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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날림으로 사진을 찍던 서러움을 접고 드디어 카메라 하나를 장만했다. 신동품은 아니지만, 사진학과를 졸업한 동네 형의 손끝에서 무수한 작품을 탄생시킨 명기, Canon EOS-5! 이 녀석과 함께할 앞으로의 즐거운 고행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두 손 안에 가득 잡히는 SLR BODY의 충만함은 마치 레밍턴을 장착한 터미네이터의 심정이랄까?

근데 총만 있으면 뭐하누? 총알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인데, 전투에 임하는 사수의 비장한 각오로 렌즈를 점검한다. 28∼105㎜ 번들렌즈가 총알의 전부이다. 완전 초 헝그리모드지만 그나마 총알은 있어 다행이라 스스로 위안하며, 트라이포트와 릴리즈까지 적당한 모양새를 갖추어 본다. 이쯤 되면 묻지 마 관광 아닌가? 누구 말마따나 그냥 가보는 거야∼

창녕의 첫 얼굴, 만옥정공원과 승리의 브이

이 비는 원래 화왕산기슭에 있었는데, 1924년 현 위치로 옮겨왔다. 비 뒤쪽으로 아스라이 화왕산의 연봉이 보인다.
▲ 국보33호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이 비는 원래 화왕산기슭에 있었는데, 1924년 현 위치로 옮겨왔다. 비 뒤쪽으로 아스라이 화왕산의 연봉이 보인다.
ⓒ 남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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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무작정 첫출사를 떠난 곳이 경남 창녕이다. 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으로 꼽히는 그 너른 억새융단에 오늘 밤 큰불을 놓는다고 한다. 화왕산은 옛부터 '불 뫼'라 불렸는데, 이곳에 불이 나야만 풍년이 깃들고 나라가 평안하다고 하여 1995년부터 창녕군과 ‘배바우 산악회’ 주관으로 정월대보름 억새 태우기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화왕산 억새 태우기'는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지역의 대규모 축제라 타지사람들이 그때를 맞추기는 꽤 힘이 든다. 필자도 내심 벼르고 있던 차라 다른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화왕산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화왕산 산행은 크게 창녕읍에서 오르는 길과 관룡사에서 오르는 길이 있는데, 필자는 창녕읍내의 몇몇 유적도 둘러볼 겸 전자로 길을 잡았다. 창녕버스터미널을 빠져나와 조금만 더 발품을 팔면 ‘신라 진흥왕 척경비’가 자리한 만옥정 공원이다. 공원 안에는 흥선대원군이 건립한 ‘척화비’, 통일신라시대 석탑인 ‘퇴천리 삼층석탑’, ‘창녕객사’와 선정비들이 오밀조밀 배치되어 있다.

낯선 불청객을 맞이하는 창녕의 첫 얼굴은 개구쟁이 꼬마들의 수줍음이다.

창녕의 첫 얼굴은 꼬마들의 수줍음만큼이나 설레인다.
▲ 만옥정 공원에서 필자를 맞이하는 꼬마들 창녕의 첫 얼굴은 꼬마들의 수줍음만큼이나 설레인다.
ⓒ 남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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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어디서 왔어요? 사진 정말 찍어요?”

연방 승리의 브이를 앙증맞게 날리는 꼬마 녀석들 탓에 낯선 도시에서의 왠지 모를 불편함이 한순간 훈훈한 온기로 채워진다.

목마산성 아래에 올망졸망한 옛 고분들

뒤쪽 고분이 송현동 고분군이며, 고분군 뒷산 오른쪽의 흰 사선이 목마산성의 성벽으로 짐작된다.
▲ 사적 제80호, 제81호 [교동, 송현동고분군 전경] 뒤쪽 고분이 송현동 고분군이며, 고분군 뒷산 오른쪽의 흰 사선이 목마산성의 성벽으로 짐작된다.
ⓒ 남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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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 나와 화왕산기슭으로 접어들 즈음, 한 무리의 고분군이 눈길을 끈다. 목마산 아래에 위치한 교동·송현동 고분군과 창녕박물관이다. 경주에나 있을법한 커다란 고분들이 창녕읍내에 한 무더기나 버티고 섰으니 바라보는 느낌이 사뭇 이색적이다. 그 옛날 비사벌이 예사 동네는 아니었던 듯싶다.

