, 그리고 … 그러고 나서 올라간 것은 역시 일본 국기였어. 나는 울었어. 관중들은 기뻐서 우는 줄 알았겠지만, 나는 분해서 울었다. 그 뒤 난 수영을 그만뒀어.” 내 목이 꿀꺽 울렸다. “내가 다시 수영을 하게 된 것은 소순이가 수영을 하면서부터야. 오랫동안 나는 저항해 왔지. 오랜 저항이었어.” … (36∼37쪽)

아이들은 도서관 전화로 장난전화를 걸기도 했습니다. “장난전화하려면 전화 쓰지 마세요”라 말해도 “뭐 어때요?” 하면서 스스럼이 없는 아이. 왁왁 소리를 지르고 손찌검을 하거나 회초리를 들어야만 말을 들을까요. 부드러이 타이르는 말은 귀에 꽂히기는커녕 한 귀로 빠져나가거나 아예 귀로 들어가지도 못할까요.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들은 다른 동무한테 전화하면서, “○○야, 너, 왕따 시키고 싶은 애 있으면, ○○로 데리고 나와”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이 말이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그저 장난으로 또는 재미로 다른 동무를 따돌리면서 재미있어 하는지.

… 얼마 후, 선생님이 벌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국기게양 때 언제나 등을 돌리고 있는 것도 벌을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는 얘기도요. 우리가 교장실에 몰려가려 하자 선생님께선 말리셨죠. 그리고 조금 쑥스러운 듯이 말씀하셨어요. “만일 나를 위해 뭔가 해 줄 생각이 있으면 오키나와에 대해 공부해 다오. 그걸로 충분하다.” … (56∼58쪽)

아이들은 도서관에서 보드게임을 하고 나서 심심하면, 그예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어른들 흉내’를 냅니다. 어디서 얻었는지 화장품으로 얼굴을 허옇게 바르고 눈썹을 세웁니다. 저 나이에 벌써 화장놀이, 아니 어른 흉내라니. 그것도 좋은(?) 어른 흉내가 아니라 껍데기만 들씌우는 어른 흉내를. “예쁘면 좋잖아요!” 하는 아이들 눈에는 어떤 모습이 예쁜 얼굴일까요.

곰곰이 떠올리면, 우리들 어릴 적에도 텔레비전 가수나 연예인들을 따라하면서 놀았으니, 이 아이들이 ‘텔미’ 춤을 추면서 노는 일도 자연스러운(?) 문화가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텔레비전 연예인 따라하기가 참말 문화가 맞을까요.

… 하지만 선생님, 스스로 맞서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남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다들 너무나 순순히 규칙을 따르고 너무나 욕망에 약해요. 사친은 그것도 인간이라고 했지만, 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선생님은 결코 우리를 억누르지 않으세요. 그건 선생님께서 이제까지 사람들한테 억눌려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죄송해요, 선생님, 주제넘게 … (66쪽)

어질러 놓기만 하고 조금도 치우지 않는 동네 아이들. 골목길 마실을 하며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을 스치고 지나갈 때 얼핏설핏 흘려듣는 아이들 말이며 몸짓이며 볼 때면, 하나같이 안쓰럽고 걱정스럽고 슬픕니다. 이 아이들은 어쩌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까요. 이 아이들 부모는 집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요.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한 마디라도 하며 지내고 있을까요.

아이들한테 무엇을 던져 주고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하며 살아가도록 이끌고 있을까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교사가 어떤 모습으로 아이들 앞에 설까요. 도서관에 오는 동네 아이들한테 책을 주면서 “너희 담임 선생님한테 드리렴” 했더니, “우리 선생님은 책 안 봐요”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집에서 부모님들은 책을 얼마나 볼까요. 아니, 책을 본다는 생각을 해 볼까요.

(2) 이웃집 아이

옆지기가 동네 아이들을 따끔하게 나무라며 내쫓은 뒤, 성당 반 모임이 있어서 이웃집으로 찾아갑니다. 반 모임에 나오는 분들은 거의 모두 아주머니와 할머니. 오늘은 할아버지 한 분이 있습니다. 1943년에 창영동에서 태어난 뒤 이 동네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할아버지입니다.

