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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정치를 만나다>(이다미디어 간)의 저자 박홍규는 참 특이한 사람이다. 그는 법학자이며 영남대 법대 교수다. 우리나라 법체계의 맹점을 비판한 <법은 무죄인가>라는 책으로 백상출판대상을 수상할 만큼 훌륭한 법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는 법학자로서보다 예술평론가, 예술에세이스트라고 말하는 것이 더욱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다.

기자는 <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를 통해 그를 처음 만났다. 그 책에서 그는 고야를 "괴물을 쫓아내기 위해 괴물을 그린 거의 유일한 화가"라고 적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면서 기자는 박홍규의 책들을 찾게 되었다.

사실주의 풍자화가로 유명한 <오노레 도미에>, <내 친구 빈센트> 등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글을 썼는가 하면, <베토벤 평전>을 쓸 만큼 음악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법과 예술>이란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17대 대통령 선거가 코앞에 닥친 하수상한 정치의 계절에 예술과 정치는 어떤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서로에게 어떻게 기능하고 봉사하고 혹은 종속되어 왔는지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저자의 결론부터 말하면,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어떤 예술도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예술이 권력의 시녀로, 정치의 노예로 체제의 수호와 이념의 선전에 봉사할 때뿐만이 아니라 정치로부터 도피하여 자연이나 자기 내면에 빠져 비정치적으로 살았다고 주장하고 평가되는 경우에도 현실에 눈을 감았다는 점에서 역시 대단히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친일이나 친독재 정부의 것만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주의나 내면주의가 더욱 친일적이고 친독재적일 수 있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대중예술의 경우는 그 범주를 더욱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모든 예술이 정치적이다 하여 예술이 모두 정치의 하수인으로서 그릇된 왜곡과 타락을 경험하였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 인간의 삶 자체가, 공동체 사회 속에서의 삶이란 것은 어떤 경우에도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서 따로 영위되고 존속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안에서의 창조적 행위인 예술 역시 정치와 독립되어 생산되거나 취급될 수 없다는 현실을 환기하는 것이다. 바로 그 현실인식의 바탕 위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인간해방의 정신을 가로막는 모든 이데올로기를 거부한 참 예술의 길을 그는 모색하고자 한다.

"예술과 정치의 바른 윤리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예술과 정치 모두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 평화와 복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그것은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여야 할 뿐, 어떤 형태로든 집단주의나 전체주의, 민족주의나 파시즘, 권위주의나 제국주의여서는 안 된다."(위 책 '에필로그' 중에서)

저자는 위에서 경고했듯이 예술과 정치의 만남이 개인주의가 아닌 집단 또는 전체주의와 만났을 때, 그것이 바로 정치와 예술의 불륜이라 말한다. 불륜은 곧 예술의 타락을 부르고 타락한 예술은 자기 스스로를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한다. 그 병든 예술은 스스로도 병들어 자신이 봉사한 병든 시대를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혹여 여전히 고전으로 남아 있는 예술 중에도 그런 사실의 잔재가 숨어 있다면 그것은 그 불륜을 용서할 위대한 예술성 때문이라는 점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바그너가 결과적으로 나치즘에 열렬히 봉사할 만큼 그가 권력 지향적이었고 그의 오페라가 전체주의에 대한 열광적인 찬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살아남아 사랑을 받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그의 예술성 때문이다. 작은 소국으로 분열된 조국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 일평생을 노래한 베르디의 가극이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닌,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남아 있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와 예술의 불륜 혹은 로맨스

