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마치 조승희만큼이나 외톨이였고 괴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던 나는 그저 방관자이자 구경꾼이었다.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사망한 이한열의 시신을 지키는 사수조에 참여하라는 전화도 무시했고, 이한열의 장례식 날 신촌에서 시청까지 인파로 뒤덮인 날, 개미 한 마리 없는 도서관에 혼자 있었다."

<바람난 가족>, <그때 그 사람들>, <오래된 정원> 등 '임상수표 영화'다운 거침없는 자기 고백이었다.

지난 14일 열린 6월 민주항쟁 20년 기념 대토론회 '민주화 20년, 문화 20년 상상변주곡' 4회 주제 발표를 맡은 임상수 감독이 "먼저 자신을 추슬러야 할 필요가 있는 민주화 세력"이라며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사를 인용, "자기 고백을 통한 자기 복원 없이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가 청산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 임상수 감독
ⓒ 이정환
우리들의 모습은? 대단히 유치한 골목대장 문화
그리고, 하늘도 알고 당신도 알고 나도 아는 거짓말이 통하는 사회


먼저 임 감독은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을 언급함을 용서하시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6월 항쟁의 빛나는 성과가 없었다면 찍기 어려웠을 영화가 '그때 그 사람들'"이라며 "세상이 조용해지니까 이제 까분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빛나는 시대를 만들어 준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영화"라고 전제했다.

그리고 임 감독은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을 둘러싼 논란을 통해 "제도적으로는 그럴듯한 민주 체계를 갖췄지만, 여전히 별로 변하지 못한 우리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본론을 꺼내들었다.

그는 "감독이 어떤 캐릭터를 나쁘게 그리는 일은 대단히 쉬운 일이라 크게 의미가 없는 작업인 만큼, 박정희를 더 맵게 씹지 않았다는 진보 진영의 비판은 표면적"이라며 "'그때 그 사람들'에서 그려진 수구·보수적인 인간관계에서 자기들의 모습을 봤기 때문에 비판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고 '그 때'를 다시 문제 삼았다.

임 감독의 문제의식은 보수 진영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그는 "나중에 '걔(임상수) 죽여'라는 이야기가 들려올 정도로 당시 조중동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영화를 살벌하게 비난했다"면서 "영화 속에서 역시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했기 때문에 상당히 불쾌하고 화가 났던 것으로 본다"고 보수 진영 비평의 속내를 되짚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소개하면서 임 감독은 "대단히 유치한 위계질서가 작용하는 골목대장 문화"와 이를 바탕으로 하는 "하늘도 알고 당신도 알고 나도 아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영화에 나타난 '아직 극복하지 못한 우리들의 대표적 모습'으로 꼽았다.

이어 임 감독은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쓰레기 같이 놀면서도 민족 중흥을 위해 산다는 거짓말이 통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아주 기회주의적으로 살면서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다 몇 년 전 은퇴한 노정치가"를 예로 들고 "천박한 언론의 야합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임 감독이 말한 '우리들 모습'은 노 정치가에서 머물지 않았다. 그는 "청산이란 거대한 가치는 5년 정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면서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되어야 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사 역시 '터무니없는 거짓말'의 예로 제시했다.

민주화 세력은 자기 고백부터 하라

이처럼 '골목대장 문화'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통하는 사회'부터 먼저 청산해야 할 굴절된 풍토로 제시한 임 감독은 "보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우리들의 과거라며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라고 입 다물고 있는 형국"이라고 '우리들의 현재'를 진단했다.

그리고 임 감독은 "이 정도도 청산하지 못하는 한, 허위 의식으로 가득차 심심해서 한번 뛰어 보려고 나선 월드컵 구경과 6월 항쟁의 차이를 구별하기 힘들다"면서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린 만큼, 충분히 쥐어짜서 얻을 만큼 얻어내지 못한 결과"라고 '자기 고백을 통한 자기 복원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임 감독은 "'네 탓이냐, 내 탓이냐' 차원을 넘어서는 어떤 상처 또는 불쾌한 일이 있어도 내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자기 고백"이라며 자기 복원의 모델로 김근태의 '남영동', 김병진의 '보안사,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권인숙의 '대한민국은 군대다', 장선우의 '꽃잎', 이창동의 '박하사탕' 등을 제시했다.