“그 집에 불난 적 있잖아요. 그리고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뒤로 이 집을 떠나고 싶지 않더라고요.” 할아버지네 집은, 배다리 골목집들 한복판을 꿰뚫으려는 산업도로 예정터 바로 옆에 있습니다. 당신은 태어나서 자라고 학교 다니기도 모두 이 동네에서 했지만, 부모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도 한 이 동네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당신 딸 아들이 늘  ‘이제 그 낡은 집은 보상 받고 팔아서 우리들(딸 아들) 사는 아파트로 오시라’고 말을 해도.

도서관을 좀더 아늑하고 손쉽게 다가올 만한 곳으로 느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슬그머니 쌓아 놓기도 합니다만, 마음 기울여 찬찬히 다가오는 사람들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도서관지기로 일하는 우리들이 더 애쓰지 못한 탓인지 모르겠어요.
▲ 우리 일터인 도서관 도서관을 좀더 아늑하고 손쉽게 다가올 만한 곳으로 느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슬그머니 쌓아 놓기도 합니다만, 마음 기울여 찬찬히 다가오는 사람들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도서관지기로 일하는 우리들이 더 애쓰지 못한 탓인지 모르겠어요.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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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할머니 혼자 지내세요?” 할머니께선 고개를 끄덕이시더군요. “아드님은 ….” “둘 다 천황 폐하께 바쳤지.” 선생님, 저는 그때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천황 폐하께서 아직 감사의 말씀을 안 해 주셨어. 이웃 오야마 씨네도 외아들 미네요시를 천황 폐하께 바쳤지. 역시 아직 감사의 말씀이 없으셨지.” … (71∼72쪽)

반 모임을 하는 집에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가 있습니다. 옆지기가 이 아이한테 묻습니다. 우리 도서관에 놀러오는 아이들을 아느냐고. 서로 안답니다. 그런데 이 집 아이와 도서관에 놀러오는 아이 매무새가 아주 크게 다릅니다.

이 집 아이는 동네 어른들한테 꼬박꼬박 인사도 잘하지만, 차 대접을 한다며 어머니가 쟁반에 찻잔을 올려놓으면 자기가 손수 들어서 나르고 할머니한테는 커피를 타 드리기도 합니다. 반 모임을 하는 동안 옆에 같이 앉아서 지켜보고 이웃 아주머니와 이야기도 나눕니다. 똘망똘망하면서 참 맑구나 하는 느낌이 절로 듭니다.

… 인도네시아 어린이들은 눈이 크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입니다. 그 눈이 어둠 속에서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날아다닙니다. 나는 한동안 입을 열지도 못했습니다. 아이들은 하루에 몇 번밖에 다니지 않는 기차를 한밤중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어쩌다 도착한 열차에 벌떼처럼 모여든 거죠. 하지만 몇 명의 아이가 얼마만한 돈을 손에 넣을까요?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쫓아옵니다. 나는 아이들의 눈을 똑똑히 주시했습니다. 잊지 않으려고 뚫어지게 보았죠. … (88쪽)

도서관에 놀러오는 아이들 부모는 저녁 늦게까지 집에 안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집에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만 계시다고 했습니다. 아이들네 부모는 두 쪽 모두 장사를 하는데 저녁 아홉 시가 넘어야 비로소 들어온답니다. 아침에도 일찍 나갈 터이니, 그 집 부모와 아이들이 만나는 때는 아주 짧습니다.

이와 달리 반 모임을 하던 집 아이는 아버지 일터가 바로 집이기도 해 언제나 아이와 함께 있기도 하고 어머니도 집에서 늘 아이와 있습니다. 부모와 아이가 성당에 함께 다니고, 아이는 성당에서 피아노 치기도 하고 있어서(일요일 새벽 미사 때 피아노 치기도 했다는군요) 부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훨씬 깁니다. 또, 부모와 아이가 함께 마음과 뜻을 나누는 일거리와 만남자리가 있고요.

