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봉황도 춤을 췄을 겁니다. 오색연등의 아름다움에 춤추고,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해 하는 사람들 표정이 너무도 보기 좋아 덩실덩실 어깨춤이라도 췄을 겁니다. 봉황만 춤을 춘 게 아니라 봉정암 부처님, 봉정암에 봉안된 부처님 진신사리에 깃든 불심도 얼싸절싸 춤췄을 겁니다.
산은 연녹색으로 물들었고, 사람들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합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참으로 평온합니다. 불평불만을 털고, 불안하거나 불편한 마음을 떨쳐 낸 사람들만이 지을 수 있는 지긋한 표정입니다.
5월 24일, 부처님오신 날 설악산 봉정암에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은 너나없이 천진불의 표정입니다. 일렁거리는 연등, 오색찬란한 연등 빛으로 봉정암 일대는 천상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연등이 걸렸습니다. 석가탄신일을 맞아도 직접 봉정암엘 오를 수 없는 사람들이 마음으로나마 부처님의 탄신일을 봉축하기 위해 일찌감치 마음을 시주해 놓으니 등불로 밝힌 것입니다. 사람들의 정성과 기도하는 마음은 오색연등이 되었고, 그 사람이 서원하는 바람들은 꼬리표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소원했고, 어떤 사람은 사업번창을 서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승진을 기원했고, 어떤 사람은 승진을 발원했습니다. 소원하는 내용들도 삼라만상의 번뇌처럼 사람들마다 다양합니다.
미소처럼 잔잔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불어오는 바람조차 걸걸했던 산바람답지 않게 산들바람처럼 살랑거립니다. 진수성찬으로 올린 사람들의 마음, 부처님의 탄신일을 봉축하기 위해 차린 마음의 연등이 흐트러질까봐 산바람조차 성정을 바꿨나 봅니다.
'나'를 잊으니 무아지경에 이르다
산바람이 휘파람을 부니 오색연등이 물결칩니다. 요람이라도 탄 듯 일렁거리는 오색연등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온전한 원색이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은은함이 있고, 일렬로 매달렸으면서도 단조롭지 않게 조화를 이뤘습니다. 오색등물결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조차 요람입니다.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 '나'를 잊었습니다. 일부러 몸부림치지 않았으나 잠시나마 선의 경지라 할 무아지경에 들었나봅니다.
산세의 경이로움에 취하고, 오색연등의 아름다움에 빠져드니 텅 빈 허공처럼 무(無)가 됩니다. 무가 되니 생로병사가 없고, 생각도 없고, 없다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도 없고, 미워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니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에서 겪게 되는 애별이고가 있을 수 없고,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데서 오는 원증회고의 고통도 없습니다. 없는 게 없으니 번뇌도 없고, 없을 게 없으니 갈등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번뇌도 놓고, 망상조차 떨쳤었으니 찰나이긴 하나 성불을 이뤘을지도 모릅니다.
23일 오후, 깔딱고개를 올라섭니다. 꾸준하게 올라야 오를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거북바위를 지나 깔딱고개로 올라섭니다. 일주문도 없고 사천왕문도 보이지 않는 봉정암이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면 일주문도 보이고, 사천왕상도 보게 됩니다. 숨이 턱턱 막히도록 올라서는 깔딱고개가 봉정암의 일주문이고, 깔딱고개에 있는 사자바위가 불법을 호위하고 있는 신장님이며 사천왕입니다.
사자바위는 그냥 바위가 아닙니다. 생김새도 사자를 닮았지만 오욕칠정 다 내려놓고 가라는 호령의 바위입니다. 사자바위 바로 옆쪽을 보면 발가벗은 여인이 마음을 유혹합니다. 아주 유혹적인 모습입니다. 볼록한 엉덩이 사이로 사타구니를 감췄고, 잘록한 허리춤으로 봐 호색이 만연한 그런 모습입니다. 삿된 욕정에 마음조차 뜨거워질 수 있는 야한 모습입니다. 바위를 바위로 보지 않고, 요염한 형상에서 삿된 음색을 그리는 그런 마음으론 들어갈 수 없는 곳임을 역설하듯 사자바위가 여체바위를 가로막고 서 있습니다.