박물관 입구 정면에는 남방식 지석묘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장마면 유리고인돌이 당당한 풍채를 자랑한다. 금방 마님하고 튀어나올 듯 언제 봐도 듬직한 돌쇠 같은 고인돌이다. 박물관을 둘러본 후 고분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유유히 걸어본다. 도로 건너 편이 송현동고분군이다. 각각 사적 80호와 81호로 지정된 이 고분은 그 옛날 가야국의 하나인 비화가야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현재 복원된 것은 약 30기 정도인데, 축조연대는 대략 5세기에서 6세기이다. 과거에는 100여 기 이상의 많은 고분들이 주변에 널리 분포하고 있었다고 한다. 원래 이 두 고분군은 한몸이었는데, 밀양과 청도를 잇는 24번 국도 탓에 이산가족이 되었다고 할까? 지금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영영 생이별하게 되었다.

오늘 산행은 목마산성을 경유하는 코스이다. 고분군에서 바라다보니 가까운 거리 같아 무턱대고 산을 오른다. 근처에 작은 절집이 있어 처사님께 길을 여쭈었더니 논둑을 따라가다 3번째 처진 소나무에서 곧장 올라가란다.

안내서에는 창녕여중 쪽에 길이 있다는데, 방향이 전혀 다르니 어찌할까 고민이다. 속는 셈치고 처사님께서 일러준 길을 따라갔다. 인적이 드문 산길이라 표지판도 없고 길도 없다. 간간이 산을 헤매는 짐승들만 있을 뿐, 아마 야생동물들이 주로 애용하는 오솔길인가보다.

한참을 죽을 고생을 한 후, 목마산성에 도착했다. 초행길에 정확한 지리정보의 필요성을 다시금 뼈저리게 실감한다. 엄청난 경사를 단번에 치고 올라왔더니 혼비백산이지만 산성에서의 멋진 풍광은 고생한 것들을 잊게 한다. 목마산성은 화왕산의 북봉으로부터 뻗은 지맥에 축조한 산성이다. 성벽에 걸터앉아 아래를 굽어보니 창녕읍이 한눈에 바라다보인다.

24번국도가 관통하면서, 두 고분을 갈라놓았다. 왼쪽 끝 부분에 자리잡은 것이 창녕박물관이다.
▲ 목마산성에서 바라다 본 창녕읍 전경 24번국도가 관통하면서, 두 고분을 갈라놓았다. 왼쪽 끝 부분에 자리잡은 것이 창녕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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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산 아래 자리한 고분군의 모양새가 올망졸망하다. 나지막한 산성이건만 바라보는 눈 맛이 제법 일품이었다. 잠시 땀을 식힌 후, 화왕산성으로 연결되는 주 등산로를 탔다.

오만육천 어욱새의 물결, 화왕산석성

눈부신 역광이라 억새가 더욱 빛난다.
▲ 화왕산성의 억새 눈부신 역광이라 억새가 더욱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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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여럿이 함께여도 좋지만 혼자라도 그리 심심하지는 않다. 처음 보는 낯선 이들과 오며 가며 “수고 하세요” 인사도 주고받고, “조금만 더 가면 돼요” 거짓 섞인 농담도 하면서, 두런두런 얘기 나누다 보니 어느새 큰 산의 깊은 품속으로 성큼 들어와 있으니 말이다. 억새는 가을이 절정이라지만 겨울 한 철 내내 그 눈부심은 계속된다.

동문 근처의 성벽은 견고하게 잘 복원되어 성벽을 따라 종주가 가능하다.
▲ 화왕산성 동문과 창녕조씨덕성비 동문 근처의 성벽은 견고하게 잘 복원되어 성벽을 따라 종주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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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성은 동·서 두 곳에 성문을 두었지만, 서문은 많이 허물어져 거의 흔적이 없고, 지금은 동문만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서문을 지나 동문으로 가다 보면 남북으로 솟아 있는 두 연봉을 간간이 성벽으로 둘러싼 화왕산석성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오만육천 억새평원이 장엄하게 물결쳐온다.

산성을 따라 걷다보면 고운 억새평원이 내내 가득하다.
▲ 동문 근처의 견고한 화왕산성 성벽 산성을 따라 걷다보면 고운 억새평원이 내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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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근처의 성벽은 잘 복원되어 있어 성벽을 타고 능선을 종주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견고히 쌓은 산성을 디디며 걸음걸음 화왕산성에 몸을 맡겨본다. 문 앞에 자리한 작은 난점에서는 막걸리와 파전 굽는 냄새가 향긋하다. 약주 한잔 걸치니, 온몸에 취기가 돌고 따뜻하다. 캬~ 술맛이 절로 난다.