… 인도네시아 어린이들은 ‘눈이 참 예쁘구나’ 하고 나는 같은 생각을 몇 번이나 다시 했습니다. 눈이 살아 있구나 생각하고 나서 문득 일본 어린이들을 떠올렸죠. … (100쪽)

월요일 아침, 옆지기 동생이 인천으로 찾아옵니다. 세 사람이 차를 타고 일산으로 갑니다. 옆지기가 닭칼국수를 먹고 싶다고 하여 낮밥을 먹으러 어느 칼국수집으로 갑니다. 낮밥 때가 조금 지났는데도 사람이 많아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우리 앞에 서 있는 아이 둘이 저를 빤히 바라봅니다. ‘뭐여? 이것들은?’ 저도 아이들을 빤히 바라봅니다. 5초 남짓 그렇게 서로 바라봅니다. 이 아이들은 왜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볼까요.

자리가 납니다. 세 사람이 둘러앉습니다. 옆자리에도 아이들이 있습니다. 방학 때가 되어서인지, 어머니가 아이들을 이끌고 나온 집이 많아 보입니다. 옆자리 아이도 저를 빤히 봅니다. 저도 마주봅니다. 수염 안 깎고 머리도 안 깎고 그대로 두는 남자가 드물어서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되는지. 하긴, 길을 가다가 저를 보는 아이들이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저한테까지도 들리는 목소리로’ “남자가 왜 머리를 길러?” “여자야, 남자야?” 하고 묻곤 하더군요.

… ‘마사코는 자벌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127쪽)

2008년에 새로 나올 교과서에는 어떤 그림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만, 2007년에 나온 교과서 그림을 가만히 보면, 아직까지도 ‘집안일 = 어머니 몫 = 앞치마 두르고 밥하기’에다가, ‘집에 있는 남자 = 신문 보며 담배 태우기 = 방에 앉아서 밥상 받기’입니다.

더욱이, 여자는 혼인하면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집안일까지 함께하면서 사회살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바뀌지 않습니다. 아니,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기르는 몫은 오로지 여자한테 넘겨집니다. 아이한테는 어머니가 가르칠 몫과 아버지가 가르칠 몫이 함께 있는데, 두 사람이 함께 가르치고 함께 어울리며 함께 살아간다는 데까지 생각을 이어가는 남자가, 남자들 집안이 드뭅니다. 대학교를 나오고 나라밖 유학을 다녀왔어도 이런 매무새와 생각 틀거리는 고쳐지지 않습니다.

(3) 겨울 안개

낮밥을 먹고 얼음과자집에 들른 뒤 옆지기와 저는 서울 나들이를 합니다. 연세대 앞에 있는 헌책방에 잠깐 들렀다가, 신촌에 있는 술집 ㅅ에 들러 사장님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술집 ㅅ 사장님을 알고 지낸 지 어느덧 아홉 해. 세상 부대끼는 이야기, 사진기 이야기, 사장님 후배가 신림동에 연 문화쉼터 이야기 들을 나눈 뒤 일산 옆지기 부모님 집으로 갑니다.

버스를 탈 때는 그다지 안개가 끼어 있지 않았는데, 수색을 지나고 고양에 접어들 무렵부터 안개가 짙어집니다. 탄현동에서 내리니 십 미터 앞쯤은 뿌예서 거의 안 보일 만큼입니다.

… 나는 되도록이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는 의식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보다는 차라리 10분, 20분이라도 더 아이들과 함께하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 (128쪽)

겨울인데. 겨울에 어인 안개이지? 겨울이면 추워야지 춥지도 않고 웬 안개야? 대한이가 놀러왔다가 얼어죽었다는 소한을 지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올겨울은 ‘안 춥다 안 춥다’ 말이 많은데, 안 추워도 참으로 안 춥네. 기름값이 치솟아 겨울 난방값 걱정이 크다고들 하는데, 이만한 겨울이라면 땔감 걱정은 그럭저럭 안 해도 되지 않나.

