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갑사 대적전. 대웅전 영역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갑사의 본래 자리로 추측되는 곳이다.
ⓒ 안병기
석가, 내 정신적 고향을 찾아서

며칠 전부터 내 화두는 '올 부처님 오신 날엔 어디로 갈까'였다. 올해 들어 한 번도 '멀리 발걸음을 한 적'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러니 오대산이나 지리산 쪽 암자를 행선지로 택하라는 거다. 그러나 일기예보는 석탄일에 많은 비가 내릴 거라고 예고한다.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을 찾다보니 계룡산이 가장 만만하다.

갑사 입구에서 버스에서 내려 그윽하기로 이름난 오리숲으로 들어선다. 숨을 들이쉬자 숲 내음이 왈칵 달려든다. 가을 갑사가 좋다지만 난 이 맘 때쯤의 신록이 제일 좋다. 길을 걷다보면 어느덧 신록처럼 싱그러워지는 내 자신을 느낀다. 나뭇잎이 내가 되고 내가 나뭇잎이 되는 이 일체감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오늘(24일)은 불기 2551년 부처님 오신 날이다. 이 길에 나 말고 아무도 없다면 큰 소리로 황지우의 시 '노스탤지어'를 읊으며 가고 싶다.

나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아직도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그 고향.........무한한 지평선에
게으르게,
가로눕고 싶다;
인도, 인디아!
무능이 죄가 되지 않고
삶을 한번쯤 되물릴 수 있는 그곳 - 황지우 시 '노스탤지어' 전문


난 시인이 어떤 정신적 고향을 꿈꾸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시인이 자신의 정신적 고향을 꼭 인도로 한정짓지는 않았다는 건 알겠다. '삶을 한 번쯤 되물릴 수 있는 그곳'이면 충분한 것이다. 나 역시 스무 살 이후 정신적 고향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찾아 가고 그곳을 찾고 있는 중이다. 그 모색은 생의 종착역인 죽음에 이르지 않고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고향이란 말을 떠올리면 난 '궁극'이란 말을 함께 떠올린다. 석가모니는 고향에 도착한 사람이다. 사람의 삶이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궁극에 이른 사람이다. 불교신자가 아니면서 난 왜 석가를 경배하는가. 아직도 내가 이르지 못하고 있고 이를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궁극에 그는 이미 4500여년 전에 도달해버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옛 국립공원관리사무소는 '시인의 마을'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오른쪽 오솔길로 방향을 우회한다. 당간지주와 대적전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다. 본래의 갑사가 있었던 자리로 추측되는 곳이다. 바꾸어 말하면 갑사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24개의 철통을 연결한 높다란 당간지주는 나를 보면 옛 갑사의 규모를 알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한다. 시누대 숲 사이로 난 길을 오르자 대적전 안에서 들려오는 스님의 독경 소리가 시냇물처럼 잔잔하게 흘러온다. 독경 소리에 적셔진 마음을 끌고서 계곡을 건너 대웅전으로 향한다.

▲ 갑사 대웅전 마당. 관욕 의식을 행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 서 있습니다.
ⓒ 안병기
▲ 스님이 초파일 법문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 안병기
대웅전 마당은 벌써부터 각종 소리로 사뭇 시끄럽다. 스피커에선 스님의 법문이 들려오는데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마당 가운데엔 관욕 의식에 참가할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다. 관욕 의식은 아기부처를 목욕시킴으로써 자신의 마음 속 때를 씻어내는 의식이다. 타인을 목욕시킴으로써 자신의 때를 씻어낸다는 것은 유쾌한 역설이다.

잠시 관욕 의식을 지켜보다가 나는 또 다시 궁극을 생각한다. 지엽은 무엇엔 가에 자꾸 매달려야 하지만 궁극은 마음에 와 매달리는 것을 자꾸 버려야만 도착할 수 있는 지점이다. 저렇게라도 마음의 정화를 이룰 수 있다면 굳이 흉볼 건 없다.

그러나 임시방편에 너무 의지하다보면 깨달음은 둘째 치고 조그만 생활의 지혜조차 얻기 힘들다. 방편은 아주 많이 흔들릴 때나 최후에 의지해야지 버릇이 돼선 안 된다. 쉬운 길에는 남이 갔던 길을 그대로 답습하는 길이 많다.