호기심을 떨치고, 욕정의 뜨거움을 식히고 나면 봉정암쪽으로 포대화상의 웃음을 웃고 있는 바위부처가 보입니다. 음흉한 마음을 떨치지 않으면 보이지 않으니 부처상을 보았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청정한 마음입니다. 두 눈 지그시 감고 있는 바위부처가 보이면 이제 봉정암으로 들어가도 좋다는 허락쯤으로 봐도 좋을 겁니다. 바위부처가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오느라고 고생했다면 툭툭 어깨 두들겨 주듯 자애한 미소가 가득합니다.
땀도 식었고, 뜨거운 마음도 식었으니 봉정의 품으로 들어갑니다. 봉정의 품에 들어서 가는 오솔길은 때가 때이니 만큼 오색 연등이 가득합니다. 막 움을 틔우는 나무들이 있을 정도로 봉정암의 봄은 지금이 한창입니다. 새싹의 보드라움과 신록의 싱그러움이 물씬한 오솔길 저만치 연등이 걸렸습니다. 꾸벅 합장을 하니 '어여 와'하며 마중이라도 하듯 몇 개의 연등이 흔들립니다. 길옆으로 매달린 연등 행렬이 나그네의 발길을 마중합니다.
여느 때보다 한적한 봉정암
사람들의 수는 여느 때보다 적으나 기도하는 마음은 여느 때보다 지극하고 대단합니다. 신심이 아니고는 해석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그런 모습들도 여럿입니다. 맨몸으로 가기도 힘들다는 봉정암 길을 부처님께 올린 공양물들을 짊어지고 올라왔습니다.
어떤 이는 커다란 수박을 짊어지고, 어떤 이는 난향이 물씬 풍기는 화분을 지고 올라왔습니다. 대단합니다. 모양새가 동글동글해 평지에서도 짊어지기 어려울 뿐 아니라 조심하지 않으면 깨트릴 수 있는 게 수박인데 그 무거운 수박을 봉정암까지 지고 올라온 보살의 마음이 대단합니다. 그 무거운 수박을 짊어지고 올라온 힘의 밑바탕을 신심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겁니다.
자박거리는 발걸음에도 하늘하늘 꽃대가 흔들리는 난분을 짊어지고 올라온 보살의 정성이야 말로 부처님을 따르는 보살도의 고행이며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돈으로 보여줄 수 있는 지극한 정성이 아니기에 봉정암에서만 볼 수 있는 신심의 형체입니다.
그렇게 올라온 사람들을 스님들이 맞이합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다'며 합장을 하고 마중을 하는 스님들 미소에 너덧 시간의 고통이 환희로 바뀌게 됩니다. 부처님을 대신한 스님들의 마중, 부처님을 대신한 스님들의 미소이기에 육신의 고통을 깔끔하게 씻어줍니다.
사람 수가 적어 여느 때보다 공간까지 넉넉해지니 마음조차 넉넉해집니다. 생면부지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봉정암에서 만나니 금방 도반이 되고 한 가족이 됩니다. 두런두런 사는 이야길 나누다보니 저녁을 먹을 공양시간이 되었습니다.
봉정암에서만 맛볼 수 있는 산중특허, 미역국에 한 주걱의 밥과 몇 조각의 오이무침을 얹은 밥그릇을 들고 연등 아래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모여 앉은 사람들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연밥을 닮았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연을 봉정암 줄에 꿰어 담으니 인연의 108염주가 되었습니다.
어두워지는 산사는 서럽도록 고요합니다. 조용한 산사, 어둠이 깔리는 봉정암에 연등이 불빛으로 피어납니다. 알록달록한 오방색으로 사방 곳곳에서 피어납니다. 전각에도 피었고 나뭇가지에 대만 연등 줄에도 피었습니다. 다가오던 어둠이 일순간에 사라지며 환희의 불빛이 마음을 밝혀줍니다. 아름답고, 또 아름다우니 기쁠 뿐입니다. 밤 10시가 되니 귀함을 알게 하려는 듯 연등불이 사라집니다. 자가발전이라는 봉정암만의 형편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불빛의 가치를 일러줍니다.