… 쳇. 이런 공부를 해서 뭐가 될까. 요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면 입시 경쟁에서 낙오된다고 꽤나 살벌한 말을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선생님이 있다. … 입시 공부도 고등학교나 대학에 들어간다는 목적이 없으면 이 고문과 똑같으리라고 본다. … (152∼153쪽)

서울 나들이를 할 때면, 한쪽에서는 너무 지나치도록 소비물질문명이 넘치고, 한쪽에서는 너무 따돌림받아 쓸쓸한 모습을 보곤 합니다. 지난 성탄절 앞뒤로, 서울 용산역 둘레 모습을 보면, 한쪽에서는 구세군 냄비 딸랑거리고, 한쪽에서는 갖가지 전구를 밝히며 전기를 펑펑 써대고 있더군요.
▲ 서울 용산역에서 서울 나들이를 할 때면, 한쪽에서는 너무 지나치도록 소비물질문명이 넘치고, 한쪽에서는 너무 따돌림받아 쓸쓸한 모습을 보곤 합니다. 지난 성탄절 앞뒤로, 서울 용산역 둘레 모습을 보면, 한쪽에서는 구세군 냄비 딸랑거리고, 한쪽에서는 갖가지 전구를 밝히며 전기를 펑펑 써대고 있더군요.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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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1월을 넘겼으니 2월도 있고 3월도 있습니다만, 앞으로 눈이 몇 차례 더 내릴 수 있을까요. 눈이 내릴 만한 날씨가 될까요. 겨울에 눈 아닌 비만 주룩주룩 내리지 않을까요.

눈 없는 겨울로, 게다가 안개 짙은 겨울로, 날씨가 제정신을 잃어버리고 미쳐가는 우리 땅으로 치닫습니다. 문득문득 드는 생각으로는, 사람이 제정신을 잃어버리니 날씨도 제정신을 잃어버립니다. 사람이 미쳐가니 날씨도 미쳐갑니다.

날씨가 엉망이 되기 앞서 우리들이 마실 물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그지없이 사랑하는 자동차 덕분에, 끝없이 새로 닦으며 늘리는 찻길(고속도로 중심) 덕분에, 쉼 없이 쓰고 버리는 온갖 물건들 덕분에, 우리들은 미국사람 부럽지 않게 갖가지 물질문명을 즐기면서 우리 땅을 병들게 하고 우리 날씨를 미치게 하며 우리 몸을 더럽히고 우리 마음을 무너뜨립니다.

… 가령 우리 엄마는, “아파트란 사람 살 곳이 못 돼. 우리야 5층이라 그나마 괜찮은 편이지만, 12층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안 됐어. 발이 땅에 붙어 있지 않은 느낌은 정신을 불안정하게 하거든.”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한다. 그럼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아파트에서 자란 나나 남동생은 어떻게 되나? 그런 얘기는 무책임하다고 본다. … (156∼157쪽)

하루가 지납니다. 안개는 걷히지 않습니다. 창문 밖으로 뿌연 자국만 보이고 집이며 길이며 사람이며 잘 안 보입니다. 오늘 낮까지도 안개가 이어질까요. 저녁까지도 안개는 걷히지 않을까요. 이 안개는 그냥 안개이기만 할까요. 우리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에서 내뿜는 배기가스와 날마다 먹고 마시며 버리는 모든 쓰레기에서 나오는 먼지가 겹겹이 쌓여 있지는 않을까요.

… 만들어진 걸 즐기는 것은 조금도 나쁜 게 아니다. 만들어진 것 가운데에도 진실한 것이 많이 있는 걸. 하지만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유행만 쫓아다니는 아이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사물을 정확히 꿰뚫어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학교나 선생님이 정한 일을 단순히 지키기만 하는 아이들이 주로 인기가수 뒤꽁무니나 쫓아다닌다. … (173∼174쪽)

어디에서 살아야 할지 답답하지만, 지금 형편으로는 어디로 떠난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없습니다. 어디로 떠난다 한들, 우리 발길 닿는 곳이 굴착기 삽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복부인 지갑에서 홀가분할 수 있는 곳이 우리 땅 어디에 남아 있을까요.

