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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전시관 입구
ⓒ 김상민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위치하여 19개의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동물원을 포함하고 있는 스미스소니언 인스티튜션(Smithsonian Institution) 중에서 국립 자연사 박물관(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 내에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소개하는 한국 전시관(Korean Gallery)이 지난 6월 8일 일반에 공개되었다.

스미스소니언의 보도자료와 그것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국내외 각 언론기관의 뉴스를 종합해보면, 이 한국 전시관은 2003년 영부인 권양숙 여사의 스미스소니언 방문이 계기가 되어, 주미 대사관의 적극적 사업 추진과 한국의 국제교류재단(The Korea Foundation)의 125만 달러(약 11억 5천만원), 대한항공의 추가 재정지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전시의 내용은 스미스소니언 재단 내 인류학 분과가 담당하여 3년 정도의 연구와 한국 민속박물관의 전시자문, 재미동포들로부터의 협조를 통해 구성되었다. 이 전시관의 개관은 한국과 미국이 통상조약을 맺은 지 125주년을 기념하는 2007년 워싱턴 한국 페스티벌의 주요한 행사로 기획되어지기도 했다.

스미스소니언에 한국관이 생긴다 한들 미국인들에게 별반 관심을 끌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워싱턴 근교에서 유학중인 필자도 그 내용에 대해 무척 궁금해 하고 관심을 가졌던 것처럼, 미국 땅에 살고 있는 동포들이 마치 자신들의 일처럼 좋아하고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스미소니언 박물관 가운데 나라 이름을 붙인 단독 전시관은 한국이 유일하다”며 국내 언론은 자랑스럽게 보도하였다. 이 문구 자체만 보면, 무척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스미소니언 박물관들 중 “자연사” 박물관에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전시하는 일이 자랑스러울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체계 속에 현재의 취지를 가진 한국관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고 봐야한다. 스미스소니언의 체계는 미국이 아닌 어떤 한 국가 혹은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한 덩어리 떼어내어 자신들의 박물관에 가져다 놓게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 스미스소니언 자연사 박물관 내부
ⓒ 김상민
일반에 개방되기 전날 아침 공식 개관 축하행사가 있었다. 초대받은 사람들과 취재기자들만 참석할 수 있는 자리였기에 필자는 행사 두어시간이 지나 자연사 박물관을 찾아보기로 했다. 설마 쫓아내진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공룡과 동물들을 좋아하는 세 살배기 아이를 둔 탓에 너댓번 방문해 본 적이 있지만, 한국관이 들어선다는 곳을 찾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박물관 안내책자에도 2층에 들어선다는 한국관의 위치에 관한 정보는 없었고, 한참을 헤매다 겨우 1층 어디선가 기존의 안내판에 조그맣게 ‘Korean Gallery’라고 테이프로 붙여진 표시를 보고 겨우 위치를 어림짐작 할 수 있었다. 안내도를 머리 속에 넣고도 다시 헤매던 중 우연히 관람객의 발길이 뜸한 복도 끝 한쪽 귀퉁이에서 촬영중인 MBC 카메라를 발견했다. 그 구석 배기에 한국관이 있었다.

미국 관람객이 한국관을 들어서기 위해서는, 길을 잃었거나 다른 곳을 가기 위해 경유하는 경우 이외에는 없을 것처럼 보였다. 아직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안내 데스크에 있던 관계자의 허락을 얻어 한국관 전체를 관람할 수 있었다.