갑사를 나와 약사여래가 있는 삼거리에서 연천봉 쪽을 택해 걸어간다. 여기서 약 700m가량 가면 대자암이 있다. 대자암에는 무문관이 있고 방편보다는 궁극을 추구하는 스님들이 있다.

▲ 대자암 전경. 연천봉 가는 길목 깊은 숲속에 있다.
ⓒ 안병기
▲ 무문관이라고 부르는 대자암의 선방들.
ⓒ 안병기
길의 시작은 고요한 오솔길이다. 마음이 그윽하고 평화롭다. 그러나 길은 그럼 평화를 오래 내버려두지 않는다. 한참 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막길을 오른 뒤에야 대자암에 도착한다. 이곳 역시 사람들로 넘쳐나긴 마찬가지다. 잠시 대웅전 기단에 서서 문필봉과 연천봉을 바라보며 숨을 고른다. 봉우리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거기 시끄러운데 오래 머무르지 말고 어서 자기한테 오라고 한다.

대웅전 오른쪽으로는 이름 없는 건물들이 몇 채 있다. 들어가는 문은 있지만 나오는 문은 없다는 무문관들이다. "저 선방 아래는 토굴식으로 돼 있다"고 한 재가 수행자가 귀띔한다. 그에게 들으니 3년 결사로 용맹정진중인 스님도 있다고 한다.

작가 송기원도 한때 이곳에서 1년 동안을 수행했다고 한다. 삼불봉 쪽으로 10여분 더 올라간 기슭에 있는 토굴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폐쇄된 모양이다. 도서출판 <산처럼>에서 나온 <내 마음에 남은 절>이란 책에서 송기원은 그 시절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바깥세상의 한 줄기 햇빛은 물론 한 가닥 바람 소리며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깊은 토굴속에서 나는 다만 텅 빈 공간만으로 꼬박 한 해를 보냈다. 그런 어느 날 나는 마침내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우며 새롭게 생겨난 나를 만날 수가 있었다. 나는 대자암의 대웅전으로 내려와, 거기 연꽃 자세로 앉아 계시는 부처님과 겹쳐 새로운 나를 앉히고 삼배를 드렸다 - <내 마음에 남은 절> 87쪽

약간 흥분된 진술이긴 하지만 '새롭게 생겨난 나'를 만난 순간이니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나도 언젠가 이곳에 와서 몇 달 참선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무문관 뒤 산신각 뒤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올라간다.

이상하다. 산을 한참 동안이나 올랐는데도 계룡산 촤고봉인 천황봉이 바라다 보이는 위치가 전혀 가까워지지 않는다. 곧 비가 몰려올 것 같은 날씨다. 이럴 때 까딱 잘못해서 길을 잃었다간 큰 낭패를 보기 마련이다. 왼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나 살피며 간다. 왼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면 신흥암쪽으로 내려가는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참 가다보니 내려가는 길이 희미하게 나 있다. 이게 길이 맞나 싶은 불안을 억누르고 10분가량 아래로 내려가니 신흥암이 나온다. 신흥암에 잠시 들른 다음 금잔디고개로 난 가파른 산길을 올라간다.

▲ 속칭 남매탑 아래에 위치한 상원암.
ⓒ 안병기
▲ 속칭 남매탑이라고 부르는 청량사지 석탑. 한 보살이 촛불을 켜고 있다.
ⓒ 안병기
금잔디 고개에 이르자 한 방울, 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가 가까운 시간이다. 평소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 소걸음으로 온 것이다. 이번엔 뛰다시피 걸음을 빨리해서 걸어간다. 숨을 고르며 조금 앉았다 가도 좋으련만 삼불봉고개를 그냥 지나쳐 득달같이 상원암에 닿는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 탓일까. 상원암에는 참배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남매탑 앞에선 한 보살이 촛불에 불을 붙이고 있다. 벌써 몇 번이나 불을 붙였지만 세찬 바람을 당해내지 못하고 이내 꺼지고 만다. 지켜보고 있는 내 마음이 괜히 조마조마하고 위태로울 지경이다.

