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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2월 13일 대한민국에서 스페인으로 떠났습니다. 서울을 출발한 지 5시간이 지나도록 발 밑에는 드넓은 러시아 영토만 펼쳐져 있고, 가도가도 스페인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 이은비
2월 13일 오전 10시 40분.

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똑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서울을 상공에서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서울발 프랑스 파리행 대한항공은 이제 막 이륙한 참이었지요. 파리를 경유해 스페인 말라가로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여행준비 하루 만에 스페인으로!

실로 급하게 준비한 여행이었습니다. 전날에서야 수배한 왕복 항공권과 3벌의 상의, 각각 1벌씩의 하의와 치마, 간단한 세면도구 등으로 꾸린 간소한 캐리어가 제 수중에 있는 전부였습니다.(물론 이 안에는 그 외에도 정말 괴상한 용도의 옷이 하나 있었습니다만.)

일의 발단은 이랬습니다.

반년 전, 스페인 살라망까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간 친구 규연이는 고국의 친구들에게 그리움에 사무쳐 "언제 한 번 놀러 와"라고 타전하곤 했고, 저 역시 버릇처럼 "그래, 너 있을 때 한 번 가야겠구나"라고 응수하곤 했었지요.

하지만 반 년 전 저는, 하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을 하며 지내던 직장인이었습니다. "한번 갈게"라는 인사 속에는 "응, 그래. 나중에 한번 보자"라는 식의 인사치레도 어느 정도 섞여있었지요. 그리고 결론은 언제나 "미안, 이번에도 휴가는 없대. 지금은 일이 너무 바빠서 역시 여행은 안 되겠어"로 끝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 돌연, 지난해 12월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됐습니다.

직장을 옮기기에 적당한 나이라고 생각하던 저는 모처럼 생긴 기회가 휴식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주변에서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게 어떠냐'라는 말을 들으면 그때마다 구변 좋게 "그래요. 여행 좋죠"라고 응수하면서도, 실제로는 여행에 대해 보류하고 있었습니다.

핑계는 많았지요.

돈도 없고, 지금 빨리 직장을 구하지 않으면 다시 직장을 잡기 힘들지도 모르고. 여행이란 건, 나와는 아주 먼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고 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어떤 잡지사에 채용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여행을 가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라도 이 잡지사에 채용될지도 모르니까'라는 심정으로 여행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종종 제게 연락을 넣어왔죠. "언니, 나 2월 20일이면 돌아가. 그 전에 올 수 있어?"

저는 자신 없게 대답하고는 했습니다.

"나도 가고 싶어. 그런데 이 회사 채용발표가 2월 8일에 나. 만에 하나 채용이라도 되면 여행 갈 수 없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봐야겠어."

어떤 턱없는 자신감이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아마도 그 회사에 채용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2월 8일, 저는 제가 채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됐습니다. 그날 밤 저는 대체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무얼 하며 살지에 대한 고민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나 자신의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나이는 꽉 찼고, 경력은 있으나 내가 원하는 회사에서 보기에는 그리 매력적인 경력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어쩌면, 내 상황을 너무 낙천적으로만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나를 압도하자, 꼼짝할 수 없는 절망감이 몸을 휩싸고 돌았습니다.바로 그때, 저는 제 앞에 남겨진 친구의 글을 보았습니다.

"언니,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겁니까? 시일이 가까워져 오는데 걱정돼서 글 남겨요."

갑자기, '내가 지금 왜 여기 앉아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나는 3년을 하루같이 일하면서도 언제나 이런 기회만을 기다려왔잖아요. 내게는 엄청난 시간과, 3년간 미친 듯이 일해서 벌어놓은 퇴직금과, 튼튼한 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다음 날 바로 항공권을 수배하고 그날 저녁에 대충 가방을 싼 뒤, 여행 준비 하루 만에 스페인으로 떠났습니다.

말라가 도착 첫날 숙소 고르기

그때가 그러니까, 2월 13일이었습니다. 친구가 한국으로 귀국하기까지는 일주일 남짓 남아있었죠. 애초에 그녀와 나는 일주일을 함께 여행할 생각이었지만, 사려 깊은 친구는 제게 충고했습니다. "언니가 일부러 시간 내서 스페인까지 오는데 나랑 계속 같이 다니느라 자기가 보고 싶은 걸 못 보면 아깝지 않을까? 난 어차피 한국에 돌아갈 준비 하느라 살라망까랑 마드리드를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그동안 언니가 보고 싶은 걸 보면 어때?"