임 감독은 "자기 고백을 통한 과거도 복원하고 자기도 복원하는 과정이 부족하기에 많은 피를 흘렸으면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있다"며 "'나 좀 운동했네', '빵에 살았네'하며 누리고만 다녔지, 실제 얼마나 당했는지 제대로 얘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민주화 세력에 일침을 놨다.

이어 임 감독은 "그러면서 감히 청산을 운운하기에는 너무 불안한 존재 아니냐, 먼저 자신을 추슬러야 될 사람들 아니냐"면서 "자기 고백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떠드는 행태, 자신의 과거를 복원하지 않고 '굴절된 풍토'를 청산하겠다는 주장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끝으로 임 감독은 "너무 앞으로만 달려가다 보면 과거에서 어떤 가치를 끌어내기는 어려운 일"이라며 "식민지 시대, 이승만 시절, 한국전쟁, 박정희 시절, 전두환 시절을 거치면서 계속됐던 왜곡된 가치 체계의 청산이야말로 민주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의 임무"라고 마무리했다.



황당..."너희들이 대동의 의미를 알아?"
임상수 감독 '고백'에 대학생들 호응

▲ 강유정 영화평론가(왼쪽),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오른쪽)

임상수 감독의 '자기 고백' 덕분이었을까. 이날 토론을 방청한 대학생들은 임 감독의 주장에 공감을 표시하면서 자신들의 '고백'을 더해 '상상 변주'에 가세했다.

한 여학생은 "지금까지 상상변주곡 토론회를 계속 참석했는데, 그동안 6월 항쟁 당시 이야기들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면서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을 위해 있는 그대로의 복원은 중요하다고 본다. 임상수 감독의 말머리는 굉장히 중요한 복원 작업이라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민주화 세력에 대한 문제 제기도 강하게 나왔다. 한 남학생은 "젊은 세대들이 경제적인 면을 추구하는 세태를 보고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민주화 세력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본다"면서 "군사정권을 사라지게 한 것에 안주해서 손을 놓은 것이 아니냐"고 주장했다.

다른 여학생도 "대동제 때 술 마시자고 했더니, '너희들이 대동의 의미를 알아'라는 반문이 나와 굉장히 황당했다, 운동한 분들 폼 잡으면서 얘기하는 것 보면서 '꼰대'라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며 "옷차림이나 태도가 달라도 본질은 같다고 보는데도, 이런 현실과 만나면 87과 03의 괴리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답답해진다"고 털어놨다.

이에 임상수 감독은 "'바람난 가족'의 김인문(배우)씨를 통해 '대물림'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젊은 세대의 모습은 모두 위 세대의 책임"이라며 "386을 수사학적으로 내세우면서도 애들을 이렇게(경제적인 면을 추구하도록) 키우는 사람들이 진짜 추악한 배신자 아니냐"고 말했다.

토론자로 나선 영화평론가 강유정씨는 "학교 다닐 때 잠깐 유행했던 X세대란 말처럼, 386 세대론 자체의 유효성에 의문을 제기한다"며 "386을 수사학적으로 내세우는 사람들은 사실 끝까지 386으로 가고 싶은 욕망을 반영하는 것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강씨는 "학교에서 병원 진단서를 끊어와서 정정을 요구하는 결석 학생들을 볼 때 가장 놀라곤 한다"며 "어떻게든 '누수'만은 막겠다는, 자기 논리나 윤리까지 세속적 기준에 맞추는 것을 목격하는 상황이라 솔직히 '앞'이 잘 안 보인다"고 토로했다.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도 "지금 시대에는 적이 대단히 애매한 만큼, 지금 세대에게 뭐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며 "과거에 대한 고백과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말로 임 감독의 주장에 동감을 표시했다. / 이정환

태그:#임상수, #민주화, #386, #박정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