▲ 전시물 - "인삼: 10억불의 산업"
ⓒ 김상민
필자의 시각이 애초에 삐딱해서인지, 아니면 필자의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미적 기대치가 높아서인지, 125만 달러의 지원과 3년간의 연구가 결실을 맺은 전시관이라고 하기에는 실망스러운 점이 많았다. 30평 남짓이라는 좁은 공간에 수천 년의 역사와 전통을 구겨 넣고, 거기다가 현재의 계승이라는 박물관의 역할을 넘어서는 주제까지 포괄하려는 기획의 욕심이 과해 보였다. 그러다 보니 전시의 내용물들이 일관성도 없고 품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록 일본이나 중국 전시관에 비해 초라하게 구성되어 있긴 하지만, 애초에 한국의 전통 유물들과 예술 작품들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은 스미스소니언 내에 프리어-새클러 갤러리(Freer Gallery of Art and Arthur M. Sackler Gallery)가 있다. 따라서 자연사 박물관에 한국관을 만든 것은 프리어-새클러 갤러리에 한국관이 들어서는 것과는 다른 목적에 의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즉, 자연사 박물관의 한국관은 한국 예술 작품의 전시를 통해 한국의 미적, 문화적 우수성과 역사적 의미를 전달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재정을 지원한 국제교류재단에서 언론에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관람객이 소장품을 감상적으로 접근하도록 하는 유물 위주 전시 방법을 채택”한 프리어 갤러리 등의 한국관과는 달리, 자연사 박물관의 전시는 “자연 환경과 생활환경 그 속에서 ‘인간 생활’이라는 문화 정체성을 모토로, 타 문화를 연구하고 이를 토대로 관람객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 위주 전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의미전달이 확실하지 않은 전시 배경의 소개지만, 대충 알아듣기로는 ‘관람객들이 (프리어 갤러리에서) 예술 작품 같은 것을 고상하게 감상하는 것보다 (자연사 박물관에서) 문화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한국을 아는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뜻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 좋은 의도가 '자연사' 박물관이라는 공간에 배치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통할까? 필자는 차근히 전시물들을 보고 전시라벨들을 읽어보기 위해서 전시관이 일반에게 공개되는 첫날인 다음날 다시 자연사 박물관을 방문하였다.

한국관의 전시는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 '한국의 전통 도예', '조상 숭배', '한국의 전통 혼례', '한글은 한국문화의 자랑', '국경을 넘은 저편의 한국', '한국의 현대 미술'과 같이 총 7개의 테마로 이루어져 있다. 80여개의 전시물 중 오래된 동식물의 화석이나 사바나의 동물들, 그리고 원시시대 인간의 생활과 같은 자연사 박물관의 주요 테마와 어울릴만한 전시물은 없다.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문자와 복식, 종교적 의식, 사회적 관습)나 예술적 가치를 지닌 기술들 그리고 현대 예술 작품들과 같은 분야는 이 자연사 박물관에 어울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런 곳에 전시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우수한 문화를 '자연'의 수준에 둠으로써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 한국 전시관 내부
ⓒ 김상민
물론 '문화'와 '자연'을 대립하는 것으로, 혹은 '문화'가 '자연'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또 다른 편견에 불과할 것이지만, 그 양자의 분리와 대립은 이미 서양의 박물관을 비롯한 온갖 학문적, 사회적, 제도적 인식의 시스템 속에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애초에 자연사 박물관이란 고생물학, 지질학, 고고학, 인류학 등 온갖 서양의 학문들이 서양인들의 분류체계와 가치체계에 따라 각종 화석류, 생물류, 금속 및 광물류 등을 수집하고 분류하여 보존하는 장소이다. 근대 이후에는 대중에 대한 교육이 또 하나의 주요한 목적으로 등장하였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도 박물관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한국의 문화유산과 역사적 유물들이 “연간 약 600만 명이 방문하여 미국 최다 방문객을 자랑하는” 자연사 박물관에, 그것도 “국가 단위로는 최초로 독립된” 전시관을 지어서 전시된다는 사실이 우리 언론에 의해 자랑스럽게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에 필자는 답답함을 넘어 슬픈 느낌마저 들었다. 하여 해외의 언론들은 한국관의 개관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 전시물 - 한반도 위성사진
ⓒ 김상민
예상대로 별로 관심을 가지는 언론이 없었다. 며칠에 걸친 인터넷 서치를 통해서 겨우 건져낸 기사는 AP통신과 워싱턴포스트지의 2건이었는데, 모두 한국에 대한 인식의 부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들이었다. 워싱턴포스트지 이외의 언론에서는 모두 AP통신의 기사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두 기사는 한결 같이 남북한의 불빛의 양이 대조적으로 보이는 한반도 야간 위성사진 전시물에 크게 관심을 가졌다. 처음 이 위성사진이 전시관 벽에 붙어있는 것을 보고 필자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는데, 서양의 시각은 놀랍게도 그것을(우리의 독특한 자연 환경이나 우수한 한글도 아니고, 아름다운 전통 의상이나 훌륭한 한국인들의 업적도 아니고) 가장 흥미로워 했다. 대체 그런 사진은 무슨 목적으로 그런 곳에 붙어있게 되었는지 경이로운 전시물이 아닐 수 없었다.

