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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메리대구 공방전>
ⓒ MBC
한 손에는 영어책과 참고서, 처세술과 실용서들, 다른 한 손에는 게임과 인터넷, 영화와 드라마 등등. 우리의 눈과 몸은 이중으로 나뉘어 있다. 현실과 가상 세계, 현실과 판타지의 양극 사이를 오가는 우리 대중문화 키드들에게 분열증은 숙명일지도 모른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과 허구의 구분이 사라져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현실과 허구의 심화되는 양극화 사이에서 우리가 꿈과 이상, 희망 따위를 잃어버린다는 사실이다. 물론 꿈과 이상이 존재하지 않는(것처럼 보이는) 현실이 현실을 더욱 삭막하게, 판타지를 더욱 강하고 자극적이게 몰아간 것이겠지만 말이다.

여기에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멀어지는 거리를 좁혀 주는 독특하고 재밌는 시도가 있다. 로맨틱 코미디 <메리대구 공방전>(김인영 극본, 고동선 연출, MBC 수목미니시리즈)이 바로 그것이다. 이 드라마는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간극을 좁혀 놓음으로써 현실과 판타지 어느 한쪽도 부정함 없이 양자를 넘어서 버린다.

이러한 현실과 판타지의 이상야릇하고 모호한 착종이 낳은 결과는 꿈과 희망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잃어버린 혹은 잊고 있던 꿈과 희망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엉뚱하고 발랄한 여정이다. 때로는 헛되고 무모하게, 때로는 희희낙락 여유롭게, 때로는 서글프도록 간절하게.

그것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과거를 향하기도 하고 그 도래가 불투명한 미래의 언젠가를 고대하기도 한다. 그것은 낡았지만 유쾌하고, 시시껄렁하지만 진실하며, 호기롭지만 애잔하다. 여기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뒤섞는 에너지의 묘한 순환적 기류가 있다.

긴장과 갈등은 없다, 우스꽝스런 해프닝의 '연속'

한동네 주민인 주인공 황메리(이하나 분)와 강대구(지현우 분)는 추리닝 바람으로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이렇게 부딪치고 저렇게 마주친다. 먹잇감이나 일감을 찾아다니는 돈 없고 시간 많은 이들은 서로가 강력한 라이벌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하고 다니는 입성과 몰골에서부터 궁상과 악착까지, 처지와 상황이 너무나 닮아 있는 이들은 서로의 실연의 상처와 오랜 꿈의 세계를 엿봄으로써 자신들도 모르게 점점 사랑의 감정에 빠져든다. 뮤지컬배우를 꿈꾸는 메리가 남몰래 하는 노래연습에선 대구가 관객이 되어주고, 무명의 무협소설 작가인 대구에게 메리는 무림을 떠도는 백발 광녀라는 번쩍하는 영감을 준다.

이들 사이에 대구가 빌붙어 사는 선배이자 메리의 초등학교 첫사랑인 바른생활 사나이 선도진(이민우 분)과 부동산 졸부의 딸인 실리콘 걸 이소란(왕빛나 분)이 끼어들면서 메리와 대구의 사랑은 미처 피기도 전에 도로 기어들어가야 하는 형국이 되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네 사람의 사각관계는 목숨을 거는 사생결단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첨예한 긴장과 갈등의 대치국면으로 나아가는 대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스꽝스럽게 쩔쩔매는 해프닝의 연속으로 나타나고 종국에는 화기애애한 의기투합과 교통정리의 낌새마저 내비친다.

현재진행형인 젊은 네 사람의 꿈과 사랑 못지않게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부모세대가 얽혀 있는 과거의 시기와 배신,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의 사연이다. 그 옛날 서커스단을 배경으로 인기스타 리키 박(이영하 분)에 대한 삐에로 이세도(이기열 분)의 시기와 질투가 불러일으킨 대형사고와 화재, 리키 박과 오성자(이혜숙 분)의 애틋한 사랑, 황도철(기주봉 분)의 성자에 대한 짝사랑 등등.

이제 죽은 줄 알았던 리키 박이 풍운도사가 되어 아들 대구 주변을 맴돌면서, 부동산 재벌이 된 소란의 아빠 세도와 메리 엄마 성자, 메리 아빠 도철 세 사람 모두는 초긴장 상태에 놓인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다시 나타난 리키 박에게서는 원한에 찬 복수나 음모의 기운이 보이지 않는다. 외로운 듯 의기소침해 보이는 풍운도사는 이미 탈속의 냄새를 풍긴다.

