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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이후 정체된 채 퇴락한 장항은 노태우 정부가 약속한 국가산단 착공을 염원하고 있다.
ⓒ 임흥재
기자의 유년의 기억은 장항에서 시작됩니다. 장항선의 종착역인 곳이지요. 부산을 향해 뻗은 철길이 천안에서 갈라져 충남 서해안을 타고 내달리다 금강에 가로막혀 끝이 나는 곳이 곧 장항입니다. 우리의 철도가 식민지 근대의 상징이듯 장항선 역시 일제 식민지 시대에 건설되었습니다.

지금은 하구 둑으로 이어진 전북 군산이 일제 식민시대에 물자의 집산과 수탈을 목적으로 발전하였듯 강 건너 장항도 해방 당시에는 제법 근대적인 도시의 외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쇠락하여 시대극의 촬영장소로나 가끔 이름값을 할 뿐이지만 장항제련소와 장항항은 제 유년시절까지는 그런대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습니다.

또 당시에는 군산 지역의 여행객들은 도선을 이용하여 금강을 건너고 장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다녔습니다. 수시로 금강을 오가는 도선과 장항역은 그래서 꽤 북적였지요. 낯선 여행객들에게는 장항역에서 내려 장항항을 보고 금강 하구의 상징처럼 바위산에 우뚝 솟은 제련소의 굴뚝을 보는 것이 신기한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금강을 건너 군산으로 혹은 장항으로 향하는 도선에서 바라보는 하구 너머의 낙조는 가히 경승의 일절로 꼽히기도 하였지요. 그래서 장항에서 타고 내리는 장항선 열차의 추억은 다른 철길에서 경험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단선인 장항선은 오고 가는 열차의 교행을 위해 정차역이 아닌 곳에서도 수시로 서다 가기를 반복합니다. 장항선이 연착이 가장 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처음 가본 수학여행도, 서울

어린 시절 제 장항선 열차의 종착역은 늘 대천역이었습니다. 할머님댁이 대천이었으니까요. 가끔은 남포역에 내려 한 시간 가까이 걷기도 했습니다. 시내버스도 드물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드디어 대천을 지나 더 먼 곳으로 갈 기회가 왔습니다. 충남 아산의 현충사로 수학여행을 가게 된 것이지요. 그때 처음으로 백사장이 아닌 곳으로 처음 소풍을 갔고, 소풍 가서 사진이란 것을 처음 찍어 보았습니다.

지금의 소주병과 비슷한 병에 담긴 '대동사이다'와 삶은 달걀은 소풍과 열차 여행 최고의 메뉴였습니다. 그때의 대동사이다는 친구 할아버님의 공장에서 생산된 것이었는데, 그 갑부 손자가 우리 반에 있었지요. 장항 출신으로 군산에서 갑부의 반열에 오른 친구 할아버지 덕을 가끔 보았습니다. 부자 3대 못 간다고 그 손자는 부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친구는 맞지요.

그리고 몇 달 후 6학년 여름, 아마 1973년일 것입니다. 전 서울이란 곳을 처음 가보게 됩니다. 물론 기차를 타고 말이지요. 장항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한 기차는 꼬박 12시간을 달려서 저녁 6시가 되어서야 영등포역에 도착하던 시절입니다. 비둘기호니 하는 이름도 없었습니다. 그냥 완행열차였지요.

그때의 서울행에는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기자는 어머니를 초등 1학년에 잃었습니다. 커서 안 사실이지만 자궁암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제게 어머니는 피 빨래와 병원의 실험용 흰쥐로 기억됩니다. 아무튼 집에는 당시에 시집가기 전인 고모들이 와서 저희를 보살폈고 아버지는 사업차 집을 비운 날이 많았습니다.

마침 고모들도 대천에 가고 우리 남매들만 있던 날에 사단이 나고 말았습니다. 제가 급성맹장염으로 맹장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입니다. 중학생인 누나는 허둥지둥했을 게 뻔하지요. 병원으로 옮겨진 저는 곧바로 수술을 해야 했지만 이번에는 보증인이 문제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맹장염은 큰 병이었으니까요. 누나가 달려간 곳은 아버지가 자주 가던 다방이었습니다.

우린 그 아주머니를 또 다른 고모라고 부르며 따랐습니다. 아버지를 좋아했을 것입니다. 예쁜 딸(상민이란 이름으로 기억되는데, 나중에 결혼해야지 생각했습니다)이 있는 과부였을 것입니다. 그 고모의 보증으로 겨우 수술을 한 기자는 덕분에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퇴원하여 겨우 요양을 하고 있던 차에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 특설 링에서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프로 레슬링이 열린다지 뭡니까.

마침내 대회가 열리고 천규덕 선수와 박치기왕 김일 선수를 보려고 운동장이 미어터졌습니다. 기자 역시 그 구경을 놓칠 수 없었지요. 아뿔싸, 사람들 틈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 채 아물지 않은 수술 부위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실려 간 병원에서 터진 살갗을 봉합하고 다시 입원실 신세를 져야만 했습니다.

어린 소년은 레슬링을 못 본 것이 두고두고 서러웠습니다. 어린 소년은 아버지가 창경원(지금의 창경궁)이며, 어린이대공원이며 서울 구경을 시켜준다는 약속이 있고 나서야 울음을 그칠 수가 있었습니다. 바쁜 아버지를 졸라 따라나선 시골 촌놈에게 서울은 참으로 별천지 같았습니다. 마냥 신나고 즐거운 추억입니다.