또 한 가지, AP통신 기자의 기사는 전시관 입구에 벽에 붙어 잘 보이지도 않는 솟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그 솟대가 고대 한국에서도 사용되었고 오늘날도 여전히 사용된다고 한다. 물론 요즘도 시골에 가면 솟대가 있는 곳이 있지만, 그것은 옛날에 사용하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요컨대, 그 기사는 한국은 옛 (원시적) 전통을 여전히 현대에서도 그대로 계승해나가고 있는 신기하고 이국적인(exotic) 나라라는 서양의 시각(오리엔탈리즘)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기실 우리 문화와 역사의 우수성이나 아름다움과 같은, 이 전시관이 보여주려고 했던 것에 대해서, 서양의 언론은 아무런 메아리도 들려주지 않는다. “한국은 과거가 현재하는 곳”이라는 한국관의 모토가 그렇듯이, 이 전시를 둘러보는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수천 년 전부터 현재까지 조상에게 절을 하며 화려하고 독특한 한복을 입고 결혼식을 하는 신기한 문화를 존속하고 있다고 배워 갈 것이다.

▲ 전시물 - 솟대
ⓒ 김상민
워싱턴포스트지에 인용된 이 전시관의 실질적 책임자인 폴 마이클 테일러의 말은 이번 전시를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그는 “보통의 미국인 관람객은 한국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하고,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들의 생활을 희극화한' M·A·S·H라는 텔레비전 드라마, 북한의 핵문제, 그리고 한국의 산업 수출에 관련해서나 한국을 떠올린다. 뭔가 빠진 게 있다면 바로 역사에 대한 이해다”라고 말하면서 본 전시관이 뭔가 한국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필자는 전시관 어디에서도 한국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중등학교 수준 이상으로 제공하는 전시물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것도 70년대 초등학교 교과서 수준의 사진자료들과 80년대 관제 보도자료 수준의 설명이 가득 메우고 있는 전시관에서 무슨 한국에 대한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두 번째 방문에서 필자는 우연히 현장에 있던 한 박물관 관계자(스스로 박물관 내 인류학 분과에 있다고 소개하였다)의 생각을 들어볼 기회가 있었다. 왜 한 민족의 문화유산과 역사 유물이 자연사 박물관에 있을 수 있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의견을 제기했더니, 그는 좋은 질문이라면서 그 이유를 단순명쾌하게 설명했다.

요컨대, (우리가 자연사 박물관이라고 흔히 알고 있는) 이 박물관은 자연사 박물관인 동시에 인간 박물관 (Museum of Man)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이 새겨진 현판은 박물관의 입구 쪽에 있다고 친절히 알려주었다.

나가는 길에 눈여겨보니, 박물관 양쪽 입구에 조그맣게 “국립 자연사 박물관 및 국립 인간 박물관”이라는 현판이 붙어있었다. 그 관계자는, 이 자연사 박물관은 인간(인류) 박물관이기도 하기 때문에, 여러 민족들(필자가 보기에는, 주로 소수민족이나 흔히 말하는 원시 부족들)의 문화를 보존하고 전시하는 일에 최근 관심을 늘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 자연사 박물관 및 인간 박물관 현판
ⓒ 김상민
그러나 그와 같은 박물관의 관심사, 즉 인류학적 관심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박물관은 처음부터 근대 서양인의 관점에서 모든 수집물과 전시물을 분류하고 체계화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박물관의 민족학적 혹은 인류학적 연구는 자신들과는 다른 민족 혹은 인종의 문화를 일종의 구경거리나 진기한 것 등으로 수집, 분류, 체계화해 온 서양의 관념적 전통을 구현하고 있는 도구에 다름 아니다.

현재 자연사 박물관에는 인류 문명에 관한 두 가지 대표적인 상설 전시가 있다. 하나는 “아프리카의 목소리”(African Voices)이고 다른 하나는 “서양의 문화”(Western Cultures)이다. 전자는 공룡 및 화석 생물 전시실과 빙하기 전시실을 지나서 도달하게 되는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스미스소니언 안내책자에 따르면 아프리카라는 “거대한 대륙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살펴보는” 이 전시관은 아프리카의 원시 문화와 노예 수탈의 역사를 거쳐 만델라의 민주적 흑인정권 수립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연대기 안에 아프리카 대륙의 모든 역사를 뭉뚱그려 넣으며 아프리카를 타자화시키고 서양(혹은 미국)의 역사와 문화로부터, 즉 자신들의 문명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있다.

