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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어린이가 손을 맞잡고 하는 원명초등학교 식의 짝축구. 빠르고 격렬하지 않아 부상도 없고, 성구별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재미난 축구이다. 이 짝축구의 고안자는 이 학교 6학년 3반 담임 윤태호 교사.
 남녀 어린이가 손을 맞잡고 하는 원명초등학교 식의 짝축구. 빠르고 격렬하지 않아 부상도 없고, 성구별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재미난 축구이다. 이 짝축구의 고안자는 이 학교 6학년 3반 담임 윤태호 교사.
ⓒ 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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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 가야금명인 황병기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당신이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으로 취임해서도, 또 음반이 새로 나왔을 때도 직접 전화한 적은 없는 분이기에 우선 놀랐다. 게다가 평소 재치가 넘치고 여유로운 음성이 잘게 떨리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살짝 그분을 오해하기도 했다. 당신 외손주가 책을 냈다고 한다. 그것도 이제 겨우 초등학교 6학년의 어린 손자가 책을 냈는데, 이런저런 수필과 단편소설도 3편이 들어 있다고 한다. 거기까지 얘기를 들었을 때는 속으로 ‘천하의 황병기도 손자 앞에서 약해지는구나’하고 고소를 억눌러야 했다. 그러나 혼자 맛본 재미는 얼마 가지 못했다.

“그런데 내 말은 손자가 아니라, 그 선생이 별다르다는 거야. 애들 글쓰기는 물론이고 자진해서 새벽에 애들을 모아 풍물을 가르쳐. 그 학교 최초로 풍물대도 구성했어. 요즘 세상에 이런 스승 없어. 관심 가지 않아?”

당연히 관심이 갔다. 아파트 사이에 가려져서 하마터면 지나칠 수 있는 서초구 아파트 단지 내에 소담하게 들어선 원명초등학교를 찾았다. 주인공은 이 학교 6학년 3반 담임으로 올해 부임한 윤태호 교사. 조심스레 교실문을 두드리자 문을 열고 맞는 사람은 덥수룩한 턱수염에 옅은 겨자색의 생활한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였다. 부임 초기의 의욕 넘치는 청년교사일 것이란 짐작했건만 그것은 완전히 빗나간 상상이었다.

원명초등학교 윤태호 교사. 덥수룩한 턱수염에 옅은 겨자색 생활한복은 입은 모습이 친근한 동네아저씨 같다.
 원명초등학교 윤태호 교사. 덥수룩한 턱수염에 옅은 겨자색 생활한복은 입은 모습이 친근한 동네아저씨 같다.
ⓒ 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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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호(46) 교사는 이 학교에 부임해 6학년 담임을 맡으면서 아이들과 몇 가지 약속을 했다. 글을 쓰면 제주도 여행을 함께 가고, 한 권 분량을 채운 아이에게는 책을 내준다는 것이 그것이다. 철없는 아이들이라도 책을 내준다는 선생님의 약속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글쓰기는 학급 홈페이지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었다. 잡담이나 주고받는 것이 고작일 것 같은 학급 홈페이지는 아이들의 진지한 생각이 담긴 작품발표장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의 일상은 서로간의 경쟁이나 놀 궁리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모색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물론 그런 동안 선생님은 아이들과 약속했던 제주도 여행을 지켰고, 학급 아이들은 여름방학을 보내면서 선생님의 달콤한 선물보다 스스로 글쓰기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윤태호 교사는 일주일에 3번 새벽에 나와 아이들에게 풍물을 가르쳤다.

풍물은 3반 아이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희망하면 모두 받아들였다. 이 학교로서는 처음 학교 풍물패가 생기게 되어 이런저런 대회에 참가하기도 하니 아이들로서는 신명 날 일이었다. 아파트에 둘러싸인 탓에 시끄럽다는 야박한 민원 때문에 학교측에서는 방음도 갖추는 등 고심도 안고 있지만 아이들은 아랑곳 않고 풍물 배우기에 여념이 없다.

주변 아파트에서 누군가 야박한 민원을 넣어 아이들은 새로 방음설비를 갖춘 시청각실에서 조심스럽게 풍물을 쳤다.
 주변 아파트에서 누군가 야박한 민원을 넣어 아이들은 새로 방음설비를 갖춘 시청각실에서 조심스럽게 풍물을 쳤다.
ⓒ 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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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솜씨라 아직 능란하지는 않아도 풍물이란 것이 단 한 가지 가락만 알아도 치는 이는 종일 땀을 흘릴 수 있듯이 장구와 북을 두드리는 아이들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요즘 아이들은 비록 초등학생이라 할지라도 각종 학원과 과외에 놀 시간이 없다. 실제 초등학교 5학년 정도면 실제로는 중학교 과정까지 진도가 나간 아이들이기에, 학교는 무엇을 새로이 가르치기보다는 관리하는 정도라는 것이 현장 교사들의 토로이고 보면 아이들이 겪는 스트레스도 이만저만하지 않을 것이다.