동문 앞의 큰 바윗돌은 창녕 조씨의 이름 유래를 설명한 ‘창녕조씨덕성비’이고, 산성의 움푹한 들판 가운데 ‘연지’가 보인다. 연지 발굴조사를 담당한 경남문화재연구원의 설명으로는 연지에서 출토된 수골은 호랑이·멧돼지의 두개골·하악골로서 머리 부분만 잘라 연지 내부에 넣었을 가능성이 있어 하늘에 제사를 모시던 제의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한다. 아무튼 발굴결과가 사뭇 기대되는 유적 중 하나이다.

붉은 옷의 의인, 홍의장군 곽재우

멀리 배 바위에 솟은 사람들
▲ 화왕산성의 땅거미 멀리 배 바위에 솟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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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의 해는 짧다. 바람이 매몰차다. 어느새 땅거미가 내리고 배 바위에 사람 꽃이 돋는다.

“그해 겨울, 화왕산성은 귓불이 떨어질 듯 차갑고 모질었다. 매서운 칼바람을 뚫고 능선 건너편 배 바위에 겹겹이 횃불이 오른다. 붉은 도포 자락의 홍의장군이 단 칼에 베어버린 것은 산성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 왜군의 목이 아니라, 한껏 겁에 질려 움츠러든 정유의병의 불안과 초조였다. 그의 신출귀몰한 지략과 담대한 용맹으로 의병의 기세는 충천하였고, 오만육천 어욱새 들판은 어느새 왜군의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갔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서 이름을 떨친 의병장 곽재우를 잠시 떠올려 보았다. 이름만큼이나 불기운이 왕성한 화왕산(火旺山)에 붉은 옷의 홍의장군이라, 참으로 어울리는 궁합이 아닌가? 왜군들이 궁합을 볼 줄 알았다면, 화왕산성을 그냥 지나쳐야 했을 것을….

사기충천한 등산객들의 모습
▲ 의병 횃불을 들다 사기충천한 등산객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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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에 오르니 모두 의병이 된 듯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함성을 내지른다. “와와~”

큰 불이 이는 뫼, 비사벌 화왕산성

‘산불조심’ 표어가 곳곳에 만연한데, 멀쩡한 산에 불을 놓아 산불을 낸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모두 자연보호를 소리 높여 외치는 판국에 이렇게 몰상식한 사람들도 있나 싶지만, 세상 모든 일이 다 그 알량한 상식으로 해결되진 않는 법이다. 때로는 뒤집어 생각해보는 것이 순리를 따르는 첩경일 수도 있음을 불 뫼에 불을 놓아 생기를 북돋우는 비사벌 화왕산(火旺山)이 나직이 일러준다.

ⓒ 남병직

뭇 산들이 잠든 음력 정월보름에 화왕산은 불을 놓아 생기를 찾는다.
큰 불이 이는 뫼, 산상의 불의 축제는 얼마만한 세월을 거슬러와
극락정토로 떠가는 반야용선의 뱃머리, 부처님 옷자락에 숨죽이고 있는가?

화왕산 억새 태우기

火山 대가리에
불똥 튄다
산은 머리를 깍고
오만육천 억새 불 밭
사람 꽃 돋아나듯,
火山 대가리에
불 붙었다
산을 팔뚝을 내밀고
억 만 가지 꽃들의
업장이 녹아내리듯,
음력정월대보름
산은 두 손을 모아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한 잎 한 잎 타오르는 불꽃광배 되었다.


- 큰 불이 이는 뫼, 비사벌 화왕산성에서 / 돌방

산은 시시때때 갖가지 모습으로 안겨왔다. 활활 제 몸을 사르는 불 뫼의 장엄으로 타오르다가, 홍의장군 곽재우의 시퍼런 칼끝으로 되살아오고, 음력 정월 휘영청 대보름달님으로 떠오더니, 오만육천 어욱새의 잔잔한 물결로 밀려온다.

그러나 화왕산은 이제 더 이상 지난날의 잔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모든 것들을 녹여버리고도 남을 적멸의 너른 바다에 기꺼이 제 한몸 던져버린 것이다. 화왕산석성의 바람이 잦아들자, 큰 산이 다가와 넌지시 말을 건넨다.

“이봐 젊은 친구, 나는 말일세~ 지난날 산성에서 죽어간 넋들을 이제는 그만 하늘로 돌려보낼 참이야. 관룡사 용선대 큰 부처님의 반야용선을 타고 부처님나라로 영영 떠나보내고 싶다네.”


태그:#화왕산성 , #목마산성, #억새 태우기, #홍의장군 곽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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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지역 대학생문학연합(효가대 난문학회) 동인/ 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 문화지킴이간사/ 국립문화재연구소 복원기술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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