또한 후자의 전시실은 수만 년 전의 석기시대로부터 수천 년 전의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이르기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어떤 근거로 그것들을 “서양의 문화”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분류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서양의 역사교과서는 그리스-로마시대와 그 이전의 고대 이집트 및 아라비아 문명에 이르기까지 서양 문명의 근원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들이 필요한 측면은 자신의 것으로 취하고 불필요한 측면은 거리를 두고 배격하는 이중적인 서양의 역사 인식 태도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인간(인류)의 박물관”이라는 명칭은 미국인 혹은 서양인의(에 관한) 박물관이 아니라, 이미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린 패배한 문명에 대한 조사(弔詞)인 동시에 자신의 것으로 사유화한 옛 문명에 대한 영광의 재현에 다름 아니다. 이 박물관 어디에서도 (“아프리카의 목소리”에 등장하는 노예무역을 다룬 한 문장을 제외하고) 미국인의, 서양인의 역사적 전통과 현재의 문화적 계승의 흔적을 찾아 볼 길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사 박물관의 명칭에 등장하는 이 “인간” 혹은 “인류”를 (서양인이 아닌, 따라서 서양인의 시각에 의해) 대상화되고 타자화된 민족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미국 백인의 문화와 역사”와 같은 전시를 자연사 박물관에서 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오로지 사라져버린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멸종위기의 알래스카, 티벳, 몽골의 소수민족들의 문화만이 이 박물관의 진열대를 장식하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미국인 자신들의 문화와 역사는 스미스소니언 내 국립 미국사 박물관(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에 따로 전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문화와 역사가 (그것도 과거와 현재의 역사적 단절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 “자연사 박물관 및 인간 박물관”에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필자는 문화와 역사에 대한 몰이해에 기인한 전시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서양의 박물관에 대한 몰이해일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몰이해이다. 서양인의 구미에 맞게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변형하여 제공하고, 비싼 돈을 들여 안이하게 한국 문화의 홍보관 정도로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전시행정’이라는 말이 이런 경우를 일컫는 것이리라.

▲ 전시물 - "국경을 넘은 저편의 한국"
ⓒ 김상민
문화 홍보 시설이 필요하다면 다른 길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세계 유일’을 내세울 게 아니라, 스스로 우스꽝스러워질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언어, 음식, 예술 등을 기초부터 가르치고 이를 통해 우리 문화와 역사의 본질을 점점 깊이 알아갈 수 있는 문화 교육 기관들을 세우고 그 입지를 넓혀가는 것이 중요하다.

동포 2세와 3세들조차 한국의 말과 글을 배우지 못하고 관심을 잃어 가는데, 남의 박물관 한 귀퉁이에 어설픈 전시실 하나 지어서 한국 문화를 널리 알리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일이다.

▲ 전시물 - "한글은 한국문화의 자랑"
ⓒ 김상민
결과적으로 박물관이라는 곳이 한 문화의 본질을 널리 알릴 수 있는 훌륭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스미스소니언 자연사 박물관 내 한국관 개관은 서양의 박물관이라는 (어쩌면 정치적이기도 한) 재현의 체계 속에서 한 문화가 어떻게 자리매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충분한 성찰 없이 이루어진 졸작이다.

그저 ‘최초’ 혹은 ‘가장 인기 있는’ 등의 상업 광고적 수사를 앞세워, 우리 민족의 문화를 “글로벌 시대의 국가 브랜드 파워”로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한국을 삼성 휴대폰이나 현대 자동차로 이미지 연상 시키는 데 주력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 전시가 정말 가치 있는 것일까?

남북한의 분단을 포함하여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관해 편향되고 왜곡된 인식을 외국인들에게 심어주는 이 전시가 우리에게 정말 의미 있는 것일까? 우리 문화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브랜드화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그것을 박물관에다 박제하고 화석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세계화 시대의 신자유주의적 상업주의의 한국화된 버전을 미국의 수도 한 켠에서 확인하는 일은 서글픔을 넘어 자조하게 한다.

태그:#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미국, #워싱턴, #한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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