그는 어쩌면 자신을 포함하여 네 사람 모두에게 잃어버린 과거의 꿈을 되찾아주기 위해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그가 언젠가 산 속에서 어울리지 않게 법 공부를 하던 대구에게 무협의 세계라는 그의 진짜 꿈을 찾아준 것처럼. 그리하여 대구의 첫 무협소설 <풍운도사의 백팔번뇌> 1, 2권이 탄생된 것처럼.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땅에서 발이 한 걸음쯤 떨어져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이 처한 상황과 조건은 비루하거나 또는 냉혹하거나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세상에 대처하는 자세는 대세나 주류에서 조금씩 어긋나거나 빗겨나 있다. 물론 이들 대부분이 어쩔 수 없이 주류에서 밀려난 삼류인생들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기꺼이 자신만의 갈 길로 나아간다.

비주류 인생들이 꿈꾸는 비주류 판타지 세계

▲ <메리대구 공방전>에서 주인공 황메리와 강대구 역을 맡은 이하나와 지현우.
ⓒ MBC
이 드라마가 하나의 판타지 세계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또 이 드라마가 여느 로맨틱 코미디의 판타지 세계와 갈라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비주류 여성이 꿈꾸는 로맨틱 코미디의 주류적 판타지 세계와 달리, 이 드라마는 비주류 인생들이 꿈꾸는 비주류 판타지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드라마의 판타지 구조는 이중적이다. 드라마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판타지를 이룬다면, 드라마 속 인물들이 만들어가는 판타지 속 판타지 구조가 있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자기만의 판타지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메리와 대구의 꿈은 수시로 무대에 선 메리의 모습(밤무대건 시골장터건)으로, 무협물의 한 장면으로 우스꽝스럽고 일그러진 스펙터클로 직접 시각화된다. 모든 사람을 바른 길로 선도해야 한다는 도진의 이상이나 완벽한 미인으로 거듭나 완전한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소란의 환상이 모두 그들의 삶을 지탱시키는 그들만의 판타지이다.

이렇게 주인공들의 판타지가 미래를 향해 있다면, 이들의 부모들은 과거에서 비롯된 판타지 세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화려했건 초라했건 서커스 무대라는 과거의 세계는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근원적 힘이 되어준다.

리키 박의 떠돌이 삶 자체가 그 자신이 지닌 꿈과 사랑의 판타지의 실행적 증거이듯이, 매몰차고 그악스런 메리의 엄마 오성자여사가 리키 박과의 첫사랑의 기억으로 고된 삶을 다독이듯이. 그리고 무엇보다 성공의 자만심으로 득의만만한 이세도가 때때로 자신만의 비밀 공간에서 삐에로가 되어 추억과 회한에 잠기듯이.

유치한 듯 순박하고, 진부한 듯 상큼한 <메리대구 공방전>

재미있는 건 판타지의 이중구조로 인하여 이 드라마의 동일시 메커니즘이 다른 판타지와 정반대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시청자들이 드라마 속 판타지 세계에 몰입하고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드라마 속 인물들이 판타지를 꿈꿀 때, 그들이 관객의 위치로 내려와 시청자와 동일시를 이룬다는 것이다.

판타지 속 판타지의 객관화는 우리로 하여금 판타지의 실체를 명확히 드러냄으로써 시청자들의 판타지세계로의 일방적 몰입을 방해하고, 우리가 낄낄거리며 인물들의 판타지를 구경하는 동안 그들도 자신들의 판타지의 관객이 되어 어느새 슬그머니 우리의 옆자리로 내려와 앉는다. <메리대구 공방전>의 인물들이 시청자와 가까워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별 볼일 없는 삼류인물들의 비주류 판타지 코미디가 우리에게 반갑게 다가오는 방식이다.

이러한 판타지는 확실히 현실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그것이 비록 일그러지고 뒤틀려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현실의 변형으로서의 판타지, 판타지에 응축되고 전치된 현실, 양자의 접합에는 현실을 넘어서는 긍정성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낙관적 힘이 내재해 있다. 이것이야말로 유치한 듯 순박하고, 진부한 듯 상큼한 <메리대구 공방전>만의 특별한 매력이다.

태그:#메리대구공방전, #지현우, #이하나, #이영하,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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