바슐라르가 그랬던가. 사람이나 나무나 머리를 하늘로 두른 것은 다 촛불이라고 했던 게. 촛불 켜기를 이쯤에서 그만 두고 차라리 아주머니 자신의 마음에다 등불을 켜선 안 되는가.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그만 생각을 접고 일어나서 동학사 쪽으로 뻗은 산길을 달음박질치다시피 달려 내려간다.

▲ 동학사 대웅전. 참배객들이 오체투지로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있다.
ⓒ 안병기
동학사 대웅전 안에는 많은 참배객들이 오체투지로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있다. 형식이라고 마냥 배타할 것만은 아니다. 내 경험칙은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채워가는 수가 적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사람들은 저렇게 절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저렇게 마음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절하는 자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사람이 품은 신심의 깊이가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하다.

나도 경험해봤지만 일배, 이배, 삼배...를 계속하다 보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신심이 우러나는 걸 느낄 때가 있다. 그러기에 예전 성철 스님은 "날 만나려거든 삼천배를 하고 와라"고 했다지 않는가,

저 분들의 주된 기도 내용은 무엇일까. 설마 오늘 같은 날 기도의 대부분을 습관처럼 기복으로 채우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석가모니가 이 땅에 오신 진정한 뜻도 함께 새겼으면 싶다.

▲ 동학사 설법전. 평소에는 '출입금지' 구역이다.
ⓒ 안병기
평소 동학사는 여기저기 금지 구역이 많다. 몇 걸음만 가면 여염집 내외담처럼 낮은 담장이 쳐져 있다. 비구니들이 학문적 기초를 연마하는 승가대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모든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동학사 경내 서쪽 맨 끝에는 설법전이라는 전각이 있다. 이곳 역시 평소에는 '출입금지' 구역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해방감에 젖어 설법전을 향해 걸어간다. 87년 6월 항쟁 이후, 얼마만에 경험하는 해방구인가.

설법전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석가모니가 이 땅에 오신 뜻을 생각한다. 시(詩)라는 한자가 말씀 언변에 절 사자를 쓰기 때문일까. 절에 오면 시가 절로 떠오른다. 정현종의 시 '가난이여_인도시편'은 석가모니가 중생의 가난을 구제할 수 없어 스스로 헐벗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시의 말미에 이르러선 "그리하여 한 사람의 알몸이 빛났다/그리고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라고 결론짓는다.

누가 뭐래도 석가모니는 인류에게 마음의 고향이다. 그리고 내가 산사를 자주 찾는 것은 마음의 고향이 그리워서이다. 지금의 우리에게 석가모니 당시의 가난은 전설이 되어있는 대신 정신의 가난이 위험 수위에 다다랐다. 물질이 정신을 개벽한 결과는 결코 낙관적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이대로 영영 구제불능의 존재가 되어 가는가.

▲ 석탄일 행사와 등산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산을 내려가고 있다.
ⓒ 안병기
마음은 채워야 가벼워진다

산사 순례를 끝내고 집으로 가기 위해 동학사를 나선다. 산사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곳에 가면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가분이 든다는 것이다. 채움으로써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진다는 모순. 그것이 인간의 마음이 가진 알 수 없는 수수께끼다. 십우도 속 기우귀가 장면을 떠올린다.

소를 타고 유유히 집으로 향하니 오랑캐 피리 소리 마디마디 저녁노을에 실려 간다. 한 박자 한 가락이 한량없는 뜻이러니. 곡조를 아는 이여, 굳이 무슨 말이 필요하리오.

오늘, 나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계룡산 여가저기 흩어져 있는 산사를 순례했다. 그러나 오늘은 소를 발견하지도 못하고 마음을 가득 채우지도 못했다. 때 낀 마음을 내려놓고 기쁨으로 대신 채우지도 못했다. 하루 종일 부처의 그림자만 더듬다 가는 게 아닐까.

만약 그 옛날 임제선사가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다면 "너 이놈! 오늘은 어느 허공에다 말뚝 박다 왔느냐?"라고 죽비 몇 방을 내려칠 것이다. 저만치 앞서 가는 사람들은 오늘을 어떻게 보냈을까.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한 비가 마음을 한층 무겁게 한다.

태그:#갑사, #대웅전, #석가탄신일, #무문관, #대자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