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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참 '늙게' 사는 사람도 많은 모양이다. 예순이 다 된 중등학교 교감선생님이 한 교실의 흙먼지를 청소하라고 한 고3 학생에게 말했더니 그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나이에 내가 이런 걸 내가 합니까?"


흔히 하는 말로 옛날 같으면 장가를 가고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을 수도 있는 나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 어쨌든 최고학년이니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전혀 엉뚱한 소리가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경우 '교사가 먼저 솔선수범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는 책망을 들을 수도 있겠고, '대체 학교 교육을 어떻게 해서 그 모양이야' 하는 비난도 받을 수도 있겠다. 이러한 점을 감수하고도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렇다. 너무나 극적으로 상반되는 경우가 전광석화처럼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년 전에 고적한 시골 동네를 오가는 버스를 탄 적이 있었다. 시골버스답게 당연히 삼십대의 나는 최연소 승객이었고 좌석이 넉넉지 못한 시내버스라 당연히 나를 비롯한 몇몇 어르신들이 선 채로 당시만 해도 울퉁불퉁했던 시골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런데 한 정류장에서 버스에 탄 다수의 어르신들보다 '조금' 더 연세가 있어 보이는 한 분이 버스에 힘겹게 오르셨다. 사실 그분이 서서 가시고 다른 분들이 앉는다 해도 미풍양속을 크게 해치지 않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나를 포함한 몇 명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었고 오십대의 '젊은이'로 보이는 분도 눈에 띄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새로 탑승하신 어르신이 서서히 선 채로 여행을 할 채비를 갖출 때쯤에 한 노인분이 벌떡 일어서서 그 어르신께 자리를 흔쾌히 양보하는 것이 아닌가? 눈치 없는 내가 보기에도 자리를 양보한 그 노인 분은 '마지못해 떨어지지 않는 엉덩이'를 힘겹게 들어올린 것은 절대 아니었다.


뭐랄까, 어린 시절 환갑잔치를 하면서 자신의 부모를 등에 업고 덩실덩실 춤을 추시던 어른들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셨다. 그런데 자리를 양보한 그분의 멘트가 정말 압권이었다.


"나이 육십이면 청춘 아닙니까?"


사실 서두에서 이야기한 그 '나이 많은' 학생의 경우를 듣기 전에도 나는 종종 그 '청춘'의 마음씨를 가진 노인 분을 자주 떠올렸다. 그분의 성함도 사시는 곳도 물론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을 떠올리면 항상 머릿속이 상쾌해지고 세상이 밝아 보여서 참 좋다.


예순의 육신을 가졌지만 '청춘'의 넉넉한 마음씨를 가진 그분을 나는 늘 기억하고 그분을 존경한다.


태그:#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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