그 스트레스를 풍물가락에 실어, 키보드를 토닥토닥 두드려 글을 쓰는 재미로 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 학급에서 가장 먼저 원고분량을 채운 김호중 어린이가 <웃음>이라는 소설제목을 표제로 단 책을 냈다.

그리스 신화, 기행문, 수필 그리고 소설까지 망라한 호중이의 <웃음>은 어린 초등학생이 낸 것이라고 웃어넘길 수만은 없다는 것이 놀랍다. 사전 정보 없이 원고 상태로 글을 대한다면 그것이 어린 초등학생의 것이라 선뜻 떠올릴 수 없는 솜씨를 보인다. 글로써 표현하는 재주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호중이가 소재로 삼은 왕따, 노숙자, 종이만두 심지어 영화 <화려한 휴가>에 대한 소감에 이르기까지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에 어린이도 동시대의 일원임을 자각하게 해준다.

책을 이미 낸 두 어린이와 출판을 준비하고 있는 두 어린이들과 윤태호 교사. 왼쪽이 <웃음>의 저자 김호중.
 책을 이미 낸 두 어린이와 출판을 준비하고 있는 두 어린이들과 윤태호 교사. 왼쪽이 <웃음>의 저자 김호중.
ⓒ 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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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중이 수필 중 ‘엄마와의 생각전쟁’은 아이 키우는 사람들에게는 제법 심각한 화두도 제시하기도 한다.

엄마 “너는 가을 하늘을 보면 마음이 맑아지지 않니?”
호중 “아니요. 어른들은 마음이 복잡하니깐 자꾸 맑아지려는 거예요. 하지만 아이들은 마음이 맑아가지고 혼란스러운 것이 필요해요. 폭력적인 거, 그래서 게임이 딱 이어요.”
엄마 “너 스스로 공부하고, 생각하고, 쉬게 하기 위해서 학원을 끊었지 게임을 하라고 끊지 않았어.”
호중 “저는 쉬는 게 게임 하는 거예요.”


특히 호중이 책의 표제이기도 한 단편소설 <웃음>은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좋은 작품이었다. 호중이의 글 솜씨 때문이 아니라, 앞선 수필 등에서 부분부분 보였던 사람에 대한 아이다운 아름답고 맑은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호중이는 애들답지 않게 뛰어 노는 것보다 컴퓨터 게임이나 글쓰기를 더욱 좋아하는 아이다.

그 때문에 식구들은 호중이를 ‘couch potato(텔레비전 중시청자를 가리키는 속어 눈달린 식물처럼 흐느적거리며 텔레비전 앞에만 앉아 있는 인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라고 은근히 놀리지만, 그런 시간을 통해 호중이는 현실을 넘어 상상을 날개를 펼친다고 말한다.

이제는 장래 희망이 소설가라고 말하는 호중이지만, 5학년까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초등학교 교사라면 누구나 갖는 아이들에 대한 애정과 궁리를 통해 호중이 자신도, 교사도, 부모와 세상도 호중이가 글에 재주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김호중이 지은 <웃음>과 김도영이 쓴 <함께>의 책표지. 표지그림은 같은 반 김하나은.
 김호중이 지은 <웃음>과 김도영이 쓴 <함께>의 책표지. 표지그림은 같은 반 김하나은.
ⓒ 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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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중이만 그런 것이 아니다. 호중이에 이어 두 번째로 김도영이 <함께>라는 책을 냈고, 두 어린이가 현재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책표지 그림도 같은 반 친구가 그려준 것이다. 호중이와 도영이 책 표지 그림은 같은 반 김하나은 어린이가 그려주었다. 그 과정에 윤 교사는 직접 문장을 수정하거나 첨삭하지 않았다. 다만 문제있는 부분을 지적하고 같이 토론해서 아이들 스스로 수정하게 하였다.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들이 줄줄이 책을 내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지만 그보다도 그 아이들에게 일생에 커다란 추억과 더불어 전인교육을 실감하게 만든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그것을 단적으로 느끼게 해준 것은 윤 교사와 아이들과의 만남이 끝날 쯤에 생긴 사건 때문이었다. 다음 시간이 체육이라 아이들은 운동장으로 삼삼오오 떼를 지어 나갔다.

인조잔디로 깔린 작은 운동장은 3반과 다른 아이들로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축구라는데 뭔가 이상한 점이 보였다. 그것은 윤태호 교사가 고안한 짝축구였다. 여자와 남자가 손을 잡고 하는 축구로 자연 격렬할 수 없어 우선 부상의 위험이 적고, 남녀 구별없이 모두 축구를 즐길 수 있다는 양성평등의 뜻이 숨겨져 있었다.

두어 시간 나눈 말보다도 윤 교사가 만든 짝축구 하나만으로도 그의 교육에 대해 모두 짐작하고도 남았다. 모처럼 가슴이 뻐근했다. 우리 사회에 윤교사 같은 훌륭한 스승이 존재한다는 것이 다행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태그:#윤태호, #김호중, #짝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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