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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소리 소문도 없이 가려는 모양입니다. 발아래 낙엽이 지천이고 앙상한 나뭇가지에는 이미 겨울이 걸려있습니다. 희미해져 가는 만추(晩秋)를 아쉬워하며, 지난 일요일(4일) 이 계절을 닮은 차분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지도만 놓고 보면 경상남도 거창은 대전, 대구, 광주 등 어디에서도 지척인 곳입니다. 그러나 직접 찾아 가서 보면, 아무리 내륙을 사방으로 관통하는 고속국도가 놓였다고 해도 험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여전히 오지 중의 오지입니다.


'죽음의 도로'라는 왕복 2차선 올림픽 고속국도를 타고 거창 나들목을 나와 합천호 방향으로 핸들을 돌렸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양민 학살이 자행된 '거창 사건'의 현장을 찾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언제 찾아온들 의미야 달라질까마는, 우리 현대사의 가슴 아리도록 슬픈 상처를 담고 있어 스산한 늦가을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불그스레하게 옷을 갈아입는 산과 굽이굽이 돌아 넘는 고갯길마다 애절함이 묻어있습니다.


고속국도를 벗어나 산길을 30여 분 동안 오르내리면 거창군 신원면 소재지에 닿습니다. 한국전쟁 중 인천상륙작전이 전격 이뤄지면서 미처 퇴각하지 못한 많은 인민군들이 1948년 10.19 사건(여순 사건) 때 형성된 반정부군과 합세하여 제법 큰 규모의 게릴라전을 전개한 곳입니다. 지리산과 가야산 자락을 근거지로 국군 토벌대에 맞선, 이른바 '빨치산'의 활동 무대였던 셈입니다.


어쨌든 살아남아야 했던 빨치산들과 끝까지 그들을 색출해내 죽여야 했던 토벌대들의 치열한 공방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다름 아닌 대대손손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양민들이었습니다. 밤에는 산짐승처럼 먹을 것을 찾아 마을로 내려왔던 빨치산들에게 시달려야 했고, 낮에는 그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치도곤을 당하는 등 이중의 말 못할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한국전쟁에 중국군이 개입하여 전황이 나빠지고 소탕 작전이 장기화되자, 토벌대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결정을 너무나 쉽게 하고 맙니다. 견벽청야(堅壁淸野, 성벽을 견고히 하고 적이 먹을 곡식을 태운다). 빨치산의 근거지가 돼온 마을 전체를 초토화시키겠다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이 양민들을 지켜야 하는 사명을 지닌 우리 국군에 의해 내려진 것입니다. 이는 곧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으로, 무고한 양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작전이 '충실하게' 전개된 며칠 동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대대적인 학살이 자행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학살당한 사람들 중에 노약자와 부녀자, 그리고 기껏해야 여남은 살 정도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과 주검들을 한데 모아 기름을 끼얹은 후 태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학살이 무차별적이며 의도적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좌우가 극단적으로 대립했던 맹목적인 냉전의 시대에 안타깝게도 힘없는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은 맨 앞자리에서 희생양으로 바쳐져야 했던 것입니다. 이 천인공노할 만행은 자유당 정권과 '반공'을 국시로 한 연이은 군사 정권에 의해 철저히 은폐되었으며, 유족들이 외려 숨죽이며 살아야만 하는 한 맺힌 세월이었습니다.

 

신원면 소재지를 막 지나 신원중학교 옆 도로변에 거뭇한 위령비 하나가 부서진 채 나뒹굴고 있습니다. 이곳이 당시 참혹했던 학살의 현장, '박산골'입니다. 비석 뒤로 주검들을 대충 수습해 남자, 여자, 아이들의 것으로 나누어 합장한 무덤들이 있고, 최근에 허물어진 것을 대신해 세워진 새 위령비가 매끈한 거북돌 등에 업혀 있습니다.


옛 위령비는 누군가에 의해 비문이 패는 등 곳곳에 생채기가 남아 있습니다. 지붕돌과 함께 무덤가에 '여전히' 널브러져 있는 것은 이곳의 가슴 아픈 역사를 후세들이 보고 느끼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왜냐하면 참혹했던 그때의 상황을 '탈색'하려는 듯 그냥 '거창 사건'으로 이름 붙인 것이 무척 생뚱맞고, 건너편 산을 반쯤 헐어낸 자리에 넓게 조성한 묘역과 기념관이 마치 '공원'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거창 사건 추모 묘역은 마치 같은 사람이 설계한 듯 광주민중항쟁의 넋이 서린 국립 5.18 민주 묘지와 닮아 있습니다. 최근(1996년)에 와서야 제정된 특별법으로 인해 조성된 곳으로, 위패를 모셔놓은 위령각과 묘역, 역사교육관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찾는 발길이 뜸한 탓인지, 아니면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인 까닭인지 주변 분위기가 스산하면서도 자못 엄숙합니다.


거창 사건의 역사와 현재를 보여주는 시구(詩句)가 비석이 되어 곳곳에 새겨져 있고, 억울한 사연을 담은 묘비마다에는 가슴 저미게 하는 외침들이 선명합니다. 하나하나 어루만지듯 순례하다보면 눈시울이 붉혀짐과 동시에 백 마디 글과 천 마디 말보다 더 큰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정작 추모객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생화인지 조화인지 알 수 없는 국화꽃들만 지천인 묘역을 나와 다시 신원면 소재지로 들어서려니 아까의 정겨움과는 사뭇 다른 오싹한 느낌이 전해져 옵니다. 그러고 보니 마을 이름인 신원이 '귀신(神)들이 모여 있는 집(院)'이라는 뜻으로, 거창 사건을 굳이 대입시켜보자면 '이유조차 모른 채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이 구천을 떠돌고 있는 곳'이라니 더욱 그렇습니다.

 

학살 사건이 벌어지기 훨씬 전에 마을 이름이 정해졌을진대 이름으로 후세의 역사를 예견하고 경고한 것은 아닌지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늦게나마 특별법이 제정되어 공식적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신원(伸寃)되었다고는 하지만, 살아남은 주민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슬픈 역사의 상처는 여전히 커 보였습니다.


마을 곳곳에 거뭇한 갈색의 나뒹구는 낙엽이 무척 처연하게 보였던 것은 겨울을 코앞에 둔 늦가을 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덧붙이는 글 | 6. 25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한 양민 학살이 이곳에서만 행해진 '특수한' 사건은 아닙니다. 다만 무고한 양민을 대상으로, 불과 하루 이틀 사이에 최소 7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보복성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당시 이 사건을 취재했던 한 외신이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논평한 것은 유명합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늦가을 여행, #거창 사건, #신원면, #양민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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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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