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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통영의 해를 맞고 있는 이병철 선생님
ⓒ 김은주

둘째날도 날씨는 쨍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이병철 선생님(귀농운동본부 본부장)과 숙소 뒤 작은 섬에서 아침 바다를 맞는다. 즉석에서 지어주신 시 두 편과 선생님의 노래 덕에 이 아침이 한결 환하다.

지난 밤에 곧 출간할 책 때문에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명징한 정신으로 다시 들으니 생명평화 결사 이야기나 생태적 인간의 출현을 간절히 기다려야 하는 까닭 등이 마음에 하나하나 또렷이 새겨진다.

이미 저만치 떠오른 해를 뒤늦게 맞이한 아침이지만, 덕분에 마음은 쾌청이다.

돌고래야, 다시 나타나주면 안 되겠니

왼쪽 바위 꼭대기에 하얗게 말라 있는 것이 천년향이다.
ⓒ 김은주
오전 9시에 통영 유람선 터미널을 떠나 거제도로 향한다. 갈곶도 십자동굴을 지나고 거제 해금강의 수려한 풍경을 지나는데, 저만치 하얗게 죽어 있는 천년향이 보인다. 역시 태풍 매미 때 파도를 뒤집어쓰고 말라죽은 것이라 했다.

천녕향은 몇 해 전에 왔을 때만 해도 유람선 안내하시는 분이 소리높여 자랑하던 나무다. 천리 밖까지 향이 난다고 등대 없어도 그 향 때문에 배들이 난파할 염려는 없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즐겁게 들었다. 이제 더 이상은 그윽한 냄새를 맡을 수 없다 하니 내심 속상하다.

거제 학동까지는 한참을 가야 한대서 선실에 들어가 앉아 있었더니 갑자기 사람들이 와글와글하면서 들어온다. 돌고래를 보았단다. 그것도 세 마리씩이나. 이럴 수가! 무리지어 헤엄쳐 가는 모습을 보았다는 소리에 당장 뛰쳐나갔지만 다시 볼 수는 없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영화의 첫 장면에 돌고래들이 나와서 그런다. "안녕! 안녕! 지구인들이여 안녕!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가 경고를 했는데도 너희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지. 이젠 안녕!" 하고. 영민한 돌고래들은 지구의 시계가 멈추는 때를 누구보다 잘 알 것이라는데, 나 역시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든다.

돌고래를 만나게 되면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아쉽다. 아무리 기다려도 녀석들은 다시 나타나 주질 않았다. 그래도 이 바다에 돌고래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 일인가.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 하니까 기관장 아저씨가 돌고래 대신 바다 위에 잔뜩 떠 있는 아비들을 보여 주신다. 뾰족하고 길다란 낫처럼 생긴 부리를 가진 새.

아비들이 가끔씩 바다 속으로 자맥질하며 떠 있다. 이 새들도 한반도가 점점 따뜻해지고 있어서 보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한다. 아비들에게 돌고래에게 안부를 대신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바다를 향해 밭가는 농부와 소, 따뜻하다

거게도에서 만난 소와 농부
ⓒ 김은주
오전 10시 30분, 거제 학동 수산마을에 내려서 몽돌해수욕장까지 걸었다. 가는 동안 바다와 닿아있는 작은 밭에서 써레질하는 농부와 소를 만났다.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를 향해 밭을 가는 두 존재의 모습, 자못 장엄하다.

몇 해 전 청산도에서 만난 밭 갈던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소랑 말이 참 잘 통한다고 자랑하던 할아버지였는데, 거제도에서는 멀리서 밭을 갈고 계시는지라 가까이 가서 말을 걸지는 못했다.

기계로 밭을 가는 풍경이 익숙해지고 더 이상은 소로 농사를 짓는 일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아진 요즘이지만 그래도 깊은 산골 다락밭이나 기계가 들어갈 수 없는 모양의 논, 또 빚 내서 기계를 사느니 몸 힘든 게 낫다며 소로 농사를 짓겠다고 고집하는 농부가 남아있는 땅에서는 가끔, 아주 가끔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광경을 만나게 된다.

고된 노동의 현장이지만, 어릴 적 시골집에서 보던 풍경에 닿아있는 모습이라 한사코 정이 가는 것 같다.

바다가 보이는 밭에서, 부부의 손길이 바쁘다
ⓒ 김은주
몽돌 해수욕장은 친구들과 꽤 여러 번 왔던 곳이다. 텐트를 치고 몽돌 바닷가에서 하룻밤 잔 적도 있는데, '다그르르르 자그르르 돌돌' 하는 그 몽돌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잤던 일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태풍 때문에 큰 돌들이 밀려오기도 했고, 사람들이 자꾸 돌을 훔쳐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일부러 가져다놓은 돌도 있다는데, 그래서인지 예전에 비해 몽돌의 크기가 참 커졌다.

작은 녀석들이 내는 자그르르 소리가 큰 돌들이 내는 드그르르 소리보다는 훨씬 정겨운데, 아쉽다.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선'에 꼽힐 만한 소리임에는 틀림없다. 바닷가에 주저앉아 녹음기에 몽돌의 아름다운 소리를 녹음했다. '돌돌 도르르르…….' 소리가 참 좋다. 좋은 이에게 들려줘야지.