그래서 저는, 언제나 가고 싶었던 남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을 여행해보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친구와는 여행을 시작한 3일 뒤 마드리드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지요.

물론, 준비된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디서 잘지도, 어떻게 이동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로 단지 그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무엇인가가 해결되리라는 믿음에 가까운 신념만이 제게 있었지요.

글쎄요, 여행에 잔뼈가 굵어서 나름대로 배짱이 생겼던 것일까요, 아니면 아무리 고생해도 3일 후면 마드리드에서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여유가 있어서였을까요.

비행시간만 15시간. 스페인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스페인까지 직항하는 항공편은 없으며, 파리나 암스테르담을 경유해야 합니다. 긴긴 시간 동안 영화도 세 편 보고, 잠도 자보고, 서울에서는 못 짠 여행루트도 그제서야(!) 고민해보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 동안 스페인에 도착했습니다.

스페인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시각으로 밤 11시 05분. 너무 늦은 시각이었기 때문에 숙소를 물색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말라가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꽤 먼 거리였지요.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 스페인 내에서 유명하다는 말라가 파라도르(중세의 성채를 개조한 스페인 국영호텔)에서 묵을 것인지의 여부를 무척 고민하기도 했습니다만 단지 잠만 자고 내일 아침부터 바로 시내구경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국 파라도르에서는 묵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숙박시설에 묵는다면, 본전을 뽑기 위해서라도 적어도 하루 동안은 두문불출하며 푹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그런 호사는 늙어서 누려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현지에서 해결한다!'는 각오로 시작한 여행이었기에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공항 내 인포메이션 센터로 직행했습니다. 그러나 공항 내 인포메이션 센터에는 그다지 많은 정보가 없더군요.

예쁘장한 센터직원은, 숙소를 추천해 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 근처에 비즈니스호텔 체인은 몇 개 있지만 시내까지는 꽤 떨어져 있고 공항에 가깝습니다"라는 전형적인 대답만 내 놓았습니다. 여성인 내가 오갈 곳도 없이 오도카니 공항 한복판에 서 있는 게 걱정됐던지, 센터직원은 내게 "서둘러요. 지금 버스를 타지 않으면 시내로 갈 수 있는 버스도 끊겨 버릴 거예요"라며 시계를 가리켰습니다.

<저스크 고! 스페인> 말라가편 325쪽...

어느새 11시 25분을 지나고 있더군요. "괜찮아요. 어차피 택시 탈 생각이었어요"라고 '쌍콤하게' 미소를 날려줬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제 처지가 한심합니다.

할 수 없이 한국에서 가져간 여행 안내책자를 펴들었습니다. 인천공항에서 부랴부랴 산 <저스트 고! 스페인>의 말라가편 325페이지에는 네 곳의 호텔이 안내돼 있는데, 하나같이 숙박비 비싸기가 하늘을 찌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소개된 곳이 있었으니, 바로 호뗄 카를로스 킨토(카를로스 5세 호텔). 저는 한국에서 로밍해 간 핸드폰으로 카를로스 킨토 호텔 전화번호를 눌렀지요.

"안녕하세요. 전 외국인이며, 지금 막 말라가 공항에 도착했고, 예약도 하지 않았습니다. 귀 호텔에 지금 가도 방을 구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자, 호텔 측에서는 비수기였던 탓인지 호텔에 방이 많다며, 와도 좋다더군요. 좋아요. 숙소해결입니다.

저는 호기롭게 센터직원에게 "무챠스 그라치아스(대단히 감사합니다)!"라는 인사까지 던지며 공항을 나와, 택시에 올라탔습니다.

택시 운전기사에게 "카를로스 킨토 호텔을 아십니까?"라고 묻자 운전기사는 지체 없이 차를 출발시키며 스페인어로 "Si, Si, Hotel Carlos V!(그럼, 그럼. 오뗄 까를로스 낀또!)"라고 대답하더니 여유롭게 궐련에 불을 붙입니다.

아, 택시기사마저 잎궐련을 피우는 곳이라니. 여기가 역시 스페인이 맞군요.