봉정암의 밤은 깊어가고, 사람들의 기도는 익어갑니다. 108배로 몸뚱이를 내려놓고, 다라니 108독으로 마음까지 내려놓으려 하지만 익혀온 습이기에 마음대로 되지를 않는가 봅니다. 훌쩍 자정을 넘기니 엎드리거나 드러눕는 이가 보입니다. 와불을 흉내냈으니 꿈속에서나마 부처님을 친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편안한 표정입니다.
밝아오는 아침, 봉정암의 석가탄신일
새벽 3시가 되니 여느 때처럼 봉정암의 하루를 여는 도량석 목탁소리가 소청봉고개로 올라갑니다. '딱! 딱! 딱!, 똑! 똑! 똑!' 소리가 점차 작아지는 내림목탁과 소리가 점점 커지는 올림목탁을 반복하며 도량을 아침을 열어갑니다.
아직 캄캄한 밤이건만 기도로 밤을 새운 사람들이 하루의 시작을 기도로 열어갑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귀의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가르침에 귀의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스님들께 귀의하겠다는 자신의 다짐으로 기도의 아침을 열어갑니다.
맑아지는 마음을 따라 하루아침이 밝아옵니다. 어둡던 사방이 훤하게 동터오니 마음도 밝아집니다. 아침예불을 올린 사람들이 사리탑으로 올라갑니다. 2551년 전,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탄생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사리탑으로 올라갑니다. 여느 때도 그랬겠지만 탄신일을 맞으니 더 없이 예경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친견하듯 사리탑을 향해 찬탄의 절을 올립니다.
사람들은 구암스님을 따라 사리탑으로 올라가 탑돌이를 하였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언감생심 꿈을 꿔서도 안 되는 불경한 행동이지만 탄신일에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 사리탑에 올라가 탑돌이를 할 수 있는 환희의 기회입니다. 사람들 얼굴에서 광채가 납니다. 돌고 또 돌며 염불하고 기도합니다. 탑돌이를 마친 사람들이 바위에 앉았습니다. 정말 기쁨이 뚝뚝 묻어날 것 같은 그런 표정으로 앉아, 구암스님이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 주변 산세를 둘러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깁니다.
저기는 마차바위, 저기는 귀때기봉... 바위 하나 봉우리 하나에 얽힌 설화들을 들려주지만 그건 바로 스님이 전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설법입니다. 바위의 생김새와 설화 한 토막일지언정 어찌나 사람들이 좋아하고 행복해 하던지 눈앞이 흐릿해집니다. 그렇게 좋아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조차 울컥합니다.
사리탑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구암스님을 따라 전망대로 올라섭니다. 애국가의 배경화면으로 나오는 용사장성의 기암들과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마음 모으고, 두 손을 모은 사람들이 하룻밤의 인연으로 서로를 위해 기도합니다.
사리탑을 내려온 사람들은 아침을 먹었습니다. 옹기종기 연등 아래 모여 앉은 사람들에게 석가탄신일이 아니면 맛 볼 수 없는 과일과 떡, 전과 같은 특식이 나눠집니다. 지극한 사람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가져온, 부처님께 올리려고 걸머메고 짊어지고 올라온 공양물을 부처님께 올렸다 모두가 나눠먹는 특별한 아침입니다.
아침을 마친 사람들은 하산을 준비합니다. 하룻밤에 얻은 영감과, 하룻밤에 돌아본 자신을 뒤로 하며 일엽편주가 되어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속세로 흘러갑니다. 사람들은 떠났어도 오색의 연등은 아침 바람에 화답합니다. 흔들흔들 어깨춤으로 부처님의 탄신을 경탄합니다.
사람들 마음이 갸륵하고, 사람들 정성이 지극하니 연등이 춤을 춥니다. 흔들리는 연등은 봉황의 춤이었고, 춤추는 연등은 부처님의 마음이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