▲ 드라마 <쩐의 전쟁>에서 돈 많은 홀아비와의 결혼 때문에 갈등 중인 박진희에게 박신양이 아버지 생각해서 결혼하라며, 그 비사로 예를 든 루벤스의 그림 <키몬과 페로>
ⓒ abcgallery.com
모든 예술이 정치적이고 모든 학문이 그러하듯이 예술도 당연히 정치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예술과 정치를 따로 떼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순수)예술이라 말할 수 있는가?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정치와 예술이 만나는 모습이다.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예술은 정치에 종속된 어용이라는 왜곡의 불륜이었고 정치로부터 독립된 또는 정치에 저항하는 예술, 곧 예술의 인륜은 좀처럼 드물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침략국인 프랑스에 대한 증오 없이, 침략을 당한 조국 스페인에 대한 애정 없이 냉혹한 인간 드라마를 1805년 연작 유화와 판화로 나타낸 고야는,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가장 정치적이면서 종속되지 않는 정치예술의 모범을 보여준다. 정치와 예술이 만나는 모습이 고야와 같을 때, 그것이 곧 불륜이 아닌 정치와 예술의 인륜인 것이다.

전쟁의 비참과 불행을 그린 자크 칼로나 정치풍자화를 그린 오노레 도미에, 피카소 등이 고야의 뒤를 잇는 예술가들이다. 콜비츠, 루오, 그로스, 딕스 같은 화가들과 멕시코 화가로 벽화의 르네상스를 연 디에고 리베라와 오로스코, 시케이로스 등은 그 강력한 정치적 선전성에도 불구하고 인간해방을 추구한 미술의 모범이자 정치와 예술이 만나는 모범이다. 즉 정치와 예술의 로맨스다.

책은 위에 열거한 예술가들을 다루지 않는다. 단지 예술이 정치와 권력으로부터 그 생명을 위협 받을 때, 그 예술의 죽음을 지키기 위해 맹렬히 싸웠던 혁명가 피카소, 모든 권력과 권위를, 심지어는 개인(자신)조차 명성과 평판으로 권력 기관화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일생을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았던 진정한 아나키스트 사르트르를 5장과 7장에서 소개한다.

나치즘의 미치광이 전쟁광 히틀러와 4일 차이로 태어나 반전과 저항으로 히틀러의 광기에 맞선 영화의 영원한 자유인 찰리 채플린, 노래로 세상의 모든 억압과 박해를 거부하며 평화를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배달한 20세기 위대한 뮤지션 존 레논의 삶은 각각 6장과 8장에서 돌아본다.

세계제국의 꿈을 향해 반유대주의 독일 민족주의 가극으로 히틀러의 정신적 스승이 되고만 비운의 오페라 황제 바그너는 3장에서, 언제나 분단된 조국을 고통스러워했고, 그래서 일평생을 조국 이탈리아의 통일을 염원하면서도 스스로 권력이 되기보다는, 뚜렷한 정치의식을 탁월한 예술적 고양으로 녹여낸 진정한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의 가극과 생애는 4장에서 살아난다.

마지막으로 스스로 원했건 그렇지 않았건 자신의 예술과 예술적 작업을 정치에 접목시키고 또한 놀라운 정치적 안목과 감각으로 예술과 정치의 조화를 이룩한 태양화가 루벤스와 낱말의 의미 그대로 진정한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던 괴테를 우리는 책의 맨 앞장과 다음 장에서 만날 수 있다. 소개된 여덟 예술가의 삶과 예술적 업적은 정치와 예술이 만난 로맨스일 수도 있고 불행한 불륜의 적나라한 고발일 수도 있다.

다만 우리가 <예술, 정치를 만나다>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정치도 아니요 예술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와 예술 이전의 것, 곧 인간에 대한 무한한 경의와 사랑, 인간해방에 대한 영원한 자유의지이다. 바로 근대의 여명에서 싹트고 힘겹고 고단한 시대의 불행을 겪으며 겨우 지켜낸 '개인'을 전체주의와 국가주의의 마수로부터 지켜내는 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yes24.com의 문화웹진 '채널24'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예술, 정치를 만나다 - 위대한 예술가 8인의 정치코드 읽기

박홍규 지음, 이다미디어(2007)


태그:#정치, #예술, #박홍규, #정치예술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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