다그르르르 자그르르 돌돌돌

거제 학동 해수욕장의 몽돌
ⓒ 김은주
뿌리를 훤히 드러낸 소나무들과 거제 학동 동백림(천연기념물 233호) 근처를 한참 거닐었다. 동백림은 14번 국도 때문에 숲의 위 아래가 단절돼 있어 안타까웠다.

그 곳에 오랫동안 산다고 전해지는 팔색조 또한 요즘은 통 보기가 힘들어졌단다. 거기 사시는 분들은 가끔 팔색조 울음소리를 듣기도 한다지만, 직접 보지 못한 지 꽤 됐다고 했다.

이렇게 사라져 간다, 우리 곁의 아름다운 존재들이, 하나씩 둘씩. 한숨 나온다.

배를 기다리는 동안 해녀의 숨비소리를 학동에서 만났다. 무얼 잡으시는가. 해녀가 자맥질해 들어가는 순간부터 셔터에 손을 대고 다시 나올 때까지 숨을 참고 기다렸다. 내가 몇 번이나 다시 숨을 들이킨 뒤에야 다시 물 밖으로 몸을 내밀고 거친 숨 내쉬는 해녀. 참말로 대단한 폐다, 저렇게 오랫동안 숨을 참을 수 있다니. 그이의 숨비소리에 몽돌의 자그르르르 소리가 섞여 든다.

거제도에서 만난 해녀
ⓒ 김은주
맨발로 몽돌을 자박자박 밟고 지나는 이병철 선생님 발이 참 이뻐 보인다. 사진 찍는다는 핑계로 등산화를 벗어 들지 못한 게 돌아와서도 아쉽기 짝이 없다.

<겨울연가> 촬영지로 이름나는 바람에 엄청난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는 외도에 들렀다. 인공의 냄새가 너무 많이 나서 불편하기는 하지만, 피어 있는 꽃들은 곱다.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식물원을 꾸미느라 이 섬의 주인 부부가 애쓴 것만은 인정해 줘야 할 일이다. 우리 식생과 마구 뒤섞인 외래종들이, 난데없는 그리스 조각상 정원이 마뜩치는 않지만 그래도 그 아래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나쁜 일은 아니라 해야겠지.

지심도의 나무들은 더 크고 더 많이 자랐건만...

외도에서
ⓒ 김은주
외도의 마가레트 꽃
ⓒ 김은주
그에 비해 꾸며지지 않은 섬 지심도는 외도와는 얼마나 달랐는지. 외도가 환하게 제 속을 다 드러내고 있는 데 반해 지심도는 사람들을 제 속 깊이 받아들이고, 사색하게 하며, 느리게 걷고 싶게 만드는 섬이다.

사람들로 넘쳐나는 시끄럽고 유난한 관광지가 아니라 오랫동안 바다가, 바람이 키운 키 낮은 동백들이, 후박나무가 후덕한 어른 같은 얼굴로 사람들을 맞는 곳이다. 동백섬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참식나무, 팔손이, 까마귀족나무 따위 나무들이 훨씬 더 많이 자라고 있는 푸른 원시의 섬, 지심도.

지심도는 꼭 1년 만에 다시 찾게 됐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 물고 뛰어내리기 전에' 시구를 들고 찾아갔던 지난해, 마음 쓸쓸했던 시간의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초록 빛깔 사람들'의 조순만 선생이 안내를 해줬는데, 이 섬에서 동박새를 잡아다 일본에 파는 이들이 있다는 놀라운 얘기를 해 주신다.

자연자원이 상품이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서구에서 희귀한 앵무새 한 마리는 몇 억을 호가한다는 얘기 또한 심심찮게 들어왔지만, 그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진다는 곳에 와 있자니 새삼 마음 씁쓸하다. 15가구 29명 주민이 사는 이 작은 섬에서 말이다.

지심도 동백길
ⓒ 김은주
1년 전에 비해 나무들도 나도 꼭 그만큼 더 자랐고, 또 변했다. 이 나무들이 나이테 하나를 더해 가는 동안, 내가 새긴 한 해의 나이테는 남들에게 내보일 만한 것인가 어떤가 동백터널에서 물어보게 되더라.

혼자 갔던 지난 여행, 셀카를 찍는 내 뒤에서 기꺼이 배경이 되어 주었던 대숲도 여전하고, 저만치 빛이 환한 바다로 사람들을 이끌던 깊은 숲도 여전했다.

다만 변한 것은 나. 나무들처럼 좀더 깊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면, 자신 있게 한 뼘쯤 마음의 키높이가 자랐노라고 동백나무들에게 자랑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다만 노력하고 또 노력할 뿐이다.

지심도 대숲에서 쑥쑥 자라던 죽순을 저녁에 맛볼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여행에 덤으로 주어진 행운이다.

지심도에서 만난 벌레가 지나간 길
ⓒ 김은주

덧붙이는 글 |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우리나라 첫 번째 국립공원인 지리산 국립공원 지정 40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4월 17일부터 국립공원 지역의 도보순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7월 13일까지 8주 동안, 주마다 5일씩 국립공원을 돌아볼 예정입니다. 제가 참가한 구간은 2주차(4월 23일-4월 25일) 구간 가운데 3일이었습니다. 일반인의 참가 신청도 받고 있지요. 자세한 일정은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http://www.knps.or.kr/)에 들어가서 ‘국립공원 40일 도보순례단’을 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4월 24일의 기록입니다


태그:#통영, #거제도, #몽동해수욕장, #돌고래, #동백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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