서울의 첫 밤에 기억하는 또 한 가지는 자고 난 아침에 처음 본 여자입니다. 분명 잠들 때는 아버지와 단둘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웬 여자가 아버지의 곁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엄마를 모르고 자란 제게는 잠시나마 큰 충격이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여자를 만난 것이지요. 바로 그분이 지금은 제 어머님으로, 아버지의 아내로 살고 계시는 그분입니다.

공장으로 떠난 누나

▲ 장항선은 90년대까지 사진 속의 기차처럼 낡은 완행열차가 운행되었다.
ⓒ 임흥재
장항선 열차를 생각하면 잊지 못할 '누나의 역'이 떠오릅니다. 서울을 다녀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러니까 큰 누님이 중학교 졸업반 때입니다. 어려서부터 엄마를 대신해서 집안일을 도맡다시피 했던 큰 누님은 공부도 잘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때에 갑자기 아버님이 심장질환으로 쓰러지신 것입니다. 투자를 하셨던 탄광이며 농장이 잘못되면서 아버님까지 병환으로 거동을 하지 못한 지경이 된 것이지요.

집달관들이 들이닥치고 세간에는 소위 딱지라는 압류표지가 붙었습니다. 이제 갓 시집온 새어머니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시다 짜증 내는 아버지를 피해 친정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십 년이나 어린 삼촌도 고모도 늙은 할머니가 도울 길은 전혀 없었습니다. 집안 살림을 아버지가 도맡다시피 했으니 누가 우리를 도울 수 있었겠습니까. 누님은 상급학교를 포기하고 공장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나야했지요.

지금의 군포역일 것입니다. 누님은 보령제약의 사원이 된 것이지요. 당시의 비속어로 소위 '공순이'가 되었습니다. 이듬해에는 육상을 잘해 체고에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았던 작은 누님 역시 큰 누님의 후배 사원이 되었습니다. 저희 집의 살림은 아버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까지 한동안 바로 누나들의 눈물겨운 희생과 배 곪으며 아낀 그 돈으로 연명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방학을 맞아 명학역 근처의 누님들의 자취방에 다니러 간 적이 있습니다. 동생에게 입성이라도 사주고 싶은 누나들의 욕심과 사랑은 그 즈음의 편지에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처음으로 혼자 기차를 타고 대처까지 가게 된 사정입니다. 지금이야 아름다운 추억으로 회상할 수 있지만 그때의 누나들의 자취생활과 열악한 노동의 조건을 생각하면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몹시 추운 겨울 어느 날, 고향으로 돌아가는 동생을 기차에 태우고 승강장에서 기차가 떠날 때까지, 아니 떠나온 뒤에도 고목처럼 서서 울었을 누님들의 눈물을 잊지 못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눈물이 많고 마음이 따뜻한 누님의 언 볼에 흘러내리던 그 굵고 긴 눈물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야 돼, 넌 돈 걱정 말고 공부만 하면 돼, 아버지 잘 보살피고 알았지, 응……."

지금도 가끔 기차를 타고 출장을 갈 때면 꼭 누나의 역을 보려고 애씁니다. 휘익 스쳐가고 너무도 변해 옛 모습은 사라졌다 해도 내 마음속의 누나의 역은 언제나 살아 숨 쉽니다.

아마도 그때 제게 당부한 말들은 누나 자신에게 던진 약속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억척스러움으로 우리 남매들 중 가장 넉넉한 살림을 장만했으니 가끔 부끄럽기도 하다가 샘이 나기도 합니다.

간이역 같은 내 삶의 쉼터

퇴락한 소읍의 역사를 말해주듯 장항선은 정차하는 역마저도 다른 철도의 간이역 같기만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단선 철도에 새마을호, 무궁화호가 전부입니다. 다른 노선에는 다 있는 전기선 철길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KTX가 운항을 개시하기 전에는 새마을호 기차도 고작 하루에 왕복 4편에 불과했지요. 물론 자리 편한 것 빼고는 무궁화호나 새마을호나 장항선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무작정 올라타고 아무 곳에나 내리면 그곳이 쇠락한 영화와 느릿느릿한 기다림의 여유가 있는 간이역 여행이 됩니다. 언젠가 기자는 간이역을 소개한 <낯선 정거장에서 기다리네>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간이역 여행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현대의 속도와 우리네 삶의 풍요는 양편으로 갈라진 채 만날 수 없는 레일의 운명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자명하다. 우리의 속도로 돌아와야 한다. 그것이 바로 기차여행에서 우리가 느끼고 찾아야할 것이리라." - 필자의 졸고 <간이역으로 떠나는 낯선 '나'와의 여행> 중에서

신례원의 추사고택에서도, 노랫말에 나오는 삽교역의 예배당에서도, 한창 꽃게철인 광천역에서도,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갯벌의 무창포역에서도, 해가 뜨고 해가 지는 마량포구의 서천역에서도 우리는 바로 자신에게 적당한 속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인기 절정을 구가하는 개그맨의 외침처럼 '아무 생각 없이' 기차를 타자. 장항선을 타자. 거기에는 내 삶의 쉼터가 있고 태연한 퇴락, 무참한 적막, 태평한 방심, 쓸쓸한 독거, 은은한 서정 등 굼벵이들의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다.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응모글


태그:#장항선, #철도, #간이역, #대천역, #누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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