… 내 뜻대로 고생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만 억지로 주어진 고통은 너무나 견디기 힘들다. 지금 학교생활이 지긋지긋할 수밖에 없는 건 우리 스스로 변하는 것을 학교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명령이나 강제로 우리를 변하라고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일주일에 한 번 복장검사라는 게 있다. … (184쪽)

옆지기 동생이 모는 차를 타면서 2005년도 판 길그림책을 살피니, 남녘땅에 새로 닦고 있는 고속도로가 자그마치 열일곱 군데나 되었습니다. 서울-춘천, 평택-음성, 당진-대전, 청주-상주, 서천-공주, 순천-완주, 익산-장수, 고창-담양, 구미-달성, 부산-울산, 기계-신항만, 구미-화산, 대구-부산(2), 목포-순천, 무안-광주, 통영-대전, 서울 외곽.

왜 고속도로로 새 길을 내야 할까요. 새 길을 내야 한다고 해도 여느 국도로 내도 괜찮지 않은가요. 자전거도 함께 다닐 수 있는 길로, 사람들이 두 다리로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길로 닦아야 하지 않을까요.

앞으로 기름을 얼마나 오래 쓸 수 있다고, 자동차만 다닐 수 있는 길을 이렇게도 자꾸자꾸 새로 내고 있나요. 환경을 걱정하는 자동차도 아닌 기름만 먹어대는 자동차인데, 논밭을 갈아엎고 산을 깎거나 굴을 내면서까지 새 찻길을 늘려서 우리 삶터와 우리 몸뚱아리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새 길을 자꾸자꾸 닦아야 나라살림이 커지고 우리 살림도 나아지는가요.

(4) 하이타니 겐지로 님 책 <우리와 안녕하려면>

하이타니 겐지로 님 책 <우리와 안녕하려면>을 다 읽었습니다. 책을 덮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살며시 다시 펼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죽 살핍니다. 읽으면서 가슴에 콕콕 박혔던 대목을 소리내어 다시 읽어 봅니다.

… 학교는 가르치는 일이 지나치게 중시되어, 어린이나 학생들의 목소리가 교사에게 닿지 않는 세계였습니다. 나는 이런 현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교육의 왜곡은 거기에서 비롯되는데…라는 생각에 슬픔이 더해졌지요. … 생각해 보면, 나는 강한 것이나 너무 풍요로운 것에서는 무엇 하나 배운 것이 없습니다. 감히 말하자면 약한 것, 가난한 것에서 생명의 빛을 발견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 (머리말)

아파하는 사람들을 곁에서 보아 왔기에, 아니 겐지로 님 스스로 아파하면서 살았기에, 아니 겐지로 님 스스로 아파하는 만큼 이웃사람들 아픔을 구경하지 않고 어깨동무하면서 아픔을 함께 나누며 살았기에 <우리와 안녕하려면>이라는 책을 조촐하게 묶을 수 있구나 싶습니다.

배부른 사람은 배부른 사람들 마음을 압니다. 힘있는 사람은 힘있는 사람들 마음을 압니다. 배곯는 사람은 배곯는 사람들 마음을 압니다.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사람들 마음을 압니다. 다만, 그저 알 뿐이라면 개구리가 올챙이 적을 떠올리지 못하듯 쉬 잊어버리거나 놓아버리겠지요. 머리와 마음으로 느끼고 알아간 다음, 몸을 움직여서 부둥켜안거나 부대껴야 비로소 ‘안다는 일이란 이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함께 살 수 있겠지요.

자동차 배기가스를 듬뿍 들이마시면서도 찻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동안 이 나라 교통정책과 자동차꾼 마음씀을 느낍니다. 두 다리로 터벅터벅 걸으면서 온삶을 두 다리로 버티며 살아온 여느 사람들 발자취를 깨닫습니다. 팔을 다치고 다리를 다치면서 또 몸살이 나고 고뿔에 걸리면서 고단한 곁 사람들 삶은 어떠할까 돌아봅니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방 '함께살기'(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여러 가지 책과 헌책방과 우리 말 이야기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와 안녕하려면 - 하이타니 겐지로 단편집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츠보야 레이코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양철북(2007)


태그:#책읽기, #하이타니 겐지로, #우리들과 안녕하려면, #청소년소설, #청소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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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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