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나는 깊은 바다 속에 잠들어 있던 고래였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제목에 반해버렸다. 모처럼 서면 단골카페에서 친구와 만나고 오는 길에 D서점에 들렀다. 신간 진열장 앞에 서서 눈으로 맛을 음미하듯 표지를 하나씩 짚어가던 어느 순간 전율이 일었다. ‘나는 깊은 바다 속에 잠들어 있던 고래였다’는 제목이 눈에 꽂히듯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인간이 의식이란 걸 갖게 된 이후 스스로에게 던져왔을 아마도 가장 오래되고 진부한 질문 하나가 내 이마를 쳤다. 나는 무엇인가.


<불> <땅> <바람>에 담은 고통의 삶

 

나는 깊은 바다 속에 잠들어 있던 고래였다는 고백과 마주선 내게 다가온 그 질문은 섣부른 자괴감이나 질책이 아니었다. 그건 내 영혼의 정체성에 대한 단순하고 직접적인 물음이었다. 자신을 과녁으로 삼은 질문을 유보한 채 그날 밤 소설을 통독했다. 기법상 새롭다거나 실험적인 요소 대신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의 정통 서사구조를 따르고 있어 마지막 장까지 술술 읽혔다.


본문 가운데서 제목을 따온 이 번역소설의 원제는 'Anima Mundi'로 '세상의 영혼'이란 뜻이 담겨있다. 작가 수산나 타마로(Susanna Tamaro)는 1957년생으로 이탈리아 국영방송에서 동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94년 ‘마음 가는 대로’를 발표하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타마로는 언론과 사람들의 관심을 피해 산에서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2차대전 참전군인이었던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를 부모로 태어난 발테르라는 주인공이 세상의 혼돈 속에서 욕망과 두려움과 절망을 겪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에 눈을 떠가는 성장소설이다.


전체구성이 <불> <땅> <바람>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발테르의 성장과정을 단계별로 다루고 있다. <불>에서는 의혹과 희망과 열정으로 방황했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땅>에서는 일과 사랑과 돈을 좇는 세속적 욕망을, <바람>에서는 세상이 가해오는 힘에 꺾이고 상처받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견지하는 방식에 대한 성찰을 그려낸다.


한 인물의 성장사이기도 한 이 소설을 관통하는 코드는, 다른 사람한테는 어떤지 몰라도 내게는 고통으로 읽혔다. 놀랍고 뜻밖인 한 가지 사실은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를 때쯤 고통이 곧 악일 수도 있다는 결론에 봉착하게 된다는 거다. 그게 세상과 맞서 참된 삶을 발견해 가는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이라 해도 말이다.


작가는 이 책이 '악'에 관한 책이라고 선언하고, 그 악의 근원을 보여 주는 인물로 안드레아를 설정한다. 발테르가 냉담하고 포악한 아버지로 인해 상처받은 유년을 보낸 것처럼 안드레아 역시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삶의 극한을 치닫게 되는 존재다. 작가는 이 두 인물이 겪는 삶을 예술과 행동, 영혼과 지적사고의 상징으로 대비해가며 그려낸다.


대상에 대한 이해와 용서로 발견하는 영혼의 세계


어린 시절 아버지뿐만 아니라 믿었던 어머니에게서도 사랑과 이해를 받지 못한 발테르는 세상에 대한 반항심으로 날뛰다 정신병동 치료소에 감금되고, 그곳에서 안드레아를 만나게 된다. 사유 능력이 뛰어난 안드레아는 발테르가 지금껏 알던 것과는 다른 차원의 세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자신이 선택된 존재인 것처럼 발테르 역시 여느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특별한 운명을 살아가야 할 존재라는 확신을 심어준다.


치료소를 나온 뒤 발테르는 로마로 가서 작가의 길에 들어서고, 남자를 농락하는 데 프로인 여인에게 순정을 바치기도 하는 등 세상 쓴맛을 보게 된다. 구성상 <땅>의 부분에 해당하는 로마의 삶은 ‘창고의 굶주린 쥐’처럼 먹고살기에 급급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결국 실패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발테르는 늙고 병들어 어린애처럼 무력해진 아버지를 돌보게 된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꺼내놓은 ‘미안하다’라는 한마디를 받아들이면서 아버지와, 그리고 어머니와 화해를 한다. 화해의 순간 발테르가 느낀 건 제 마음속에 품고있던 원망과 증오에서의 해방감이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인간관계의 불화로 상처를 받은 발테르가 스스로 치유의 가능성을 보이는 지점이 그 대상에 대한 이해와 용서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대로 작가의 목소리이기도 한 이 주제는 <바람> 편에서 가족의 몰살로 지옥 같은 삶을 겪은 이레나 수녀를 통해 ‘용서함으로써 용서를 받게 되고 죽음으로 진정한 부활을 얻게 된다’는 말로 다시 한번 제시된다.


발테르와 달리 안드레아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발테르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 안드레아를 찾아간다. 그러나 발테르를 맞은 건 안드레아가 아니라 그의 무덤과 이레네 수녀이다. 치료소를 나온 뒤 외인부대에 들어가 살육병기로 활약했던 안드레아는 과거의 삶과 끝내 화해하지 못한 채 자살을 택했던 것이다.


안드레아가 자살한 곳에서 발테르는 이레네 수녀의 도움으로 자기 영혼의 세계를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나는 지금까지의 내가 아니라 깊은 바다 속에 잠들어 있는 고래들의 호흡이었다. 사바나를 걷는 사자였고 강물을 마시는 사슴이었다. 씨앗이었고 식물이었고 네 발로 비틀거리며 걷는 어린 말이었다. 나는 숨을 쉬고 성장을 하는 우주였다’고.

 

나는 어떤 영혼으로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는가

 

발테르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자각하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는 세상과 맞선 영혼의 정체성에 대한 의미를 독자에게 되돌려준다. 선과 악의 양면성을 지닌 인간이 또한 선악이 공존하는 세상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거기서 인간의 존재가 어떻게 상처받으며 다시 그 상처를 견뎌내는지에 대한 통찰 끝에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는 내가 처음 이 책의 제목을 접하며 떠올렸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나는 어떤 영혼으로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는가.


다시 자문하는 순간, 착각인가, 나는 거친 바람 속에 창창하게 서있는 영혼의 나를 본다. 나는 우둘투둘한 수피를 찢으며 힘차게 뻗어나가는 가지가 되고 가지가 가르는 허공이 되며 허공 너머 하늘이 된다. 내 영혼은 확장된다. 그렇게 나는 어쩌면 무한히 아름답고 강하고 관대할 수 있는 존재, 또 다른 고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 역시 깊은 바다 속에 잠자고 있는 고래였음을 알아채기 바란다. 그리하여 나처럼 고래가 삼킨 나무, 나무가 서있는 벌판, 벌판이 내처 달리는 가쁜 숨소리까지 들었으면 좋겠다.


나는 깊은 바다 속에 잠들어 있던 고래였다

수산나 타마로 지음, 이현경 옮김, 인디북(인디아이)(2007)


태그:#고래, #영혼, #수산나 타마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