뒷좌석에까지 진동하는 궐련향을 내보내기 위해 차 창문을 내리니 바깥바람이 따뜻하게 밀려들어 옵니다.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는 듯 밤바다 냄새가 바람에 섞여있습니다. 불과 15시간 전에 제가 있던 곳은 영하 7도의 서울이었는데 말이지요. 궐련향이 섞인 온난한 바람을 맞으며 처음으로 스페인에 온 것을 실감했습니다.

수백년된 대성당에 감격하다

쭉 뻗은 공항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한 지 10분여, 택시는 점차 말라가 시내로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간간이 동네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는 아이들이나 길거리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왁자지껄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래,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지'라는 안도감이 밀려옵니다.

도로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야자수 나무가 지겨워지기 시작할 즈음, 갑자기 택시가 알라메다 프린시펄(Alameda Principal) 도로에서 몰리나 라리오(Molina Lario) 거리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와 함께 눈에 들어오는 장엄한 까떼드랄(Catedral:대성당)!

어둠에 잠긴 말라가의 밤풍경 속에서 까떼드랄만이 도시의 가로등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는 하루의 일과를 끝낸 몇 대의 관광객용 마차가 조용히 늘어서서 말과 함께 잠들어 있었습니다.

보는 순간, 감격에 목이 콱 막혀왔습니다. 수백 년간 늘 똑같은 모습으로 저기에 서 있었을 대성당이 지금도 내가 숨쉬는 이 공간에 저렇게 서 있다니. 저 대성당이 견뎌왔을 시간과, 내가 저 대성당의 수백 년 된 시간을 함께 호흡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벅차 오더군요.

택시는 까떼드랄을 한바퀴 돌더니 좁다란 골목 속으로 들어가 멈춰 섰습니다. "세뇨리따, 까를로스 낀또!"라는 택시기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가방과 캐리어를 챙겨 거리로 내려섰습니다. 공항에서 여기까지 20유로(1유로는 약 1300원). 가격압박이 심합니다. 그러나 심야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며 호텔을 쳐다봅니다.

호텔이라고 들었는데, 까를로스 낀또는 족히 100년은 넘었음직 한 낡고 좁은 건물을 개조한 숙박시설입니다. 늦은 시간이라 문이 닫혀 있어, 간신히 옆쪽을 더듬어 벨을 누르니 문이 열립니다. 리셉션 창구에는 양복을 갖춰 입고 나비넥타이를 맨 노신사가 서 있었습니다. 이렇게 늦게 온 여행객을 나무라는 듯이 하얀 눈썹을 조금 찌푸리는군요.

가격을 물어보니 하룻밤에 싱글룸으로 34유로라고 합니다. <저스트 고! 스페인> 325페이지에는 23.44유로라고 씌어 있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하지만 장시간 비행으로 지쳐 있었거니와, 시간이 늦어서 더 이상 다른 곳을 찾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저는 열쇠를 받아 위층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이후로도 저는 그날 밤만큼 비싸고 제값 못하는 숙소에서 묵어본 적이 없습니다. 좁고 어두침침한 복도를 지나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니 욕실이 딸린 작은 방이 나옵니다. 8평 남짓한 방 한쪽에는 작은 싱글침대와 TV 한 대가 덜렁 놓여있습니다. 겨울이라 밤에는 쌀쌀하건만, 남부지방이라 그런지 난방시설은 전혀 돼 있지 않습니다. 다만 담요 한 장이 이불 밑에 딸려있을 뿐입니다. 내일 아침 말라가의 밝은 햇살과 함께 일어나리라 생각하며 두꺼운 커튼을 밀어젖히고 창문을 열어보니 벽으로 막혀있습니다.

호텔임에도 안에서 문을 잠글 수 있는 안전장치는 전혀 없기 때문에, 신변상의 안전문제가 조금 걱정되긴 했습니다만 하룻밤만 묵으리라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나니 별로 거리낄 건 없더군요. 다행히 방에 딸려있는 작은 욕실에서는 따뜻한 물이 잘 나왔습니다.

장시간 비행에 지친 몸을 뜨거운 물로 녹이고, 방으로 들어와서 TV를 켜려고 하니 TV가 먹통입니다. 저 TV는 장식용으로 올려둔 걸까, 따위의 생각을 하던 저는 그만 김이 빠져버려서, 숙소를 사진으로 찍을 생각도 포기하고 침대로 기어들어가 버렸습니다.

첫날 하루가 그렇게 저물었습니다.

태그:#스페인, #말라가, #여행, #배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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